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benel 2018. 3. 15. 23:27

포항 북구 신광면 영일 냉수리비


1991년 3월 15일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67cm, 너비 72cm, 두께 25∼30cm이며 1989년 4월에 발견되었다. 화강암을 일부 가공하여 앞면 ·뒷면 ·윗면에 글씨를 새긴 특수한 형태의 고비(古碑)로, 앞면 12줄 152자, 뒷면 7줄 59자, 윗면 5줄 20자 등 모두 231자가 거의 또렷이 남아 있다.
이 비석은 앞면에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지증왕(智證王)의 즉위 전 호칭을 썼고,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로 미루어 443년(눌지왕 27) 또는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것이 분명하여 이제까지 신라 최고(最古)의 비로 알려졌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竹邊面) 봉평리(鳳坪里) 고비(524년 건립)보다 81년 또는 21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훼부(喙部) ·사훼부(沙喙部) 등 신라의 옛 지명과 아간지(阿干支) ·나마(奈麻) 등의 관등명이 나타나 신라 상대(上代)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은 왕교(王敎)를 받아 중신회의(重臣會議)가 지도로 갈문왕에 의해 주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 중신회의를 신라 최고회의였던 화백으로 보고, 갈문왕이 화백의 의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은 이두가 너무 많아 정확한 판독에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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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남아 있는 고신라의 금석문은 고구려나 백제와 같고도 다르다. 20여기라는 수량도 수량이지만 수록 내용도 재산분쟁이나 상속, 토목공사의 책임에 관한 것들이어서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복원 할 수 있다. 예컨대 영일 냉수리비의 내용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의 소유 재산과 죽은 후 재산상속 문제, 재산분쟁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 출신 고위관리 7인이 계미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절거리가 죽은 뒤 제아사노(弟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말추(末鄒), 사신지(斯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을 결정한 내용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후면 2행에서 마지막인 제7행까지로 중앙에서 파견된 전사인(典事人) 7인이 앞의 고위관리 7인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를 지내고 이를 포고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런 사례는 울진 봉평비(524년·국보 제242호)에도 보인다. 당시 울진지역의 모반사건을 중앙정부군이 진압한 뒤 모즉지매금왕(법흥왕)과 신료 13인이 육부회의를 열어 칡소(얼룩소)를 잡아 의식을 행하고 현지 관련자들에게 장 60대와 100대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 금석문은 공문서와 율령비 성격을 각각 띠고 있다. 흔히 비석 하면 고려의 선사탑비(禪師塔碑)나 조선의 신도비(神道碑)를 떠올리지만 이 금석문들은 지금의 법원 판결문이나 정부의 담화문을 연상시킨다. 이런 정보는 백제의 무령왕릉지석이나 사택지적비와도 다르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나 모두루묘지명과도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냉수리비나 봉평비의 서체는 일상에서 자유롭게 사용되는 통행서체다. 필획의 뿌리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중원고구려비 같은 질박한 고예계통의 연장선상으로 읽힌다. 비정형적인 해서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적 글씨로 이해할 수 있다. 냉수리비의 필획이나 글자의 짜임새, 글자와 글자 간의 배치인 장법(章法)은 자연석을 있는 그대로 전면·후면·상면에 쪼아 새긴 삼면비의 특이성만큼이나 자유분방하다. 점획은 앞서 본 대로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고예계통을 토대로 변화가 심한 글자구조를 따라 장단의 변화나 기울기가 심하다. ‘盡令’ ‘前世’ ‘交用’ ‘干支’ ‘居伐’ 등과 같은 글자의 필획은 하나같이 자유롭다. 다만 광개토대왕비는 필획의 곡직(曲直)이 중후하면서도 절제가 있어 엄격하다면 냉수리비는 곡직의 혼용에다 장단의 변화까지 있어 더 자유롭다.
글자의 짜임새나 글자로 바위 면이라는 공간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도 점획의 운용과 마찬가지로 자유롭다. 이러한 고신라비 글자의 조형미를 두고, 한편에서는 선진 중국글씨를 먼저 수용해 자기화한 고구려, 백제보다 후진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우리다운 글씨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한예의 고구려적 재해석인 광개토대왕비의 신라적 변용 내지 확장으로 보고 싶다. 국가나 왕실의 근엄한 권위가 글씨 속에 내장돼 장식성이 강한 광개토대왕비체를 토대로 신라 고비는 일상생활이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일상의 정서나 미감까지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일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고구려의 영향이 미쳤던 곳이자 낙랑시대 한인계통의 진솔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발견되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요컨대 고신라의 글씨는 광개토대왕비체에서 영향을 받았으되 신라의 독자적인 미감으로 소화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 발견된 포항의 중성리비(501)나 냉수리비, 봉평비와 같은 시기로 보이는 금관총 출토 이사지왕 환두대도 명문, 훨씬 이전인 호우총 호우명의 글씨풍도 증명해준다.
이렇게 돌은 말없이 1500여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없이 전해준다.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그렇다면 1000년 뒤, 1만년 뒤 살아남은 2013년의 글씨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종이책일까. 전자책일까. 그것도 아니면 금석문일까.
(2013.12.13/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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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 냉수리(冷水里)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고비(古碑)
이칭 : 냉수리비, 냉수리신라비
분야 : 고대사유형문화재,
시대 : 고대-삼국-신라
지정기관 : 문화재청
지정부류 : 국보
지정번호 : 제264호

국보 제264호. 건립 연대는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443년(눌지마립간 27) 또는 503년(지증왕 4)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공문서(公文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89년 3월 말, 이곳에 사는 주민 이상운(李相雲)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발견하여 4월 11일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학술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는 발견자의 조부 대(代)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고 하므로 정확한 원래 위치는 알 수 없다. 1989년 9월 현재 영일군 신광면 면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다.

영일 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倭)·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은 안강(安康)·청하(淸河)·흥해(興海)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가 발견된 냉수리는 곡강천과 형산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부근 흥곡리에는 군내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이 비는 자연석 화강암의 전면·후면·상면에 글자를 새긴 삼면비(三面碑)이다. 전면은 면을 다듬었으나 후면과 상면은 다듬지 않은 채로 글자를 새겼다. 형태는 전면 하변 너비 73㎝, 좌변 높이 47㎝, 우변 높이 66㎝, 두께 30㎝의 부정형 4각형이며 밑부분이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너비가 축소되었다.

비문은 전면에 12행 152자, 후면에 7행 59자, 상면에 5행 20자로 총 231자가 새겨져 있고 음각을 하였다. 서체는 해서체(楷書體)로 보이나, 예서체(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와 매우 비슷하다. 글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아 전면의 가장 큰 글자는 길이와 너비가 각 5㎝이고, 가장 작은 글자는 1∼3㎝이며, 후면과 상면의 큰 글자의 경우도 5∼7㎝ 정도이다. 비문은 크게 4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자가 파손된 곳이나 마모되어 읽을 수 없는 부분은 별로 없으므로 판독에 큰 문제는 없는 듯하다. 다만 후면 제1행의 제7, 8자의 경우 글자가 불분명하여 판독상에 이견이 있고, 같은 후면 제6행의 제7, 8자도 판독하기 매우 힘든 글자이며 이 이외에도 판독상의 문제가 되는 글자들이 있다.

첫째 문단은 전면의 제1행에서 2행까지로서,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이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를 인정해준 것이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는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누구인가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둘째 문단은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로서,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六部)출신의 고위관리 7명이 계미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 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절거리가 죽은 뒤 제아사노(弟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말추(末鄒)·사신지(斯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을 결정한 내용이다.
셋째 문단은 후면 2행에서 마지막 행인 제7행까지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전사인(典事人) 7명이 앞의 고위 관리 7명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祭儀)를 지내고 이를 포고한 것을 기록하였다.
넷째 문단은 상면 제1행에서 마지막 행인 제5행까지로 촌주(村主) 2명이 비의 건립 등의 일을 마친 것을 기록하였다.

냉수리 신라비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항들을 담고 있다.
첫째, 지증왕이 왕이 되기 전에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고 그가 속해 있었던 부가 사탁부(沙啄部)였다는 점,
둘째, 지도로갈문왕 이하 6부 출신의 고위 관리 7명을 7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셋째, 신라의 국호로서의 사라(斯羅)라는 명칭과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으로 비정되는 내지왕이라는 인물과 신라 6부 중 습비부(習比部)에 비정될 수 있는 사피(斯彼)라는 부의 이름이 이 비에서 최초로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전사인 7명이 6부 출신이면서 1명을 제외하고서는 관등 표기가 없다는 점, 또한 냉수리비를 제외한 이후의 6세기 금석문에서는 다수의 귀족관료들을 열거할 때에는 동일한 직명을 소지하였을 경우 관등(官等)의 높고 낮음이 기준이 되어 기재하는 것이 거의 예외 없이 지켜진 하나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비에는 관등의 고하(高下)가 아니라 부(部)를 중심으로 인명을 나열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 정치운용에서 부가 하나의 단위 정치 집단으로 기능하고 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정치가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중앙의 고위 관리 가운데 본피부(本彼部)와 사피부 출신자의 관등과 촌주의 관등이 ‘간지(干支)’로 나오고 있다는 점,
여섯째, 이 시기 개인의 재산 소유와 상속에 관한 사항 및 재산 분쟁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
일곱째, 촌주와 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직명이 나와 지방 통치 조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는 점 등이다. 종래에는 도사 등 행정촌에 파견되는 지방관이 6세기 초 군주제 시행 이후 또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두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비의 발견으로 신라 지방제의 기원을 훨씬 소급되게 되었다. 그러나 5세기대에서 지방제의 시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당시 아직 신라의 전체 영역에 대해서까지 직접적인 지배를 실현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왕도와 가까운 인접지역에만 한정하여 지방관을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6세기에 들어와 지증왕(智證王), 법흥왕대(法興王代)를 거치면서 전국에 걸쳐 점차적으로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에서 재(財)를 가운데 놓고 재지세력 사이의 분쟁을 이용하여 그들 가운데 중앙에 좀 더 충성심을 보여 지방지배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유력자에게 촌락지배권을 인정해주고 그를 매개로 지방을 직접 지배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여덟째,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이 비는 이처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학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해결의 문제가 없지 않다.
첫째,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관계로 비면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전문의 판독이 가능하지만 10여 자 정도는 판독자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정확한 판독이 요망된다.
둘째, 상면에 글자를 새기고 있어서 이러한 형태를 비로 보아야 할 것인지의 여부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비의 건립 연대인 계미년이 연구자 사이에 383년, 443년, 483년, 503년 등의 주장이 있어 많게는 12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건립 연대의 확정은 최대의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넷째, 사부지왕과 내지왕을 전세2왕(前世二王)이라 한 것, 지도로갈문왕 이하 고위 관리 7명을 7왕으로 표현한 것, 본피부와 사피부의 고위 관리와 지방의 촌주가 똑같이 간지(干支)라는 관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성격과 촌주와 지방지배에 대한 것이다. 우선 촌에는 도사가 파견되는 곳과 촌주가 존재하는 촌으로 나누어, 도사가 파견된 촌을 행정적인 촌이며 중심촌으로, 촌주가 존재하는 곳은 자연촌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촌주가 존재하는 진이마촌 같은 경우를 그냥 자연촌으로만 보느냐 역시 행정적 성격을 지닌 촌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진이마촌의 촌주를 진이마촌 출신으로 보기도 하고 도사가 파견된 지역에 세력기반을 가진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라 신라의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 양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정부의 직접지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도사가 파견되지 않고 촌주가 있는 촌에도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게 됨으로써 촌주도 촌에 대한 행정을 담당하고 재산분쟁이 일어나자 그 해결이 어려워 국가에 보고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절거리와 분쟁에 참여한 3인은 중심촌에 부속한 자연촌에 세력 근거를 가진 유력자들로서 도사가 파견된 촌에 예속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상대적 독자성을 가지면서 조세수취권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행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아직 신라의 지방지배가 초기 단계이며 국가권력이 여기에 침투해 들어가려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촌과 촌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라의 5∼6세기 지방지배에 대한 이해가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절거리에게 소유권을 인정한 ‘재(財)’의 내용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토지, 광산(鑛山), 수조권(收租權), 또는 종교적인 제사권(祭祀權)에 부속된 이권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를 규명하는 것이 이 비의 성격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중 하나이다. 또한 재를 둘러싼 분쟁이 절거리와 말추, 사신지 사이에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절거리가 죽고 난 뒤 재사아노와 말추, 사신지간에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혈연관계 사이에 벌어진 다툼으로 보아야 하는지 재지세력 사이의 이권 다툼인지에 대한 성격규명도 이 시기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과제이다. <재사아노는 제아사노(弟兒斯奴)의 오기가 아닐지>
냉수리 신라비는 형태 및 내용상에서 몇 가지 특징과 의의를 보인다. 먼저 형태상에서 볼 때 상면에 촌주와 관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상면에 글자를 새긴 것은 이 비가 최초이다.

한편, 내용상 의의는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비 중에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음으로 연대가 빠르다는 점,
둘째,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6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다수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국어학적으로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와 성립 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서체상에서 볼 때 자전(字典)에 나오지 않는 ‘사(斯)’자가 전면에 다섯 번 나오고 있어 신라식 조자(造字)의 방식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비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긴밀한 상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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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의 통신·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한국역사연구회, 푸른역사, 2004)
금석문과 신라사  (주보돈, 지식산업사, 2002)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민  (전덕재, 태학사, 2002)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  (주보돈, 신서원, 1998)
신라 육부체제 연구  (전덕재, 일조각, 1996)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영일 냉수리 신라비(가칭)의 종합적 검토』 ( 한국고대사연구회 ,1989)
영일 냉수리 신라비의 발굴조사  (모산학술재단,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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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초반 신라 6부의 성격과 지배구조」 ( 전덕재 , 『한국고대사연구』 17,2000)
「냉수비·봉평비에 보이는 신라 6부의 성격」 ( 전미희 , 『한국고대사연구』 17,2000)
「신라 육부의 지배기구와 그 변화」 ( 이문기 ,『대구사학』55,1998)
「6세기 신라의 촌락지배 강화 과정」 ( 주보돈 ,『경북사학』19,1996)
「상고기 신라육부의 성격에 대한 고찰」 ( 전덕재 ,『신라문화』12,1995)
「영일 냉수리비를 통해 본 5·6세기 신라의 재산상속」 ( 박향미 ,『경북사학』17·18,1995)
「영일 냉수리비를 통하여 본 신라의 통치체제」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1994)
「영일 냉수비의 재검토」 ( 이우태 ,『신라문화』9,1992)
「6세기 초 신라의 희생예」 ( 신종원 ,『진단학보』70,1990)
「영일 냉수리비에 보이는 지도로갈문왕에 대한 몇가지 문제」 ( 이희관 ,『한국학보』60,1990)
「영일냉수리비의 금석학적 고찰」 ( 정구복 , 『한국고대사연구』 3,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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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냉수리신라비에 보이는 관등·관직 문제」 ( 선석열 , 『한국고대사연구』 3,1990)
「영일냉수리신라비에 보이는 부의 성격과 정치운영 문제」 ( 문경현 , 『한국고대사연구』 3,1990)
「영일냉수리신라비의 5∼6세기 신라의 사회경제상」 ( 안병우 , 『한국고대사연구』 3,1990)
「영일냉수리신라비의 건립 연대」 ( 김창호 , 『한국고대사연구』 3,1990)
「영일냉수리신라비의 ‘계미년’에 대하여」 ( 김영만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11,1990)
「영일냉수리신라비의 석문과 내용분석」 ( 최광식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11,1990)
「영일 냉수비와 신라의 관등제」 ( 김희만 ,『경주사학』9,1990)
「영일지방의 역사·지리적 고찰」 ( 이형우 , 『한국고대사연구』 3,1990)
「영일냉수리 신라비에 대한 기초적 검토」 ( 주보돈 ,『신라문화』6,1989)
「新羅六部とその展開」 ( 武田幸男 ,『朝鮮史硏究會論文集』28,1991)
「迎日冷水里新羅碑について」 ( 深津行德 ,『韓』116,1990)

주01) 지금의 포항시

집필자 : 노중국(1995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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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前面〉

斯羅, 喙, 斯夫智王⋅乃智王, 此二王敎. 用珍而麻村節居利, 爲證尒, 令其得財敎耳.

癸未年九月廿五日, 沙喙, 至都盧葛文王⋅斯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 喙, 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 本彼, 頭腹智干支, 斯彼, 暮斯智干支, 此七王等共論敎. 用前世二王敎, 爲證尒, 取財物, 盡, 令節居利得之, 敎耳. 別敎, 節居利, 若先死後, 令其弟兒斯奴, 得此財, 敎耳. 別敎, 末鄒⋅斯申支此二人, 後莫更噵此財.

〈後面〉

若更噵者, 敎其重罪耳.

典事人, 沙喙, 壹夫智奈麻⋅到盧弗⋅須仇休, 喙, 躭須道使, 心訾公, 喙, 沙夫⋅那斯利, 沙喙, 蘓那支, 此七人, 䠆踪, 所白了事, 煞牛拔誥, 故記.

〈上面〉

村主, 臾支干支⋅須支壹今智, 此二人世中了事, 故記.

[국문]

【앞면】

사라(斯羅) 훼(喙)(부)의 사부지왕(斯夫智王)⋅내지왕(乃智王), 이 두 왕이 (판결하여) 교(敎)를 내리셨다.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사는 절거리(節居利)의 그것을 증명한 것이었는데,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한다는 교(敎)이셨다.

계미년(癸未年) 9월 25일 사훼(沙喙)(부)의 지도로(至都盧) 갈문왕(葛文王)⋅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자숙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干支), 훼(喙)(부)의 이부지(尒夫智) 일간지(壹干支)⋅지심지(只心智) 거벌간지(居伐干支), 본피(本彼)(부)의 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 사피(斯彼)(부)의 모사지(暮斯智) 간지(干支), 이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 교(敎)하셨다. 앞 시기의 두 왕께서 내리신 교(敎)를 증거로 하여, 재물을 다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한다는 교(敎)였다. 별도로 교(敎)를 내려 절거리가 만약 먼저 죽은 후에는 그 아우 사노(斯奴)로 하여금 이 재물을 얻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별도로 교(敎)를 내려 말추(末鄒)⋅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이 재물에 대해 다시는 트집을 잡지 말라고 하셨다.

【뒷면】

만약 다시 트집을 잡으면 그것은 중죄(重罪)라고 교(敎)하셨다.

일을 맡은 사람[典事人]은 사훼(沙喙)(부)의 일부지(壹夫智) 나마(奈麻)⋅도로불(到盧弗)⋅수구휴(須仇休), 훼(喙)(부)의 탐수도사(眈須道使) 심자공(心訾公), 훼(喙)(부)의 사부(沙夫)⋅나사리(那斯利), 사훼(沙喙)(부)의 소나지(蘇那支)인데, 이 일곱 사람이 삼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일을 마쳤다고 아뢰었고 소를 잡아 (하늘에) 고하였으므로 기록한다.

【윗면】

촌주(村主) 유지(臾支) 간지(干支)와 수지(須支) 일금지(壹今智), 이 두 사람이 세간의 일들을 마쳤으므로 기록한다.


[해설]
이 사료는 국보 제264호로 지정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로 1989년 3월 포항시 북구(구 영일군) 신광면 냉수2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2009년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신라 최고(最古)의 비석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 보물 제1758호)」와 더불어 6세기 초 신라사를 해명할 수 있는 여러 정보를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높이는 60㎝, 폭은 70㎝이며, 앞면과 뒷면, 윗면 등 총 3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뒷면이나 윗면과 달리 앞면만 돌을 다듬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앞면에만 글자를 새기고자 하였으나 공간이 부족하자 뒷면과 윗면까지 글자를 새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총 230여 자에 이르고 비문은 크게 4단락으로 나뉜다. 첫 번째 단락은 “사라(斯羅)~재물을 얻게 한다는 교(敎)이셨다[得財敎耳].”까지이다. 이 부분은 이전 시기의 왕인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이 모종의 재물을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사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의 소유라고 판결을 내린 사실을 일러두었다. 『삼국유사』권1의 왕력(王曆)편에 의하면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을 내지왕(內只王)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여기에 보이는 내지왕은 곧 눌지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부지왕은 누구일까? 다음 문단에서 사부지왕과 내지왕을 일컬어 ‘앞 시기 두 왕[前世二王]’이라 하였고, 사부지왕이 내지왕보다 먼저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부지왕은 눌지왕에 앞서 왕위에 오른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재위 402~417)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진이마촌은 이 비석이 발견된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 있던 마을로 추정된다.

두 번째 단락은 “계미년(癸未年)~그것은 중죄라고 명령하셨다[敎其重罪耳]”까지이다. 이 부분은 이 비문을 작성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과도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계미년 9월 25일이라는 날짜가 언급되어 있고 그 뒤를 이어 지도로(至都盧) 갈문왕(葛文王)의 이름이 보인다. 지도로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서경문화사』 지증왕 1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미년는 503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503년은 지증왕이 이미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 국왕의 정식 명칭인 마립간이 아니라 갈문왕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즉위가 순탄치 못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와 더불어 이 단락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지도로 갈문왕 등 일곱 왕이 의논하여 모종의 재물이 절거리의 소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별도로 교(敎)를 내려 절거리가 죽을 경우 그 아우에게 소유권이 넘어감은 물론이고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는 더 이상 재물에 대해 트집을 잡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쟁의 대상이 되는 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관련해서는 토지나 노비, 일반적인 재화(財貨), 조세와 관련한 권리, 철광산 또는 거기에서 생산된 철 등 다양한 해석이 이어지고 있지만, 비문에 그것의 성격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재물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둘러싸고 실성왕 대부터 지증왕 대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분쟁이 있었던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한 분쟁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비는 일종의 판결문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명시한 등기 문서로 보기도 한다. 이 같은 측면은 결국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무렵 재물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날 정도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분쟁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왕 한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일곱 왕이 함께 논의하였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이를 통해 당시의 국정은 국왕 단독으로 운영한 것이 아니라 6부(部) 대표자의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을 맡은 사람[典事人]~고하였으므로 기록한다[誥故記]”는 세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데, 일곱 왕 등이 함께 논의한 내용을 비에 새기고 그것을 건립하는 데 관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촌주(村主)~일들을 마쳤으므로 기록한다[了事故記]”는 윗면의 전체 문단이 이 비의 마지막 단락인데, 이 일에 관여한 현지인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렇듯 세 번째 단락과 네 번째 단락은 이 비의 건립 내지 재판 과정에 관여한 이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들이 재판 결과를 확인시켜 주는 일종의 증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비문의 말미에 기록해 둔 듯하다.

일반적으로 4~6세기는 철제 농기구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던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농업 생산력의 증대는 자연스레 경제적 부의 확대로 이어졌고, 그러한 와중에 재물을 둘러싼 분쟁이 심심찮게 발생하였으리란 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진이마촌에서 모종의 재물을 둘러싸고 절거리와 말추⋅사신지 사이에서 일어난 소유권 분쟁 역시 바로 그러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즉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경제적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진 다양한 갈등 양상의 한 단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물론이고 그러한 갈등의 해결 과정까지 기록된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국사편찬위원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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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가려면
동부산터미널;노포동에서 1:40소요 8,100원
양산시외터미널에서 1:50소요, 7,500원

이동시간과 거리를 감안하면 양산이 유리하다.
07:05 08:45 일반 7,500
08:05 09:45 일반 7,500
08:20 10:00 일반 7,500
09:05 10:45 일반 7,500

100번버스 30분간격 약24km 이동 신광면사무소 도착

 

화명역-양산역/지하철
양산역-양산시외버스터미널/도보
양산터미널-포항터미널/08:05~09:45/7,500원/08:20~10:00, 09:05~10:45)
포항터미널-신광면사무소(100번 버스/29~35분 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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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명역-동대구역 05:56-07:06, 07:24-08:28/ 4300/6200원
동대구역-포항역 07:34-08:08ktx/7,600/10,900원,여유로운 환승/08:33-09:08 환승시간조급
포항역-포항터미널
포항터미널-신광면사무소

 

포항 냉수리신라비, 영일 냉수리비, 浦項冷水里新羅碑

 

 

 

 

 

 

신광면사무소 앞에 버스를 하차하니 보이는 돌비 하나.

신라 진평대왕숭안전...

다른 안내가 없어 ...

 

 

 

신광초등학교 너머로 보이는 비학산

 

 

비각과 안내문이 면사무소 구내에 있다.

 

 

영일냉수리신라비 설명

 

 

 

 

 

 

 

 

 

국보 제 264호 영일냉수리신라비

 

 

 

20180416 월, 나홀로 냉수리신라비를 보고 왔다.

 

화명역에서 07:24에 출발하는 무궁화 열차를 타고 삼랑진, 밀양, 청도. 경산을 거쳐 동대구로 가는데 도착 시간을 기준하여 약 2분20초 정도 지체되었다.
5분 간격을 두고 갈아타야하는 ktx를 타기 위해 바삐 서둘렀다.
지난 번에 영덕 블루로드를 갈 때도 이 기차의 연결에 신경을 썼는데...
마침 ktx도 2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 것 같았다.
동대구역에 내려서 계단을 급히 올라 8번 탑승구로 내려갔다.
아직 차가 도착하지 않아 잠시 기다렸다.
ktx 08:36 포항행 출발-
포항 09:11 도착
09:20 107버스
09:26 중앙고하차,
여기서 길을 건너서 신광행을 타야하는데, 버스 앞에 신광이라는 패찰이 하나 있어 탔더니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죽도시장에 가서야 잘못을 알고 내려 건너서 차를 타게 되어 결국 시간손실 30분이다.
09:32 100신광행
09:45 죽도시장하차
주차장도착예고 11분
09:57 죽도시장 출발 100번
10:09 포항중앙고 앞 통과
30여 분을 버리고 죽도시장
위치 확인하는 득.
10:19 흥해민속박물관 통과
10:30 신광면 하차
답사하고
10:52 승차하고 포항역으로 가려고
흥해에서 환승 버스 107,500
마음을 바꿨다.
터미널의 위치와 차를 확인할 겸 시간도 남아서 포항시외버스터미널로 가기로 하고 107번을 탔다.
11:07 흥해하차
11:18 107 탑승
11:29 포항역 통과
11:33 중앙고 통과
11:46 죽도시장 통과
12:03 터미널 도착
12:30에 양산으로 가는 버스표를 구입하여 기다리다 20분이 다 되어 8번 탑승구에 있는 버스를 탔는데, 20분에 출발한다.
12:30 출발 양산행 20분인데 출발하네.
버스 출발하고 이상해서 물어보니 김해로 가는 버스란다.
구보 5분 거리를 지나서 내려 되돌아 달려왔는데
곧 차가 떠난다.
그런데 차표를 김해행 버스의 좌석에 두고 내렸다.
해당 버스회사에 문의하니 김해행이 경주에 가면 회사사무실에 맡겨두라고 한다.
나는 다음 차를 타게 되는데 결국 1시간을 버린다.
13:30 출발하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만일 미리 알았다면 김해 버스 기사 경주 간다는데 거기서 내려라면 안되었을까.
출발전에 행선지 확인 좀 해주면 안되나...에고.

13:30 포항 출발
결국 기차 시간과 같게 도착하겠네
14:10 경주터미널12분 출발
14:16 경주IC 통과
14:50 양산IC 통과
15:00 양산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15:11 지하철 탑승하여 2분 후에 출발하였다.
15:32 화명역 도착
15:48 귀가.

홀로였기에 버린 시간에 대한 불만도 감당할 수 있었다.
날씨라도 좋고, 미세먼지라도 없었다면 자전거로 도전해도 될 법한 코스다.

어제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몽롱한 사태였던가...
오늘은 두 차례나 차를 잘못 타고 차표도 잃어버리고...

덕분에 포항의 위치 정보와 기차, 버스 등의 운행에 대해 조금은 도움이 된 듯하다.

 

영일냉수리신라비는 글씨가 제법 선명하게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은 상태다.

울진봉평신라비는 상당한 부지를 차지하고 안내를 하고 있는데 이 비는 아직 비각에 둔 상태 외에는 안내판이 하나 있을 정도.

관련 연구는 활발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