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맛 KAMA저널 2013-2015

배선옥 2015. 1. 16. 16:25

이정록 시집 정말

 

 

이를 테면 시인 직업도 국가자격증이 있고 자격증 취득 시험을 면접으로 본다고 치자.(중략) 병환(病患)적인 눈빛, 바짝 마른 몸, 신경질적인 입꼬리, 독한 기침으로 밤을 새우다가 새벽에는 급기야 피도 한모금 토해내는 게 시인이라면, 그는 애초에 자격증 취득이 불가능하다. 그는 로마병정 같은, 네모나고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각 부위마다 근육이 찰진 사내이다. 국가 지정 시인들이 빈 소주병 나뒹구는 골방에 누운 채 볼펜 한자루 들 힘만 있으면 나는 쓰겠노라, 컬럭거릴 때 그는 150근 청룡도 휘둘러 다섯 송이 매화를 허공에 그리고 낫 장풍으로 낙관 마무리 한다. 하고 나서 씨익 웃는다.[page116 한창훈 '그가 그곳에서 사는 이유중 발췌]

 

나는 이정록의 시를 좋아한다. 마주친 적은 없지만 이정록이라는 인물을 만나면 왠지 금방 편한 사이가 될 것 같다. 그는 부드러운 눈빛과 소박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어느 학교 한문선생이라고 하는 그의 시엔 그가 사는 동네의 말투일 것이 분명한 사실적인 말투와 동네 사람들의 별스럽지 않은 행동거지가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듯이 그려진다. 한창훈 평론가는 그의 시를 여리고 약하고 찌그러지고 퇴색된 것에 머물며 피폐와 퇴화를 모태로 삼아 꽃을 피운다.”고 하였지만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을 만나다보면 그가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문에 그의 시를 읽으면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즐거운 재치와 유머를 만나게 된다. 그의 착한 마음을 따라 나도 모르게 긴장의 허리띠를 풀러놓고 그와 함께 뜨뜻한 엄니집 아랫목에 다리를 묻고 엄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듯 그의 시를 읽게 되는데,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불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産道)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을 놓는다 엄니, 저한테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하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page46 '엄니의 남자‘]

 

이 겨울 들어 제법 눈다운 눈이 처음 내린 어느 아침이었다. 시우(詩友)들을 불러내 조조영화를 봤다. 잘 나가던 어느 정신과 의사가 행복을 찾아 여행을 떠나며 겪는 일들이 줄거리였는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면서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열리는 거였다. 어둠 속에서 혹시 옆에 앉은 그들에게 눈물을 들킬까봐 조금 염려하면서 내내 눈물을 훔쳤다. 슬픈 장면도 특별히 감동적인 장면도 없었는데 한순간 열려버린 마음의 문은 한참을 다시 닫히지 않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 참, 나도 마음에 작은 샘 하나 가지고 있었지. 그 샘물 마르지 않았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나보네 그러니 조금만 더 잘 살아보자.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고,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며,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라고 영화 속의 의사는 자신의 수첩에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람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온 날 종일 책꽂이 정리를 다시 했다. 처음엔 헤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의 오래된 미래-라다크로 부터 배운다를 찾는 거였었지만 하다 보니 아예 책꽂이는 물론 책방을 뒤집어 다시 정리를 하고 말았다. 시집을 꺼내 앞으로 꽂고 이런저런 책들은 다시 뒤쪽으로 집어넣고 맘 내친김에 컴퓨터 파일을 열어 일 년 동안 읽었던 책의 목록도 들여다보았다. 거기 나에게로 몰입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그 가볍지 않은 비망록들 속에 꽃잎처럼 자주 등장하던 이름 우리 엄마. 나의 글 속의 엄마도 이정록의 시 속의 엄니도 여전히 세상을 읽어내고 걸러내고 창조의 길을 열어주는 존재이며 아름다운 이웃으로 계시니 감사하다. 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라고도 했던가. 나의 엄마, 시 속의 엄니는 우리에게 집이고 채소밭이다. 또한 이정록에게도 나에게도 엄마는 출발점이고 창작과정이며 도달점이니. 이정록의 시를 읽고 그의 어머니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리 얘기한다고 한다. “그동안 정록이가 쓴 신 줄 알았는데 순전히 엄마 말을 받아쓰기해놓은 거로구만 그래.”

 

사진 액자 뒤, 장판 밑바닥, 장롱 이불장, 버선 속, 베갯잇, 쌀독, 전화기 밑받침, 냉장고 냉동실 이곳들은 늙으신 엄니의 지갑입니다.

나름 속셈을 바꿔 온 엄니의 지갑 변천사입니다 단돈 몇천원이라도 꺼낼 양이면 온 집 안을 들었다 놓았다, 도둑이 다녀간 듯합니다 도토리나 밤톨 숨겨놓은 델 까먹고는 먼 구름에 눈 맞추는 하늘다람쥐처럼 마른 두 손만 비빕니다 빈방 수만큼 금고만 텅텅 늘어납니다.

[page40 상호신용금고 일부]

 

책장을 덮으니 이정록의 시가 나에게 물어온다. 그러니 너의 세상은 어떠하냐? 따뜻한가? 라고. 당연하지. 나의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며 아늑하다. 그러니 사는 맛도 나고. 우리가 동네 탤런트라고 부르는 엄마는 날마다 우리형제들 머리맡에 불을 밝히고 방바닥은 따뜻한지 손 넣어 확인하신다는 듯 내가 의기소침 할 때마다 어찌 아시곤 내 등을 툭 때리시며 힘을 실어주신다. 그 손맛에 나는 또 엉덩이 한 대 맞은 소처럼 정신을 퍼뜩 차리고 냅다 앞을 향해 걷기를 시작하는 거다. 고마워요. 엄마.

 

돌아보니 지난 한 해는 정말로 숨 가쁘게 달려왔다. 여름휴가 시작하는 날부터 성탄절 휴가를 떠나는 날까지 도서관 시 창작 강의에 매진하였다. 특출하지 않은 강사라 성실하게 매시간 마다 최선을 다 했다. 덕분에 뿌듯한 결실을 거두기도 했으니 잘 했어 라고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아쉬움이 하나도 없지는 않지만 그 아쉬움은 또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폭제로 사용할 거다. 새 수첩에 내년에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다가 큰 글씨로 진하게 꼭꼭 눌러 적는다. 작은 일에도 크게 감사하기. 더불어 행복하기. 그러니 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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