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맛 KAMA저널 2013-2015

배선옥 2015. 1. 6. 16:23

오래 가라앉히고 다듬어서 오히려 담백하고 정갈해진 사랑 노래.

정윤천 시집 - 십만 년의 사랑

 

 

 

그림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시집은 일변 화첩 같기도 하고 일변은 시집 같기도 하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사람의 마음을 끄는 어떤 장치가 있었던 듯싶은데 바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파란 밤마다와 그 바다를 떠가는 배 한 척이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배 안의 누군가도 별 같은 작은 등불을 들고 있다. 그는 지금 막 드디어 찾아낸 십만 년의 사랑을 향해 멀리 보이는 해안으로 다가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제 막 사랑 하나를 내려놓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채근하며 돌아선 길일까. 시인의 감성이 그림을 통해 절절하게 시를 읽는 이에게 넘어오는 순간이다. 이 감성의 소통은 시집을 읽는 내내 여일하게 이어진다. 시도 그림도 모두 맘에 쏙 박힌다.

 

십만 년의 사랑이라니 그런 사랑의 색깔은 밤처럼 깊고 진한 모양이다. 누군들 한 시절 사랑에 목메어 보지 않은 이 있으랴만 시인이 자근자근 불러내는 이 사랑은 왠지 끈끈하지도 않고 달달하지도 않다. 십만 년이라 이름 지어진대로 오래오래 가라앉히고 다듬어서 오히려 담백하고 정갈해진 마음이 바람 한줄기처럼 다가왔다가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제 막 도착한 사랑이든 아님 입술을 깨물며 돌아선 사랑이든 눅눅하지도 않고 거추장스럽지도 않다.

 

1.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년의 해가 오르고

십만 년의 달이 이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려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년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중략)

 

3.

천 번쯤 나는 매미로 울다 왔고

천 번쯤 나는 뱀으로 허물을 벗고

천 번쯤 개의 발바닥으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으리라

한번은 소나기로 태어났다가

한번은 무지개로 저물기도 하였으리라

(중략)

[졍윤천/ ‘십만 년의 사랑중 발췌]

 

 

 

 

 

창마다 설치한 채양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한 밤이다. 문만 닫아걸면 세상천지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는 집이건만 유독 빗소리에만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투덕투덕 거리며 띄엄띄엄 떨어지던 빗방울이 곧 우두둑 우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가 싶더니 콩을 쏟아 붓는 것처럼 쉴 새 없이 퉁퉁거린다. 이쯤이면 가뜩이나 잠귀가 밝은 나는 잠을 접고서 밤 새 뒤척이는 수밖에.

 

책상 위에서 며칠. 그리고 가방 속에 또 몇 날인가를 넣어가지고 다니던 정윤천 시인의 시집 십만 년의 사랑을 꺼내와선 다시 읽는다. 절절하지만 담백한 감성과 진하지만 싫증나지 않는 감정의 분출 그리고 독특한 정윤천 시인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시어들이 오랜 시간동안 그의 시 속에 즐겁게 머물다 가라고 옷자락을 붙잡는다. 그 작은 억지가 싫지 않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내 마음이야 어디서든 태워주거나

내려 줄 수도 있었겠지만. 몇 대 쥐어박아보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끝난 일이야! 어금니를 깨물어도 보는 거지만.

정류소를 빠져나와 꽃가게 앞을 지나고, 정자네 해장국집 옆

골목을 돌아서다가. 거기 가슴팍 다친 승냥이 한 마리로 너도

그렇게 서성거려본 적이 있는.

[정윤천/ 대합실 부근 전문]

 

시를 쓰는 여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밤마다 배갯머리에서 조근조근 읽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시집이다. 물론, 근래 들어 엄청나게 고단해진 내 일상이 아직까지 그 일을 시도해 볼 여력을 허락하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곧 이 일을 실행해 볼 참이다. 생각만으로도 나는 벌써 달달해지는 느낌이지만 막상 다른 누군가는 닭살이 돋는다고 하려나? 그렇지만 정윤천 시인의 시집 십만 년의 사랑을 읽다보면 눈으로 읽기보다는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지고 그리곤 자꾸자꾸 저절로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 나름의 숙제를 한 개 만들어 마음에 새겨두고 비오는 한 밤을 내내 뒤척인다. 퍼붓는 빗소리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그 여자의 남편은 물론 코를 골며 단잠을 자고 있다.

 

무라카미 류는 그의 소설 오디션에서 인생에서는 때때로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 때까지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것이 모두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듯 한일인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건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생겨나게 하며 상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고 그리고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시간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린 다시 또 사랑을 시작하리라는 것을 안다. 내가 간직한 사랑만은 십만 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을 유일한 것임을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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