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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진석 2008. 7. 9. 20:03

     

    유림역 근처의 종루   사진 baidu

     

     

     

    계명역, 북경 인근에서 가장 원형의 역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   사진 baidu

     

     

    팔달령 가는 경장철도상의 청하역   사진 양진석

     

     

    중국의 역참과 그중의 하나 유림역

    중국의 역참(驛站)제도는 군사상의 첩보나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는 관리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장소였다.

    북경 연경(延慶)현 강장(康庄)진 유림보(榆林堡)는 고대의 역참이었다. 연경현의 서남부에 자리하고 하북성 회래현의 경계선에 있다. 유림성곽은 “凸”자형으로 되어 있다. 북쪽은 벽돌구조이고 남쪽은 흙으로 쌓아 올려졌다. 성곽의 동서는 400여 미터, 남북은 250미터 가량되었다. 성곽의 높이는 10m에 달했다. 하지만 이런 장대한 성곽도 대약진시기와 문혁시기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북쪽 성곽만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다. 

    유림역은 역대로 북경 교통선상의 요지였다. 춘추전국시대 계성(薊城)에서 거용관(居庸關)을 지나 유림에 도착해서야 한숨을 돌리며 쉴 수 있었고 다시 말을 몰아 중원의 제후국에 도착했다. 진한시대에 와서도 이 길은 수시로 보수되고 확장되었다.

    원나라는 몽골에서 출발해 북경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중원의 주인이 되서도 자주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 하며 수시로 유림을 지나 몽골땅에 다녀왔다.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때 주원장이 자금성으로 들어서자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건덕문(建德門)을 나서 거용관과 유림역을 지나 막북(漠北)으로 도망쳤다.

    주원장은 이렇게 몽골 황제를 �아 냈지만 자신의 후손이 다시 몽골족에 의해 포로로 잡힐 지는 몰랐을 것이다. 정통제는 환관 왕진(王進)의 꼬드김에 넘어가 친정을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포로로 잡히는 비운의 처지가 된다. 바로 유림역 근처였다. 후세 사람들은 정통제가 허허벌판에 다름없는 토목보가 아니라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왔으면 아무리 퇴각하는 입장이었지만 포로로 잡히는 일만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몽골의 장수인 에센과 병졸은 토목보와 유림, 연경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만큼 이곳이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요지였기 때문이다. 에센이 물러간 뒤 명나라는 이 곳에 다시 성을 쌓고 방어벽을 쳤다. 팔달령 장성이 더욱 공고해 진 것도 이무렵이다.

    청나라 초기에는 북벌에 나서는 일이 많아졌다. 강희, 건륭제는 모두 이 길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러 나섰으며 그때마다 유림역은 톡톡히 그 역할을 수행해 냈다. 

    20세기가 시작되던 1900년 의화단의 난으로 촉발된 팔국연합군의 침략으로 광서제와 서태후는 급하게 서안으로 몽진을 했다. 간신히 팔달령을 지나 유림역에 도착한 일행은 민가를 들러 요기를 하고 다시 서안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때 서태후가 먹었던 음식이 일약 히트상품이 된 일도 나중에 민간에 떠도는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유림역에 성곽이 들어선 것은 전적으로 외적의 침입으로 쓰라린 역사를 겪었던 명대 중기에 들어서였다. 이미 말했던 정통제와 후대의 정덕제는 이곳에 성곽과 성문을 쌓았는데 지금은 훼손된 성곽의 일부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유난히 묘우(廟宇)가 많았다. 재신묘, 성황묘, 화신묘등 도교와 관련된 것들인데 지금은 허물어진 상태로 보존상태가 그다지 양호하지는 않다.

    명나라때 중요성이 부각되었기에 이 곳에 남아있는 사합원의 주택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600여년이 넘는 가옥이 그 형태가 보존되고 있으며 일부에선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현재는 유림역 박물관이 짓고 있으며 이곳에서 고대의 중국의 역참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