휫필드 8 - 캠버슬랑의 부흥 / 송삼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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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2016. 7. 23.


캠버슬랑의 부흥 

 

24.고통의 순간들


뉴잉글랜드에서 휫필드가 이룬 업적들은 그의 나이에 견주어볼 때 참으로 괄목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는 불과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베데스다 고아원 건축, 흑인들의 교육을 위한 나사렛 건물 시공, 뉴잉글랜드 전역을 휩쓴 대각성운동 등을 주도하였으니,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길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와 같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직후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1)청중을 잃어버림

휫필드가 막 런던에 도착했을 때 수천 명의 청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위해 무어필즈와 케닝톤 컴먼의 야외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뜨거웠던 청중의 열기는 얼마되지 않아 시들었고, 그 첫 주간에는 겨우 이삼백 명의 청중들만 모여서 그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휫필드의 곁을 떠난 청중들은 대부분 그가 없는 사이에 웨슬리를 통하여 휫필드가 이단적인 내용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접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야외집회장을 빠져나가면서 손가락으로 귀를 막기도 했다. 설교 중에 그 광경을 목격한 휫필드는 고통스러운 마음을 억제하면서 설교를 마쳤는데, 몇몇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듣고 더욱 괴로워했다. 그것은 웨슬리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설교가 이단적인 교리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듣지 못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였다.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휫필드가 쓴 편지의 내용을 직접 들어보자.

“1741년 3월 25일 런던. 나에게는 시련의 때이다…내가 마지막으로 영국을 떠날 때 자기 눈이라도 빼어서 나에게 주려고 했던 많은 나의 영적 자녀들이, 그들이 존경하는 선생님들 때문에 깊은 편견을 갖게 되였다. 웨슬리(Wes1ey)가 선택의 교리에 그처럼 끔찍한 색깔을 입혀 놓은 바람에 그들은 나를 보려고도, 내 설교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나를 조금도 도와주려 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곧 나를 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협박 편지를 보내는 자들도 있다.”1

그렇게 뜨겁게 타올랐던 청중의 열기가 식어버리고, 열광과 환호를 보냈던 청중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휫필드의 복음시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휫필드는 자신의 집회를 통해서 뉴잉글랜드의 베데스다 고아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이제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더없는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설교집을 출판함으로써 어느 정도 수익을 얻으려는 계획까지 두 출판업자가 모라비아교로 개종하는 바람에 무산되는 아를을 겪었으니, 휫필드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2)웨슬리 형제의 적대적인 태도들

휫필드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몰려들던 수많은 청중들을 잃어버렀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를 잃어버린 듯한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아픔을 준 것은 웨슬리 형제의 적대적인 태도였다. 웨슬리는 교리적인 문제로 휫필드와 결별한 후 계속해서 예정론을 반박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휫필드의 신학사상에 치명타를 가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웨슬리 형제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많았다.

“…사랑하는 옛 친구들인 요한과 찰스 웨슬리를 나는 아직도 내 영혼처럼 사랑한다.2 우리가 여러 면에서 다를지라도 나의 마음은 웨슬리 씨와 깊이 연합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만들어주시기를 기원한다.”3

이와 같이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에 대한 우정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왔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웨슬리의 가르침을 따라 상당 부분 자신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말 때문에 내가 느꼈던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요나가 니느웨에 갈 때 가졌던 거부감도 내가 그대를 반박하는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쥐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거부감보다 더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내가 하나님께 충실한 자라면, 그리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한다면…더 이상 어정쩡하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소…나는 내 육신을 좇는 사람이 아니요, 사람들의 평가에 구애받는 사람도 아니요. 다만 나의 주님이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나의 의무에만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오.”4

휫필드를 반박하면서 웨슬리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에 의해서 그일을 행하고 있다는 뜻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라는 설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여기 개진하고 있는 사실은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일 뿐 아니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진리를 온세상에 선포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 외에 어떠한 의도도 없다….”5

하지만 웨슬리가 ‘어쩔 수 없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예정론을 반박하는 설교를 출판하게 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 휫필드는 웨슬리의 정곡을 찔렀다. 휫필드는 웨슬 리가 제비뽑기에 의해서 정해진 메시지(“설교하고 출판하라”)에 의해 예정론을 반박하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교리에 관련된 문제를 제비뽑기로 결정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것을 지적하면서, 결국 웨슬 리가 주장한 ‘어쩔 수 없는 의무’란 제비뽑기의 결과였다고 반박했다.


웨슬리는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재산권 문제에 있어서도 휫필드에게 고통을 주었다. 원래 브리스틀에 있는 ‘뉴룸’(New Room)과 킹스우드에 있는 ‘스쿨하우스’(School House)는 휫필드와 그의 동역자 슈어드가 모금해서 지은 건물이었다. 그런데 웨슬리는 이 건물들을 이미 자기 소유로 삼고 있으면서 자신은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고 오히려 그 모든 문제의 발단은 휫필드에게 있는 것으로 항의했다.6 웨슬리의 이러한 거짓된 태도에 대해서 휫필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분개하면서 재산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측근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친밀함과 우정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잘못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비록 어떤 사항에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주예수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다…그들을 납득시킬 가능성이 없을 때에는 논쟁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뿐이다.”7

하지만 휫필드가 당한 정신적 고통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휫필드는 그에게 부딪혀온 거룩한 고통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내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십여년 후에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로부터 당했던 고통스러운 일들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가장 가까왔던 귀한 친구들에게 밀려나고, 경멸당하고, 비난받고, 비방당하고, 비판받은 후, 결국 그들로부터 결별까지 당한 것이 나에게는 유익입니다. 그로 인해 나는 친구 중의 친구이신 그분의 신실하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그분이…이제…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정직한 의도를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합니다.”8

3)동역자의 죽음

그 무렵 휫필드에게 큰 슬픔을 안겨 준 또 하나의 사건은 그의 동역자 월리엄 슈어드의 죽음이었다. 슈어드는 처음에 웨일즈의 야외집회에서 폭도들에 의해서 크게 다친 바 있었는데, 나중에 또 다른 집회에서 돌팔매질을 당하였다. 그는 그후 연약한 몸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휫필드는 동역자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길 들도 없이 전혀 예상치 않았던 두 가지의 문제에 봉착함으로써 더욱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하나는 슈어드가 죽기 전에 고아원 명의로 진 빚(350파운드)을 휫필드가 대신 떠맡게 된 것이다. 그때 채권자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휫필드의 활동을 완전히 봉쇄하려고 위협하면서 빚 독촉을 해왔다. 또 하나는 휫필드는 슈어드와 함께 고아원 운영의 공동책임자였는데, 이제는 휫필드가 그 모든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무거운 짐이었다.


한동안 휫필드의 생애 가운데 드리워진 어두움의 그림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자취를 감추어가기 시작했다. 한때 잃었던 청중들은 다시 휫필드에게 모여들기 시작했고, 영국에 돌아온 지 네 달 반쯤 지났을 때 그의 사역은 전과 같은 상태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25.스코틀랜드에 타오른 영적인 불길

휫필드의 사역이 활기를 되찾으면서 스코들랜드로부터 방문 요청이 쇄도했다. 스코틀랜드에서 휫필드를 초청한 대표적인 몇몇 사람들은 유명한 장로교 목사였던 랄프 어스킨(Ralph Erskine)과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e)형제, 그리고 국교회의 영적인 쇠퇴를 개탄하면서 부흥을 사모하는 일단의 복음주의자들이었다. 11년 7월 29일 에딘버러(Erdinburgh)에 도착한 휫필드는 이들의 영접을 받아 곧바로 그곳에서 설교했다. 당시에 스코틀랜드의 영적인 분위기는 이미 에벤에셀 어스킨 목사와 같은 탁월한 설교자들에 의해서 몇만 명씩 모이는 야외집회가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로 영적인 뜨거움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휫필드가 던펌라인(Dunfermline)에서 설교할 때 청중들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존 케닉(John Cennick)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제 나는 던펌라인으로 갔는데, 랄프 어스킨 씨는 그곳에 큰집회소를 갖고 있었다. 그분은 나를 아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나는 밀물처럼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했다…기도를 하고 설교 본문을 말해주자 일제히 바스락거리며 성경을 찾는 소리가 나를 아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광경이었다.”9


원래 랄프 어스킨 목사는 에벤에셀 어스킨 목사와 뜻을 같이 한 여덟 명의 목사들과 연합장로회 (The Asociate Presbytery)를 결성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국교회의 느슨한 교리와 냉냉한 영적 분위기를 반대하면서 국교회의 관리들을 논박함으로써 목사직을 정지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늘 활기있게 영적 운동을 일으켜나가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였다.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랄프 어스킨 목사는 명성이 있는 휫필드를 연합장로교에 끌여들이려는 구상을 가지고 그를 초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연합장로교파를 조직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연합장로교 측에서 앞으로 휫필드가 자신들의 편에서만 설교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교파이든지 오직 복음만을 전하려는 생각을 가진 휫필드는 그들의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저는 이 일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임시 설교자로서 어떤 교파에 속한 사람이든 기꺼이 설교에 귀기울이고자하는 모든 사람에게 단순한 복음을 설교하러 갈뿐입니다. 교회 정치에 관한 어떤 개혁 작업에 합류한다는 것은 제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 것입니다….”10

이로써 휫필드는 연합장로회와 결별했고, 그 후에는 국교회의 복음주의파와 협력해서 사역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근본적인 입장은 모든 교파를 초월한 복음사역을 지지 했다. 그는 에딘버러에서 3주 동안 머물면서 계속집회를 인도했는데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 중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귀족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처럼 각계각층에 복음의 불길이 번져가고 있었지만, 적대세력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 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였다. 특히 성직자들의 적대적인 태도가 두드러졌고, 일반 신자나 심지어 신자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휫필드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들은 휫필드가 고아원을 위해 모금한 돈을 개인이 착복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휫필드를 공격했다. 그러한 공격에 대해서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경제생활에 대한 자신의 좌우명을 밝힌 바 있다.

“월리슨 씨는 내가 사사로이 착복하는 돈이 있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런 일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갑 같은 것이 없다. 내가 가진 것을 나는 모두 주어버린다. 값없이 받은 것을 나는 값없이 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라는 말씀이 늘 나의 좌우명이 될 것이다.”11

휫필드는 에딘버러의 집회를 마친 후 곧바로 스코틀랜드 전역을 돌면서 설교함으로써 영적인 불길을 지피웠다. 휫필드가 약3개월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결과는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이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어 기도와 찬양을 그치지 않았고, 도시들마다 신앙이 부흥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는 모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휫필드가 스코틀랜드를 떠나온 후에 어떤 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이 도시에 신앙이 부흥하여 꽃피고 있습니다…함께 모여 기도하고 영적인 일에 관해 논의하기 위한 모임들이 모든 곳에서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종전에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둘러앉아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이야기나 했지만 이제 신앙에 관한 대화들이 그런 이야기를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주님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12

휫필드는 스코틀랜드에 영적인 불을 지피워 놓고 웨일즈로 가서 자신보다 열 살 많은 엘리자벳 제임스(Elizabe James)라는 과부와 결혼하였다. 그 후 휫필드 부부는 3년 뒤에 아들을 낳아 자신과 같은 설교자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는데, 그들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런던에서 추운 겨울을 지낼 돈이 없었던 그들은 웨일즈에 있는 부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서 웨일즈로 옮겨가는 도중 글로스터에 며칠 머무르는 동안 아이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설교하고 돌아온 휫필드는 죽은 아기의 장례까지 부인한테 맡기고 다른 설교계획 때문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집을 나섰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가 끝나자마자 장례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처음에…본성에 의해서 나는 그 소리에 동요를 느꼈으나 위를 쳐다보면서 다시 힘을 얻었다…우리와 아기와의 헤어짐은 엄숙한 것이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많은 눈물을 흘렸다…내가 태어난 집에서 세상을 떠난 아기는 내가 세례를 받고 처음으로 성찬을 받고 처음으로 설교를 했던 교회로 옮겨졌다…나는 열왕기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다…”13

26.캠버슬랑의 부흥14


휫필드는 1742년 6월 3일에 스코틀랜드를 두번째 방문했다. 그는 이 기간 중에 글라스고우(Glasgow) 근처에 있는 두 교구 곧 킬싯(Kilsyth)과 캠버슬랑(Cambuslang)에서 활동했는데, 거기에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교구들은 얼마 전부터 영적인 침체상태 가운데 있었으나, 휫필드가 처음으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을 때 글라스고우에서 한 주간 동안 설교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 후에 부흥의 불길은 캠버슬랑의 조그마한 성경공부 모임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윌리암 맥컬록(William McCulloch)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 무렵 성경공부를 마친 후에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이 삼백여 명을 넘어섰다고 했으니 캠버슬랑 부흥의 불길은 이미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킬싯의 로브(Robe)는 12년 5월 12일 주일날 일어났던 영적 부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설교 말씀에 성령의 특별한 능력이 함께 했고, 회중들은 크게 애통해 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었으며, 그 우는 사람들 중에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강하고 담대한 남자들도 있었다…우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나는 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 모을 수밖에 없었다…”15

이러한 영적인 분위기가 지속되어 오던 중에 휫필드가 캠버슬랑에 도착하자 부흥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휫필드는 첫날 하루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 연구에 세 차례나 설교하면서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런 소동, 특히 밤 열한시의 그런 소동은 이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약 한 시간 반 동안 예배가 진행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또 어떤 사람들은 깊은 영적인 슬픔에 빠져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했다…맥컬록 씨는 내가 설교를 마친 후 새벽 한 시가 지날 때까지 설교했으나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데도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 들판에서는 밤새도록 기도와 찬양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16

그다음 주일에는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했고, 토요일에는 온종일 예배가 진행될 정도였다. 휫필드는 당시의 상황을 존 케닉(John Cennick)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식일 날 그곳의 인파는 이만명 이상 되었던 것이 틀림없소…내가 만찬상에서 떡을 떼어주기 시작하자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와 그 일을 중지하고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동안 다른 목사들이 다른 성찬상에서 떼어주었소. 목사들이 한사람씩 하루 종일 설교했고, 저녁 때 성찬이 끝난 후에는 목사들의 요청에 따라 내가 온 회중에게 설교했소.17


월요일 아침에 다시 내가 설교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감동에 빠지는 광경은 전에 결코 본적이 없소. 당신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창에 찔린 구세주를 애도하며 눈물로 온 몸을 적신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오…오후에 다시 청중들은 엄청나게 모여들었고, 이전처럼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드려졌소 ….”18

휫필드는 캠버슬랑의 집회를 마치고 한달 동안 다른 지역에서 계속 설교한 후에 다시 캠버슬랑으로 와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 때는 약 삼만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캠버슬랑에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자, 경험이 많은 목회자들은 그러한 현상들이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된 것인지 아니면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인지에 대해서 조사단을 파견하여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그 결과에 대해서 존 월리슨(John Williso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캠버슬랑의 부흥 운동은 강한 성령의 역사인 것을 입증했다.

“나는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년 등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들에게서 광신적인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나는 캠버슬랑에서 일어난 일이 성령의 독특하고도 놀랍게 부어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된다.”19

캠버슬랑의 부흥은 분명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너무나 오랫동안 운 나머지 의식을 잃을 정도까지 되기도 했고, 극도의 감격을 체험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영적인 황홀경을 경험한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캠버슬랑 부흥 운등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주로 ‘엄숙한 사건의 영적인 영광’,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즐거움’, ‘모든 사람의 표정에 나타난 깊은 경건’20 등으로 평가하면서 그 사건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임을 강조했다.


이처럼 캠버슬랑의 부흥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이 눈에 띨 정도로 확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를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연합장로회측 사람들은 거룩한 역사에 흠집을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그들은 휫필드를 반대하는 여러 종류의 팜플렛21을 발행하여 순식간에 배포하고 말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휫필드를 실랄하게 공격했다.

“그는 우상숭배교인 영국 국교회의 일원인 추잡한 우상숭배자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앞잡이이며, 수퇘지이며 야수이다…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많은 돈을 모아서 자신의 탐욕스러운 주머니속에 넣고 말았다…”22


사실 이와 같은 중상모략은 휫필드가 일전에 연합장로교와 손을 잡자는 그들의 제안에 거절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어떠한 대꾸도 없이 묵묵히 참아냈으나, 한 편지에서 연합장로교회를 주도한 어스킨 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배신감을 표현한 바 있다

“사랑하는 어스킨 형제는 나에게 검은 색옷을 입혀놓고 말았소…불쌍한 사람들….”23

휫필드는 복음사역을 펼쳐나가는 동안 언제나 반대자들의 공격과 비난, 그리고 중상모략을 받았다. 그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휫필드는 오직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복음을 위해 일할 뿐 모든 수난을 기쁨으로 이겨냈다. 휫필드가 그러한 수모를 겪으면서도 오직 복음사역에 전력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언급했는데, 당대 사람스코틀랜드의 존 윌리슨(John Willison)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젊은이를 특별한 사역을 위해서 키우신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는 몸과 마음이 놀라울 정도로 알맞게 구비되어 있어 자신의 모든 계획을 끝까지 완수해내며 크게 낙담되는 일이나 난관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수많은 갈채 속에서도 그렇게 겸손하고, 비방과 모욕 앞에서 그처럼 온유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원수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말없이 따르면서도 결코 조급하지 않고 모든 일에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사람을 만나기란 정말 드문일이다.


강단에 설 때는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불타오르지만 강단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지극히 평온하고 침착한 사람을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도 드문 일이다…이 귀한 청년은 복음전도자로 일하는데 유례없이 적합한 청년이다.”24


주(註)

1. Amold A.Dallimore,1970(reprinted 1995),Volume 2,p. 46
2. Ibid.,p. 44
3. Ibid.
4. Ibid.,p.552.
5. 이것은 웨슬리의 작품들 어느 판에나 실려 있는 그의 설교 ‘값 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의 서문이다. cited by Ibid.,p.56.
6. 웨슬 리가 휫필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Ibid.,p.71-73을 보라.
7. Ibid.,pp.76-77.
8. Ibid.,p.77.
9. Ibid.,pp.86-87.
10. Ibid.,p.86.
11. Ibid.,p.96.
12. Amold A.Dallimore, 1990,pp.115-116.
13. Amold A.Dallimore, 1970(reprinted 1995), Volume 2, p.168.
14. 캠버슬랑의 부흥에 관해서 상세히 다룬 책으로서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Arthur Fawcett, The Cambuslang Revival The Scottish Evangelical Revival of the eighteen century, London:The Banner o fTruth Trust, 1971
15. Ibid.,pp.122-123.
16. Ibid.,p.125.
17. 그날 저적 휫필드는 종종 개종자들에게 설교했던 본문 이사야 54:5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Arthur Fawcett, op.cit, p.116.
18. Ibid.,p.126.
19. Amo1d A.Da11imore, 1990, p.127,136.
20. Ibid., pp.131-132.
21. 연합장로회측 사람들이 배포한 팜플렛의 제목들은 ‘반 교황주의, 반 루터주의, 반 감독제, 반 휫필드주의, 반 에라스무스주의, 반 분파주의를 위해 고난받는 남은 자들인 스코틀랜드 참 그리스도의 장로교회의 선언, 항의, 증거’ 등이었다.
22. Lake Tyeman, Volume II.1890,p.11.
23. Amo1d A.Da11imore,1970(reprinted 1995),Vo1ume 2,p. 132.
24. Ibid.,p.9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