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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없는 성경? (말씀을 봐도 의미가 없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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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필독) *

2021. 1. 26.

성령이 없는 성경? (말씀을 봐도 의미가 없는 경우..)

 

 

 

성경은 성령 하나님이 저자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모든 시대와 상황과 환경을 관통하는 

계시를 말씀 안에 넣어두셨기 때문에, 

그 안에 중첩되는 다른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안에 

여러 중의적 의미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중의적 의미란,

개인적 차원에서는 

같은 구절을 여러번 읽을 때마다

항상 다른 의미로 조명되는 

레마의 말씀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감춰져 있는 시대적 섭리 또한

한 구절 또는 한 단락안에서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차원을 뛰어넘어서 

모든 차원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살아있는 말씀이기 떄문에..

 

저자이신 성령의 인도함 속에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인간이 쓴 다른 모든 책들은

그냥 작가가 의도한 

그 한가지 의미만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독자들이 멋대로 해석한 경우 말고..)

 

허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살아있는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안에서 말씀을 대하게 되면

읽을 때마다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도 있고..

 

특히 하나님이 감춰두신 

시대적 섭리의 경우..

한 구절이나 한 단락, 또는 같은 상황안에 

하나님이 뜻하신 두 가지 이상의 

섭리의 비밀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마태복음 24장 3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여기서 인자의 임함은

살전 5장 1절에 나오는 '주의 날'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강림하시는 그 때가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면서

마음껏 누리고 즐기는 생활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주님이 강림하시는 때가

"환란 중이나 환란 끝"이라는 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환란의 때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심판의 때입니다.

 

물론 후3년반이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부어지는 때이지만..

 

환란 전반기 역시 

일상적인 삶을 사는 그런 때가 아닌 

말 그대로 환란의 때입니다.

 

당장 계시록 6장에 나오는

일곱 인의 심판만 살펴 보더라도

전 3년반 환란 역시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해 보이지 않는 진노의 때입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 6:12-17)

 

즉 환란의 때에는

이렇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누릴 수 있는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노아의 때에는 홍수가 나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적 차원의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즉 육적으로 아직 환란이 오지 않은 

평안하고 안락한 때였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오히려

영적 타락은 그만큼 비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살전 5장 3절에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는 주체는 바로..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들, 

즉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 

이땅 모든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의 

평안함과 안전함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삶 전반에서의 평안함과 안전함을 의미합니다.

 

마 24장에서 말씀하는 이 노아의 때가 바로..

살전 5장 3절에서 말씀하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그 때이고..

 

이는 다시 말해

환란이 끝나고 주님이 지상재림하시기 전,

먼저 주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날은

환란이 임하기 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노아의 때라는 특정 시점만 놓고 보면

환란 전의 시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같은 노아의 때지만..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녹부터 노아의 때까지를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본다면..

 

에녹은 환란 전 휴거자를 예표하고

노아는 환란 중 휴거자를 예표합니다.

 

즉 마태복음에서 말씀하는 노아의 때는

환란 전 마지막 때의 시대상을 의미하고 있지만..

 

창세기의 에녹부터 노아까지의 타임라인에서

노아의 때는 환란에 들어간 때를 의미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영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래서 성경은 단순히 해석적 관점으로 보는게 아니라

성령안에서 그분의 조명해 주시는대로 보게 된다면

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깊히 탐구하려는 분들은 많은데

직접적으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 말씀을 대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는게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최근 들어 성경 번역본을 가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메세지를 전하면서 인용하는 성경 번역본이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있으니

개역개정이나 개역한글이 아닌

킹제임스 버젼으로 메세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구체적으로

킹제임스 버젼엔 이러이렇게 표현되어 있으니

이렇게 해석하는게 맞다고 하시며 

인용하신 그 번역은 잘못 번역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하셨습니다. 

 

실제로 보면

킹제임스 버젼이 다른 번역본에 비해 

단어나 문맥, 시제 등의 표현이 

원문에 가깝게 번역되어진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번역본을 읽을 때

더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있어서

개역개정이든 개역한글이든 표준새번역이든

그렇게 번역할 때의 그 작업들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진행되어진 일들일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번역본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걸까요?

 

한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은 "사실적" 관점이 아니라 

"진리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다릅니다.

 

일례로, 

환란 전 휴거를 주장하시던 

어떤 분이 댓글로.. 

 

고린도전서가 요한계시록보다

시기적으로 더 먼저 쓰여졌기 때문에.. 

 

고전 15:51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나팔'을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마지막 일곱번째 나팔로 해석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이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적 관점으로 보게 되면

당연히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이 맞습니다.

 

하지만 진리적 관점으로 보면..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은..

성령님께서 계시해 주셔서

훗날 일어날 일의 예언의 말씀으로

기록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저자에게 역사하셔서

그 구절을 쓰게 하실 때는..

 

바울(사람)이 의도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고자 하시는대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시기적으로 

늦게 쓰여졌든 먼저 쓰여졌든간에..

 

그 말씀안에 하나님이 뜻하고자 하시는 

의미가 그대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사실적' 관점으로만 보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시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똑같은 단어에 대한 시제가 

다르게 표현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로마서 8:24)

 

로마서 8장 24절에선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말씀하고.. 

 

고후 1장 6절에선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향한 구절임에도

구원받는 부분에 대한 시제가 다 다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었다"라고 하니

한번 구원 받았으면 그걸로 끝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구원 받게 하려 한다"고 하니

구원은 과정을 거쳐 훗날 완성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 성경말씀들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본질적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데..

 

한 구절에 나오는 

시제나 순서적인 부분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 말씀안에 내포하는 문맥적 흐름과 의미를

한 문단 또는 장 전체를 통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특정 구절에 대해 어떤 번역본이 

원문에 가깝게 번역되어졌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드시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통한

인도함을 받으며 '진리적' 관점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진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은 제껴버린 채

말 그대로 해석을 위한 해석만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철저한 사실적 관점에 근거한

인본적 기준의 해석과 풀이만 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비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람이

개역한글이든 개역개정이든 말씀을 대할 때 

그 사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설사 단어나 시제 등에서 

완벽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더라도 그런 것들이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 관계를 

방해하거나 끊게 만드는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이들에게

그런 부분들은 아주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부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뭔가 사실적 관점에서 오류가 있더라도

해당구절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선

반드시 조명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면 얼마든 

일반적으로 유통되어 있는 번역본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하시는 역할은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지.. 

(요 16:13)

 

오류없이 정확한 구절을 많이 익혀서 

지식이 쌓이도록 인도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범위엔 제한이 없습니다.

 

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 범위가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당신의 공의의 속성에 의해 

그 자체가 악으로 통용되는 수단(공간)은

결코 선한 매개체로 사용하진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클럽에서 술을 잔뜩 먹고 

광란의 파티가 열리는 곳에

절대 성령이 임하지 않고..

 

또 하나님, 예수님을 감히 입술로 언급하지만

ㅅㅊㅈ같은 이단들이 벌이는 집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대놓고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성경 전반을

곡해하고 변개시킨 번역본이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겐..

애초부터 그런 번역본을 접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일한 전제조건은 

어떤 번역본을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겸비함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느냐입니다.

 

이런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엔 성령께서 

좀 더 정확한 표현이 기재된 

다른 번역본을 통해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도록 인도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엔

말씀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부어주셔서 

주석 찾고 히브리어 원문 찾고 하면서

노력하게끔 인도하셔서 

당신의 섭리를 알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에 따라

그 사람에게 당신의 섭리를 

그런 방식으로 알리고자 하기 위해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지..

 

무조건 흠없는 번역본을 보고

성경을 연구하고 분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과 분별, 생각의 기준점을

하나님께 두지 않으면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즉 성령의 인도함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로

말씀을 연구하거나 더 정확한 번역본을 본다고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제한이 없으신 그 능력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지..

 

사람이 만든 인본적 기준의 

프레임안에 갇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도..

다른 번역본들은 번역상의 오류가 많아서

그런 번역본들을 보면 미혹될 여지가 많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없고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섭리의 한계를

자기 기준대로 정하고 있는게 아닌지를 

진지하게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현실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만을 기준 삼고

진리적 관점으로 말씀을 대한다면..

 

단 한 구절만을 읽었는데도

장 전체가 말씀하고자 하는 그 섭리의 비밀을

깨달아 알게 하실 수도 있고..

 

말씀의 조각들을 퍼즐로 인도해주셔서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를 깨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유일한 전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인도함을 받느냐의 여부이지..

 

어떤 정확한 번역본을 가지고

말씀을 공부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사실 이건 성경 번역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얼마나 많은 인본적 기준들이 내안에 셋팅되어 있고 

그런 기준들이 프레임이 되어 그 안에 갇혀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내가 하는 모든 사고에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기준 삼고 있지 않으면

내가 하는 모든 생각들은 다 내가 기준되어집니다.

 

그래서 겸비함으로 나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결국은 내가 기준된 생각과 말과 행동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오류없는 번역본으로 

성경말씀을 똑바로 접했는지를

감찰하시는게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만을 기준점 삼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으며

실질적인 동행을 하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오실 주님앞에 

진짜 신부들이기 때문입니다.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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