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맛 KAMA저널 2013-2015

배선옥 2015. 1. 6. 16:24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 최인호

-. 익숙한 것들의 지루함에 대한 역설(逆說)

 

 

이 소설은 20101027일에 시작하여 같은 해 1226일에 끝난 작품이다. 정확히 두 달 만에 쓴 장편소설이다.

두 달 동안 나는 계속 항암치료를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다. (중략) 빠진 오른손 가운데 손톱의 통증을 참기 위해 약방에서 고무골무를 사와 손가락에 끼우고 20매에서 30매 분량의 원고를 매일같이 작업실에 출근해서 집필하였다. (중략) 몸은 고통스러웠으나 열정은 전에 없이 불타올라 두 달 동안 줄곧 하루하루가 고통의 축제였다. [작가의 말 중에서 발췌]

 

최인호 작가의 1주기에 맞춰서 고인이 숨지기 직전까지 챙겼던 에세이 나의 딸의 딸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자세를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죽음 앞에서 더 강해지고 더 맑아진 정신을 쥐고 있었던 그의 삶의 자세를 존경한다.

 

내가 아는 어떤 소설가는 자고로 한우 등심보다 소설이 더 맛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던 것 같고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을 떠올려 보았다. 소설가의 말대로 정말 한우 등심보다 더 맛있었던 소설들도 생각났고 걔 중엔 넌더리를 내가면서도 기어이 끝까지 읽어내느라 땀을 흘린 소설도 몇 편이 생각났다. 나는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다.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공부를 하듯 소설을 읽는다. 주로 단편소설을 좋아하지만 맘먹고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을 읽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읽어낸 소설들은 어떤 때는 내 인생의 우물을 조금 더 깊어지게 하는 삽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내 시의 텃밭을 적시는 시원한 우물이 되기도 한다.

 

동네 서점에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주문해두고는 통 찾으러 가질 못 했다. 서점 앞을 지나면서도 선뜻 책을 찾아들고 나오고 싶지 않아서 또 한참을 뜸을 들였다. 솔직하게 말 하면 나는 최인호의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에 책을 가지러 갔다가 서가에 꽂힌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이미 읽었다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소설 겨울 나그네는 어느 한 시절 내 감성의 원천이었을 때가 있었다. ‘민우라는 남자에 빠져 함께 마음 아파하고 행복해 했었으니까. 신문에 연재되는 겨울 나그네를 읽으려 매일 신문을 기다리던 시절. 소설 덕분에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자세히 공부했고 보리수는 지금도 좋아하는 곡이 되었다.

 

내내 재미없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나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한참 전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을 때는 크기는 크지만 아기자기하지 않아서 감당하기엔 좀 버거운 지루한 건물을 구경하는 듯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낯설음과 불편한 시선을 던져 버리고 갈피갈피의 사람 냄새를 뒤적여 맡아 볼 수 있었다.

 

지난 주 아들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엘 갔다. 마치 이웃 도시에 여행을 가 듯 가볍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는 녀석을 보면서 나도 녀석이 어디 가까운 곳에 잠깐 다니러 가는 듯 주변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걱정과 우려의 눈빛( 그러니까, 외동아들을 멀리 떼어놓는)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는 너무 담담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녀석이 떠난 다음날 아침이 문제였다. 녀석이 제 방에서 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깨워주려 방문을 열었던 것인데 텅 빈 방을 보면서 비로소 녀석의 부재를 기억해 냈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듯 가슴 속에 확 밀려들어오던 찬바람이 너무 서러웠다.

 

미처 익숙해지지 않은 상황들을 길들여서 낯익은 광경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삶의 어설픔.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그것은 이미 내가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이 소설과 다른 점이다. 날마다 새로운 날임에도 날마다 낯익은 일상 속에서 살 고 있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니 그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다.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눈을 떴더니 세상은 모두 그대로인데 또 그대로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언제나 비비적거리던 일상들이 마치 오늘 처음 대하는 것처럼 생경하고 낯설다면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외롭고 슬플 것 같다. 아니, 두려움 때문에 지래 숨이 넘어갈 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제목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잠의 꼬리는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았다. 잠의 도마뱀이 꼬리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알 수 없는 미궁의 숲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잠을 포기하고 K는 생각하였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면 K는 충분히 늦잠을 잘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자명종이 울렸던 것인가.(page19)

 

이 소설을 읽다보면 죽음 앞에서 참으로 아득하면서도 말 할 수 없이 두려운 작가의 마음이 읽힌다. 사랑하고 애틋해 하던 모든 것들은 그대로인데 혼자만 빛을 향해 떠나가야 하는 그 가슴 졸임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안타깝다. 작가가 느끼던 외로움과 고통이 행간에 그대로 흐르는 걸 느끼는 것은 숨이 막히기도 한다.

부재중 통화.

부재중 통화라 함은 아내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K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아침에 분명히 22시쯤 전화를 걸었고, K와 통화를 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부재중 통화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는 것일까. 과연 아내와 통화를 한 사람은 누구인가. 아내에게 곧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그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K 자신인가, 아내인가, ‘인가, 휴대폰인가, 어제라는 시간인가, 오늘이라는 시제인가. 극장이라는 공간인가, 술집이라는 장소인가.

K는 혼란스러웠다.(page104)

 

아직은 한낮의 햇살에 눈이 따가우니 그늘이 한결 진하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는 사이 건너편 가로수 그늘이 무척이나 시원해 보인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은 법이라고 했었던가. 그렇지만 계곡도 계곡 나름이 아닐까 계곡이 빼어나면 산도 계곡에 묻힐 수 있을 거다. 최인호라는 작가야말로 산이 묻혀버린 빼어난 계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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