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맛 3

배선옥 2015. 1. 7. 18:17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 이재무

 

여간해서는 자리를 보전하고 눕는 일은 없는 내가 이번엔 한 사나흘을 꼼짝 않고 누워서 지냈다. 아이들의 기말고사가 막바지에 이를 때쯤부터 이미 그 조짐이 있었다. 내 몸이라고 하지만 내 맘대로 앓아누우면 안 되는 제도권 밖의 시간 노동자이다 보니 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그 고통들을 달래고 억지로 누르고 있었던 것일까?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고 날 닦달 하는 그 것들을 도저히 이겨낼 것 같지가 않았다. 내 생활도 시가 될까. 이재무 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이불 속에서도 나는 내내 우울했다.

 

최근 내 시편들은 주로 길 위에서 구한 것들이 많다. 이것은 직업과 상관성이 없지 않다. 나는 정규직이 아닌 관계로 하루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중략) 시는 내 생활의 기록이다. 내 시편들은 생활 속에서 발견한 것들이다.(중략) 내 손을 떠난 시편들은 더 이상 내 소유물이 아니다.(중략) 시여! 그러면 안녕!(page132 시인의 말)

 

페이스 북을 하면서 잘 모르던 시인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여기서 이란 개인적인 친분이 아니라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라고 문학인 테두리의 지평을 조금 넓혔다는 소리다. 페이스 북을 처음 시작하자마자 잠시 열광했던 시인은 그의 산문집이 한 권 나옴과 동시에 차단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이젠 아는 사람이라 할 수도 없고. 오며가며 인연을 맺다보니 시인 시인 시인...대부분이 글 쓴답시는 사람들뿐이라 결국 페이스 북 덕분에 그 인간관계의 영역을 넓혀볼지도 모른다는 희망과는 다르게 나는 여전히 좁은 울타리 안을 뱅뱅 돌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내가 뱅뱅 도는 그 울타리 어디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의 이재무 시인도 있다.

 

그는 1958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1983[삶의 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경인교대의 인문학 특강에서 처음 대면한 그는 생각보다 소박한 옆집 아저씨 또는 학교 선생님이셨다. 감춰지지 않는 진한 충청도 사투리가 나는 퍽이나 정감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사투리를 알아듣는 내가 불편했던 것 같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수업...그의 팬들이 하두 열광을 해서 나도 짐짓 열광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수업을 듣는 내내 나에게 열 두 번은 되물어봤던 것 같다. 아쉽게도 그날 그의 두 시간짜리 강의는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가 함량미달의 강사였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너무 쉽고 가볍게 강의를 하는 바람에 진중한 그의 면모를 음미하고 싶었던 진짜 관객들이 김이 좀 샜다는 소리다.

 

아내는 비정규직인 나의

밥을 잘 챙겨주지 않는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후로는 더욱 그렇다

이런 날 나는 물그릇에 밥을 말아 먹는다

흰 대접 속 희멀쑥한 얼굴이 떠 있다

나는 나를 떠 먹는다

질통처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없어진 얼굴로 현관을 나선다

밥 벌러 간다.

(page16 '나는 나를 떠 먹는다‘)

 

아무튼, 페이스 북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인께서는 날마다 술 취해서 어쩌구저쩌구의 글을 올려댔었다. 그 글을 보면서 열광하던 뭇 대중들이 조금 부럽고 조금 셈나고 할 수도 있지만 이즈음 페이스 북에서 좀 나가네 하는 시인들은 자칭 음주페북이 트랜드다. 무슨 소린들 어떠랴 마구마구 지껄여대고 난 뒤에는 술이 깨어보지 그랬더라라고 하면 되는 분위기다. 음주페북도 멋이니 괜찮다 박수를 쳐대는 대중들도 문제겠지만 정상적인 문화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나만 이상한 건가? 이재무 시인께서도 술을 조금 줄이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도회지에 오래 살다 보니 진한 어둠이 그리울 때가 있다

 

왜 있지 않은가 광 속처럼 한 치 앞도 분간키 어려운,

캄한, 그 원색의 어둠이 뜬금없이 울컥 사무칠 때가 있는

것이다

 

도시의 어둠은 지쳐 있다 오래 입은 난닝구처럼 너덜너

덜하고 빵구가 난 곳도 있다

 

밤마다 휘황찬란한 불빛에 쫓긴 어둠들은 어디에서 유

숙하는 걸까

(page 105 '어둠이 그립다‘)

 

그가 술을 마시고 음주페북을 하는 것도 또 취중을 핑계로 되지도 않는 막말을 가끔 써댔다가 새벽에 지워버리는 것도 이해하려 애쓴다. 왜냐하면 그를 보고 있으면 이 시대의 보통의 아버지의 모습을 그가 오롯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짐짓 힘 있어 보이고 능력 있어 모이면 좋겠지만 늘 어디 20%는 빠트리고 다니는 우리 아버지을의 뒷모습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기대, 내 순정이 언젠가는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그러한 기대와 희망은 쉽게 실현도지 않는다는 씁쓸한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아니, 희망, 기대, 혹은 구원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종의 형이상학적 환성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성숙이라고 부르기도 할 것이다.(page125 상처받은 시인의 아름다움과 순정/권성우)

 

나는 그가 적당히 닳기를 바란다. 그의 뾰족한 모서리가 둥그스름해져서 누구 하나 상처받을 이 없이 오고가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다가와 쓰다듬고 주물럭거리다가 가는 그런 모서리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애초의 모습을 잃어버릴 정도로 닳아 동그래졌다면 그것은 이미 모서리가 아니다. 모서리인 척 재다가 어느 순간 모서리임을 아예 벗어버린 추잡한 모서리들이 많은 세상 아니던가. 하여, 나는 그가 모서리로 오래오래 남아주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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