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글쓰기

동방 2019. 1. 22. 16:37


가스 튀김기는 배기후드가 필요해요.





전면 기름받이 2개 ,소품통 한개를 설치했습니다.이제 닭을 튀기면서 닭을 손질하거나 칼집을 넣을 때 편하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품통에는 집게나 그밖에 잊기쉬운 소품을 넣어두시면 편하실 겁니다.배기후드 환풍기는 반드시 가동하셔야 합니다. 가스 튀김기는 연소시 CO 가스가 나옵니다.불완전연소로 인한 문제지요. 튀김기 위에 간이 후드를 권해드립니다. 기름에서 나오는 유증기와 배기가스는 인체에 치명적 유해요소 입니다. 주의를 요합니다.

강릉펜션사고 기억할 겁니다. 대학생들이 죽었지요. 하루밤에 벌어진 비극의 원인이 보일러 배기가스 일산화탄소 중독사고 입니다. 치킨점은 똑같은 환경인데 인식하지 못하죠.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일겁니다. 오늘 두분이 근무하는 환경은 심각한 환경이었습니다. 건파우드를 치는 곳과 튀김기를 칸막이로 막고 배기펜은 가동되어야 합니다. 지금 환경에서는 건파우더가 날 리기 때문에 펜가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안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업무를 하다보면 소비자와 분쟁이 있기도 하고 프렌챠이즈 본사와 트러블이 생길 수 도 있지요. 그러나 현명한 지혜와 대처가 요구됩니다. 감정은 최대한 드러네지 마시고 소비자는 이해를 시켜야 하고 본사는 협조하면서 도움을 요청해주셔야 합니다. 저희 또한 본사의 협조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싱크대 배수관 수리건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부품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공구상가를 다녀와야 했습니다.부품을 구할 수 없었고 다행히 거래처에서 보내줘서 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아는 사람은 쉽지만 누가 와서 무료로 도와 주겠습니까. 항상 협조하며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고생하십시요. 다음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주십시요. 성실히 최선을 다하여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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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글쓰기

동방 2019. 1. 22. 16:23

2019년 1월 22일 화요일 150년 하버드 글쓰기 비법을 읽고

서대문을 향해 출발했다. 지금은 9시 10분 11시 약속까지 앞으로 2시간 남았다. 집에서 사무실까지승용차로 나왔다.내가 나오면 처와 두아이는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이용해 유치원으로 사무실로 나와야 한다. 일이 우선인 가장의 그림자는 주저함이 바닥에 끌리지만 일이 우선이라 야물차게 돌아섰다. 버스를 탔다. 사당역까지 시간은 물처럼 흘러 목적지에 도착했다. 평일 아침 버스는 인덕원을 지나면서 많이 내렸고 빈자리가 생겼다. 버스를 타고 내릴때 교통카드를 찍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싸다는 시내버스도 돈이 없으면 탈 수없다. 통장에 돈이 없는 현실을 상상할 수 없다. 두렵다. 경기가 나쁘다고 더 나빠진다고 매일 뉴스는 시끄럽게 떠든다. 강남의 아파트도 1억씩 빠졌다고 호들갑이다.

버스는 사당역에 도착했고 전철을 갈아탔다. 150년 하버드 글쓰기 비법 송숙희씨의 책을 펼쳤다. 이책은 글쓰기 비법으로 오레오를 떠올리게 했다. 우유에 꾹 찍어 먹는 오레오 말이다.

O 하면 opinion 의견 주제어를 정하고 R 하면 reason 이유와 근거 E는 example 예를들어 설명하고 O는 offer or opinion 제안하기로 글을 쓰는 방식이다. 내가 글쓰는 방식을 떠올려보며 생각했다. 내가 주장할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말한 이유와 근거를 찾아 설명하고 신문이나 인터넷을 찾아 참고가 될만한 기사나 책내용을 가져와서 설명하고 다시 내 주장을 했을때 글은 서론 본론 결론처럼 깔끔하게 마무리 된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서평을 이런식으로 한번 도전하면 좋을 것 같다. 서민적글쓰기를 읽고 서평을 오레오 규칙으로 한번 도전해 봐야 할 것 같다.

서대문역앞 약속은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즐겁고 유쾌한 시간은 흘러갔다. 일정을 마치고 서대문역에서광화문까지 걸어갔다. 서울 도심을 차없이 걸어보았다. 중간에 중국집에서 짜장면도 먹었다. 오랜만에 교보문고도 들렸다. 함께한 외식경영 이사님과 요즘 읽는 책에 대해서,책 편집에 관한이야기,독서모임에 대한 이야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이제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서민적글쓰기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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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동방 2018. 12. 31. 10:42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위험한 땅 -셋째날
(대마도 여행기)

[셋째 날- 만제키 바시를 돌아 집으로]

  일요일 아침이다. 오늘은 이즈하라에서 히카타즈까지 가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볼 예정이다. 약 85킬로 정도의 거리였다. 기상은 6시, 일본식 식사는 검소한 색깔을 담았다. 그 속에 가을 맛이 담겼다. 상준이 아름이는 잘 먹었다. 7시 30분 출발 장소로 이동했다. 하치만궁은 출발 장소 앞에 있었다. 산보하듯 가볍게 휙 둘러보았다. 넓은 광장에 최익현 선생님이 보이는 듯했다. 또 언제 올지 몰라 선생님께 마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대마도는 현재 3만 천명이 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2만 명 정도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 차이는 별로 없다. 한국 관공객이 주말에는 4천 명 정도 들어온다고 했다. 중국인, 일본 본토인, 미국인도 없이 오직 한국 사람만 관광을 오는 유일한 곳이다. 대마도는 리아스식 해안을 잘 활용하고 있다. 길을 달리다 보면 깊이 돌아 들어가는 곳은 해안이다. 해안을 중심으로 주택들이 들어서고 안쪽에는 배들이 장난감처럼 정박해 있다.주유소는 해안을 따라 있었다. 배에 필요한 선박유를 공급했고 자동차에도 주유를 했다. 마을은 비좁은 듯하면서 알찼다. 도로는 상하행 1차선이고 차선이 없는 곳이 많았다. 차들은 아슬하게 비껴갔다. 호흡을 멈추어야 할 것 같은 길도 버스는 다녔다. 대형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건 한국 관광객들 때문이라 했다. 80% 이상이 노란색 경차를 탔다. 최근 들어 랜트카를 이용하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교통사고도 늘어났다고 걱정했다.일본은 본토에서도 그렇듯이 가까운 곳은 자전거를 탔다. 좀 먼 거리는 오토바이를 좀 더 먼 거리는 경차를 탔다. 그리고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교통수단 배가 있다.

  차는 히타카츠로 달렸다. 산길을 달렸고 해안길을 달렸고 마을을 달렸다. 길은 좁았고 길었다. 한국에 가까이 가려는 듯 북쪽으로 차는 위로 위로 달려갔다. 해안에는 방호벽이 있었고 배가 안전하게 접안되었다. 마을은 새 둥지 마냥 포근했다. 가을 했빛에 바다는 파랗게 빛났고 고요하게 파도쳤다.

  산에는 푸른 나무로 가득했다.주로 값비싼 삼나무와 편백나무들이 많았다. 일본 인구 1억 3천만명이 100년동안 나무만 팔아서 살 수 있을 정도로 나무가 많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필요한 목재는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대마도는 나무가 잘 자라는 땅이 아니라 주로 인공림이라 했다. 누군가의 손길로 키워진 나무는 세월을 견디며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산에 나무가 있으면 진도 6 지진을 능히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나무뿌리가 훍을 단단히 잡고 있어 흩어짐을 잡아 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연을 지키면 자연은 다시 사람을 지켜준다. 그래도 가파른 언덕이나 벼랑은 시멘트로 무너짐을 방지하고 있었다. 자연이 지키고 한편으론 사람이 지키는 방제 시스템은 안전해 보였다. 왕복 차선이 사라진 도로 바닥에는 하얀색 화살표가 양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주의해야 함을 알았다. 해안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한적했다. 해안에 정박한 배는 편안했다. 가을 햇빛을 받아 더욱 푸른 바다와 마을은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였다. 터널을 지났다, 제일 긴 터널이 몇 미터나 될까 궁금했다. 산길에서 만난 집들은 단층집에 목조주택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현대식 집도 자연과 어울렸다. 모나지 않았고 힘을 쓰지 않았다. 가끔씩 일본식 납골 무덤이 보였다.좁았지만 알찼다. 자연은 훼손을 모르는 재모습 그대로였다. 산길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줄기는 길을 따라 흘렀고 길은 물 따라 만들어졌다. 굽이 굽이 흐르는 물은 나무에게 생명수였고 삼나무, 편백나무는 잘 자랐다. 한그루에 3,0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름드리 나무는 내 몸보다 굶었다.

  차는 첫 번째 방문지 만제키바시에 도착했다. 이 다리는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걸어서 다리를 건너며 이곳에 끌려온 징용자들이 어떤 일을 했을지 어떤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지 다리에서 바라본 강은 두렵기만 했다. 해협을 연결한 다리는 높았고 강폭은 넓었다.그 옛날 이 곳에서 있었던 쓰시마 해전이 눈에 보니는 듯 했다.많은 군함들이 이 해협을 넘어 동해로 들어왔을 것이다.다리를 지나 해협을 넘는 행렬은 그 때처럼  돌풍처럼 밀고 들어왔다가 나아갔을 것이다.

  1900년 일본 해군이 함대의 통로로 사용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해협에 다리를 세웠다. 현재는 두 부분으로 나뉜 대마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 작용하고 있다. 만조 때에는 조류가 여러 겹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국방의 최전선으로 여겨 1886년 이즈하라에  '대마 경비대를. 타케시키에 해군 요항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대립이 고조되면서 1900년에는 군함이 대한해협 쪽으로 운항할 수 있도록 만제키 운하를 뚫었다. 1905년 러일전쟁 때는 한반도 남부와 동해가 전쟁터가 됨에 따라 대마도의 오사키 등이 출진항으로 이용되었다. 메이지 일본이 대마도의 지리적 위치와 군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동안에는 아소완을 중심으로 일재에 포대가 설치되고 군항이 정비되는 등 부분적이나마 근대화의 혜택을 입었다. [대마도 역사를 따라가다, 이훈, 117~118쪽]

  쓰시마 해전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1905년 5월 27일에서 28일에 걸쳐, 일본 본토와 쓰시마 사이 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 대장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가 로제스 트벤스키 중장이 이끄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완파했다. 발틱함대가, 발트해 군항에서 극동을 향해 출항한 것은 前年 10월 15일이었다. 38척(隻)이 지구를 반 바퀴 도는 大원정이었는데, 일본의 동맹이던 영국의 지배하에 놓인 항구에는 기항(寄港) 하지 못해, 양질의 석탄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일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러시아측은, 전함 6척을 포함하여 총 21척이 격침되었고, 약 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사령관을 포함한 약 61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국가 존망을 걸고 건곤일척으로 임한 전쟁으로 일본 근대사에 있어 큰 변곡점이 된 사건이다. 이 전쟁의 주역은, 해군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7~1934)이며, 육군에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다. 육군의 노기(乃木) 장군은, 여순 요새 공략, 봉천 전투 등 결정적 중요한 승부처에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역전시켜 승리를 이끌어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세계적 명장으로 떠올랐고, 일본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며 열강 반열에 확실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다움백과 참조)

  미국 해군 사관학교 임관 후보생들이 일본을 방문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순신 장군이라 답했다.또한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 당시 한 신문기자가 "각하의 업적은 영국 넬슨제독과 조선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합니다." 고 하자 이말을 들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나를 전쟁의 신인 이순신 제독과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쓰시마 해전에서 사용한 장자진 전술은 이순신 장군의 학익전 전술과 흡사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철저히 분석하고 러일 전쟁시 무적 발틱 함대를 상대로 한 쓰시마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해군인 도고 제독 뿐만 아니라 육군인 노기 장군도 임진왜란의 실패를 완벽히 복기했다. 

  러일 전쟁이 발발한 후 2주째인 1904년 2월 23일 승전국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압적으로 체결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일본이 한국 황실의 안전과 한국 영토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한국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거나 내란 등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때 일본 정부는 한국 내의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한제국은 러일 전쟁 후 손 벌릴 열강은 없었다. 일본은 침탈했고 우리는 철저히 유린당했다.

  두 번째 방문지는 와타즈미 신사였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지닌 곳 와타즈미 신사는 대마도에 있는 유일한 용왕 신사이다. 아소만 입구에 있는 해궁으로 '바다의 용'을 뜻한다. 와타즈미 신화를 살펴보면 니니기의 아들이 땅에 내려왔는데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형의 낚싯바늘을 떨어뜨렸다. 낚시 바늘을 찾는 과정에서 용왕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 결혼을 했고 3년 후에 임신을 했다. 동생은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이 생각나서 용왕의 도움으로 바늘을 찾은 후에 하늘의 형에게 돌아갔다. 만삭의 몸으로 혼자 남은 공주는 바닷속에서 아기를 혼자 낳을 수 없어서 풍랑이 심한 어느 날 출산을 위해 공주의 동생과 함께 와타즈미 신사로 왔다. 여기서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공주는 해변에 산옥을 짓고 아기를 낳는 동안 남편에게 절대 방안을 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남편은 아기 울음소리만 들리고 산모는 나오지 않아 방안을 엿보았다. 공주는 없고 뱀이 괴로워 나뒹구는 모습만 보였다. 화가 난 공주는 낳은 아기를 바다에 버리고 용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때 버려진 남자 아이가 우기야후기아에즈로 별명이 이소라 에비스이다. 남자아이는 커서 이모와 결혼하여 초대 천왕 진무 덴노(신무 천황)를 낳았다. 이 전설이 지금 일본의 황실 계보의 천신 부계와 해신 모계 혈통이며 일본의 기원 신화이다. 일본의 기원 신화에는 근친결혼이 정당화되고 신무 천황의 신무인 점을 보면 무인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국가라는 뜻을 나타낸다.

  신사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런 갯벌이 보이는데 이소라 에비스 신이 거처하는 바위 이와쿠라이다. 이와쿠라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인 갯벌에 있는 이유는 공주가 출산 후 아들을 갯벌에 놓아두고 해저 용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라 한다. 와타즈미 신사는 바다 쪽으로는 3개의 도리이가 있다. 바다 쪽 도리이는 바다 풍경과 어우러져 원근감을 자아내며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신화 속 용궁의 딸이 바다로 가기 전에 여기서 한번 서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신사에 도리이가 바다에 있는 이유는 바다의 신 용왕이 수중 도리이를 통해서 육지에 있는 도리이를 통과해 신전으로 들어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다 쪽 도리이는 신라( 혹은 김해 김수로왕)를 향해 있는데 이것은 과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해궁으로 '한반도 도래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신사에 도리이는 5개인데 인간의 5 욕 식욕, 색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라고 한다.(인터넷 카페 참조)

  세 번째 방문지는 슈시강이다. 대마도의 대표적인 단풍 명소로 유명하다. 슈시강 단풍길은 좁은 1차선 길 양쪽으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약 7km 이어져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도보로 전 지역을 구경하기 힘들며, 도로 안쪽으로 나 있는 산림 길을 걸어서 이동했다. 군데군데  경치를 보면서 사진도 찍었다. 물을 깨끗했고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곧고 바르게 하늘로 달렸다. 산악지대로 울창한 산림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길은 최소한 왕복 1차선이었고 좁았지만 굽이치며 길었다.길은 경제적으로 뚫었고 차들은 호흡이 거칠지 않았다. 걸어서 이동하는 길은 좁아도 요동치지 않았고 끊어질 듯 이어졌다.  

  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시 히타카즈항에 11시 40분에 도착했다. 아름이는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아름이와 나는 차에서 쉬고 상준이는 처와 함께 면세점 쇼핑을 갔다. 배 출항시간이 1시간 빨라지면서 히타카츠항은 대형버스로 가득했다. 차는 곳곳에서 한국 관광객을 싣고 왔고 확 토해내고는 어디론가 떠나갔다. 곳곳에 한글, 영어, 일본어 간판이 뒤섞여 있었다. 간판만 봐서는 내가 외국인인지 이곳이 외국인지 그들과 내가 다름을 구별하지 못했다.어딜 가도 한국사람이다. 일본인지 한국인지 구별되지 않았다.구별되는 곳은 물건을 파는 곳과 면세점에서 여권을 요구할 때 아! 나는 외국인임을 인식했다.

  부산에서 약 50Km 떨어진 이곳 대마도시 히타카츠가 왜 일본 땅일까? 역사를 지키지 못한 선조의 탓일까? 암울한 역사는 지금도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면, 없던 사실이 진실이 되고 2,500년이란 일본 역사의 진실이 소설처럼 쓰여졌듯이 지금도 소설같은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진실은 덮이고 둔갑된 진실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차는 다시 한국 전망대를 향해 출발했다. 양방향  일 차선 도로는 좁았다 넓었다를 반복할 뿐 2차선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산 골짜기를 힘겹게 올라가도 좁은 길을 곡예하듯 160도 회전했고 다가오는 차는 홀쭉이와 뚱뚱이가 배 사이를 통과하듯 아슬아슬 비켜갔다. 한국전망대는 모든 자재를 한국에서 가져와 팔각정을 지었다. 맑은 날은 한국이 보인다고 했다. 오늘도 한국땅이 보였다. 팔각정 옆에는 숙종 통신사 위령비가 셰워져 있었다.

  조선국 역관 일행 순난 비는 조선 19대 숙종 29년 조선 통신사 108명이 대마도 와니우라 항 (한국전망대가 있는 항을 일본인 들은 와니우라라 부른다) 착륙 직전 갑자기 물어닥친 풍랑으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사망했다. 그 사건을 애도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 비 "를 한국이 멀리 보인다는 한국전망대 옆에 건립하였다. 나는 아이들과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멀리 부산을 바라보았다. 한국은 보였다. 그리고 가까웠다. 이국땅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
 
  차는 마지막 여행지 미우다 해변으로 달렸다. 길을 가늘었고 경사는 가팔랐고 운전은 예리했다. 바다는 적당히 넓었으며 곳곳에 바위는 섬처럼 아늑했다. 섬이라 우기는 바위도 사진 한 장에 담았다. 바위인지 섬인지 사진 한 장으로 족했다. 차는 다시 히타카츠항으로 돌아왔다. 힘겨운 여행을 마쳤다. 여객터미널 한쪽에 짐을 정리하고 가볍게 가락국수와 유부초밥을 먹었다. 출발까지 1시간 남았다. 컵밥을 연상시키는 햄버거와 라면을 먹었다. 히타카츠항은 좁았지만 좁게 걸을 만했다. 히타키츠항에서 출발은 3시 20분이었다. 배 시간은 대략 1시간 예정이다. 일기는 좋지 않았다. 1시간 전에 멀미약을 먹었다. 약은 내 몸이 견뎌내지 못하는 순간에 약효가 있기를  바랬다.

  배는 올 때보다 파도가 거칠었다. 바닷물을 가른 파도는 여지없이 배 창을 때렸다. 배는 아래 위로 거칠게 흔들었다. 순간순간 좌우의 흔들림이 미묘했고 미끄러짐이 두려웠다.배를 부딪는 파도는 묘한 흔들림으로 소멸했고 살아났다. 배는 미끄럽게 밀려났고 큰 바다의 파도는 쉽지 않았다. 파도를 넘을 때마다 요동쳤다. 밀려올 때 두려웠고 몰려 갈 때 철렁했다. 오션 플라워호는 한국과 대마도를 연결하는 최초의 여객선이고 가장 오랜 시간 대한해협을 횡단한 여객선이지만 처음 온 사람에겐 연약한 배일뿐이었다. 도착 예정 시긴은 4시 50분. 예상보다 20분 정도 늦어질 것이라 했다. 배는 심하게 울컥거렸다. 선두는 거칠게 몰아갔고 선미는 따라가기 힘에 겨웠다. 물보라는 선채를 숨겼다. 하얀 파도를 보고 나면 배는 요동쳤다. 거친 파도를 넘고 나면 바이킹 선미가 하늘 끝에서 밀려내려 오는 듯 심장이 쫄깃해졌다. 나는 바이킹이 싫다. 오늘은 더 싫었다. 배는 세월호의 악몽을 되살렸다. 시간은 흘러갔다. 멀리 오륙도가 보였다. 배는 한걸음 한걸음이 힘에 겹다. 이제 부산항 코앞까지 왔다. 나는 견뎌야 했고 배는 견고해야 했다. 배는 흔들리며 하늘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항구에 도착하는 듯 배는 속도를 줄었다. 배를 때리던 파도소리도 소멸하며 멀어져 갔다. 부산항에 도착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자료 책을 읽었다. 일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민족정기 및 역사 말살 정책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게는 조선 민족 말살 10년 계획을 수립했다.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1월까지 1년 동안 전국의 경찰을 총동원하여 고서, 고화, 기록문 등을 샅샅이 수거, 소각했다. 단군 조선 등의 고서에서부터 역사 기록 장서만 50여 종에 20여만 권을 불태웠다. 1932~1938년까지 식민주의 사관으로 저술한 여러 사서들을 간행 이병도을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이 독립 후에도 그대로 왜곡된 역사를 가르쳤다.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새로운 한반도 역사를 만들었다. 자료가 모두 소각되고 조작된 터라 지금도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날조된 한반도 역사를 국사 교과서로 배우고 있다.

  1923년 7월 조선사편수회의 촉탁 구로이타 가쓰미가 대마도주의 저택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고문서 66,469매 고기록류 문서 3576 책 고지도 34매 기타 다수의 문서도 불태웠다. 대마도가 한반도 부속 도서라는 증거를 아예 인멸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광복 이후 1950년 6월까지 무려 60여 회나 대마도 반환을 일본 정부와 일본을 관리하고 있던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그러나 6.25 남침으로 대마도 반환 소송이 물 건너갔다. 일본을 통한 유엔군과 물자 공급을 받아야 했고 일본의 협조가 필요했던 한국 정부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더 이상 거론될 수 없었다.
  
  우리는 대마도를 잃었다. 아픈가? 정말 아픈 것은 우리들의 민족의식이다. 역사는 뒤로 후퇴하고 있다. 지금도 역사 침탈, 역사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자본주의로 한국의 약한 부분을 공략하고 있다. 친일파는 지금도 일본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냉정해지고 예민해야 한다. 이 땅을 수호할 사람은 이 땅 백성들 뿐이다. 정치인들은 자기들 잇속체우기 바쁘다. 앞에서 거론한 국가수호를 위한 320인 지식인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지켜보라 그들의 이익, 당의 이익만을 위해 힘 쓸 뿐이다. 기자들은 진실을 보도할 수 있어야 한다. 어찌 그게 쉽겠는가? 삶이란 흔들리는 배와 같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 서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두렵다. 이 땅의 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겹다.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의 칼럼 일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만든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공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왔다. 연간 200억 원이 넘는 국민들의 혈세로 우리 역사를 복원하고 지키는 일에 쓰지 않고, 오히려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국지점의 역할을 하며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반역을 일삼아왔으니 중국정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을 일이다.
 
또한 2008부터 2015년까지 60여명의 학자들에게 국고 47억 원을 주고 ‘동북아역사지도’를 만들도록 했다. 이 지도는 중국의 ‘중국역사지도집’을 그대로 표절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매국식민사학 그 자체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국고 47억 원도 모자라 30억 원을 더 타내려다가 국회 동북아역사특위에서 제동이 걸려 다음과 같은 지도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 지도의 내용은 조선총독부의 지침을 받은 이병도의 식민사학 그대로였다. 한사군과 위나라 군현을 한반도 북부에 그림으로서 그 땅을 중국에게 넘겨주었고, 삼국지 조조가 경기도 북부까지 지배했으며(이병도의 수안 갈석산설에 기인),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한다는 조선총독부의 지침대로 2~4세기 고구려 지도에 백제·신라·가야를 그려 넣지 않고 삼한으로 표시하는 등 그야말로 어불성설의 매국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2012년 미국 상원의회 외교위원회는 북한에서 급변사태 발생 시 중국이 물리적 개입에 나설 근거 여부를 판단하고자 의회조사국에게 보고서를 만들게 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한국에 의견을 물었는데 중국한반도북부가 고대 중국의 영토였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미국은 한국이 중국과 다른 의견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외교부 고위관리 등은 워싱턴으로 비밀리에 찾아가 중국의 보고서가 옳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지난해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고 말했을 때 동북아역사재단은 물론 식민사학계는 아무런 논평도 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국의 역사이론이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본국의 영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데 감히 한국지부에서 할 말이 있었을까.또한 동북아역사재단에는 일본의 독도침탈에 적극 대응하라는 임무를 받아 독도연구실이 설치돼있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지도에는 일관되게 독도가 빠져있는 데다가, 독도연구실장은 자신이 쓴 책에 차마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쓰지 못하고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조선총독부와 식민사학자들이 조선인의 영혼을 말살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 즉 ‘of the Japan, by the Japan, and for the Japan’이었던 식민사학의 역사가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교육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아마 일제 식민지배의 향수를 그리워하며 마치 ‘Again 1910’을 기다리는 것 같아 보인다.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이 땅에 뿌려놓은 독버섯의 씨앗이 70년 넘게 무성하게 자라나 이제는 그 패악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일본을 위해 우리의 영혼인 역사를 말살한 이병도의 죄악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완용이 팔아먹은 나라는 35년 만에 되찾을 수 있었지만, 이병도가 말살시킨 민족혼은 아직도 일제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의 2018년 8월 4일자 스카이데일리의 칼럼 내용중 일부]

참고자료는 인터넷에서 많이 참고했다. 일일이 색인을 달기가 힘들 정도로 다양한 책에서 읽고 생각하고 정리했다. 모두 출처를 기록하지 못했다.기록된 역사는 진실을 담고 있다.그러나 모두 다 진실은 아니다. 뼈대위에 속살을 입히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나는 어느날 기성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내 아이들은 기성세대가 될 것이다. 좀 더 일찍 역사의 진실 앞에 서서 바른 역사관을 갖기를 소원해 본다.대마도의 앞바다는 지금도 내 마음을 핥고 있다.아프다. 가슴이 저리도록 아프다.

참고도서 :[ 조선의 거짓말 대마도, 그 진실은 무엇인가] - 서동인 지음,이오봉 사진,[대마도 역사를 따라가다, 이훈, 117~118쪽],[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 박성수 지음], 다움 백과 ,인터넷 카페,일본 대마도 팜프렛, 하나 여행사 관광 안내 자료, 관광 가이드 윤계형의 설명 등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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