[스크랩]새책소개

배선옥 2013. 5. 9. 22:37

 

17세기 중엽 이전의 가족은

 부계, 모계 모두가 중요시되었으며,

상속에서도 아들, 딸 차별이 없었다고 합니다.

 

즉 모계와 부계 , 양계가 모두 존중되어, 남녀차별 없이 출생순위도

 관계없이 딸이랑도 살고 아들이랑도 가정 형편껏 살았대요. 

 

 

 

 

 

 

그러나 고려말에 성리학이

신진사대부에 의해 중국에서 도입되었답니다.

 

하지만 옛 전통이 쉽게 바뀌지 않은 상태로 조선 중엽이전까진

예전처럼 살아왔는데 그 증거로 ~ 우리가 존경하는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강릉 오죽헌에서 키웠다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한데,

 신사임당이 시집살이가 싫어서 친정에서 지냈을까요.

당시의 자연스런 풍습 이였다는 것입니다.

 

중엽이후에 송시열선생에 의해 부계 일변도의 가부장제로

 강화되면서 지금까지 내려온 것인데 일제탄압과정을 거치고

근대에서 현대까지 마치 우리나라의 원래 전통가족이   가부장제였던 것처럼 왜곡되어 지금까지 전통 생활양식인 것으로 인식되어 버렸다는 거지요.

 

사실 우리나라 전통은 오히려 고대사회로부터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를 걸쳐서 17세기 중엽이전까지

쭈욱~~~~  서류부가 혼이란 풍속이 지켜져 왔는데

 

이 서류부가혼은 요즘의 처가살이와는

다른 개념으로 사위가 결혼해서 처가에 머무는 풍습으로 ,

 '장가를 든다'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서류부가혼의 풍속은 결혼식 이후 자식을 낳아

성장할 때 까지 처가에서 살기도 하고 바로 친가로

가기도 하는 등 사는 방식이 다양했고 처가에서

 혼인식을 올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행하여 왔던

 일로 그런 풍속때문에 오늘날에도 결혼날짜를 신부측에서 잡는것이라 하네요.

그 당시에는 출가외인이라는 관념도 없었고 , 처계나 모계친도 부계친만큼

 중요하게 생각해, 출가한 딸과 외손도 특혜 및 상속

 까지도 당연히 존재했다고 합니다.

 

 

제사는 보통가정에선 조부모까지, 관록 있는 집은

증조부까지 2~3대까지 봉사했으며, 출생순위에

관계없이 자손들이 해마다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 ,아들, , 손자 등의 자손들이

 특정제사를 맡는 분할봉사가 있으며 , 딸만 있어도

 외손봉사가 가능하여 양자도 들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때까지의 가계도를 보면

사위와 외손과 사는 가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7세이 중엽이후 송시열 선생에 의해

 성리학이 강화되면서 부계직계가족으로

이뤄진 가부장제가 강화되고 제사가 4대까지

 확대되고 ,8촌까지로 구성된 당내촌 과 문중이 만들어지면서 ,

 친족만이 존중되는 사회, 양자를 들여 재산을 딸에게는

 물려주지 않고 양자에게 물려주는 양자문화가 도입되고,

장남단독봉사가 되면서 장남우대사상으로 딸과 지차들이

 차별받는 사회가 되었으며 ,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

 열녀문등의 여성억압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문화가 시작된 것이랍니다.

 학자들은 이를 이르러 자궁가족이라 하는데 ,

 자궁가족이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이르는 말이고 ,

 여성들은 모진 시집살이를 견딘 후 자신의 자궁가족

 반드시 며느리를 포함시켰는데 ,며느리를 포함시킨 이유는

 며느리한테 자신이 겪어온 아픔을 대신 갚으려는 심리랍니다.

 

자신이 시집살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큰 힘 이였고,

여자들이 죽기 살기로 아들을 낳으려고 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한때는 시집살이 한 사람이 더 시킨다는 말을 탄생시키기도 했나봅니다.

이쯤 되면 군대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 남자의 적은 남자 " 였듯이

시집살이 이데올로기로는 여자의 적은 여자 가 맞는 걸까요?

 

 

성미애 교수 방송대 한국가정생활사 참조

출처 : [우수카페] 시어머니와며느리
글쓴이 : 리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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