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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온유함"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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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필독) *

2021. 2. 9.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온유함"의 본질!

 

 

 

우리가 삶 가운데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이 기준된다는 것은..

 

내안에 있는 것들,

즉 내 생각, 지식, 감정 등이 절대기준이 되어

판단과 분별을 하게 되고

그에 따른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식으로 나의 어떠함이 기준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나를 고집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판단과 분별이 필요한 상황과 문제앞에 

나의 어떠함이 기준되어 나를 고집한다는 것은 

진리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온유하다는 말을 할 때

어떤 태도적 차원에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하는 그런

외적인 태도만을 온유함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함은

본질적으로 나를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과 문제앞에

내가 가진 생각과 지식, 감정이 앞서는게 아니라..

 

어떻게 판단하고 분별해야 하는지를

성령안에서 겸비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그렇게 그분의 인도함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만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내가 아닌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기준점이 될 때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온유함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어떠함이 아닌,

말씀 안에서의 진리만을 절대기준삼아 

그 기준대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앞에 내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팔복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중에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5)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온유함이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본질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온유함을 가지고 있다면

나오는 외적인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디모데후서 2:24)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디도서 3:2)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온유함을 가지고 있을 때 

나타나는 외적인 현상 중 하나는 바로

서로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온유함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그런 

태도적 차원으로만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함에 따른 외적인 태도와 분위기가

다투지 않고 화평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 상황 자체가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함의 본질은 반드시

“진리 안에서의 온유함"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 안에서의 온유함이 아니라면..

 

진리를 거스르고 타협하면서도

온유해보이는 모양과 분위기만을 

형성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 기준에선 

온유한 모습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진리를 타협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의한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온유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 6:1)

 

이 구절에서 보면 온유함을 

온유한 심령(영)이라 표현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는 것은

"온유한 태도"로 바로잡으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 기준에서의 온유한 마음이라고 하면

무조건 부드럽고 상냥한 외적 태도와 연결지어 버립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허물이 드러나면 

무조건 다독여주고 감싸주고 

용납해주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잠시 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는 것은..

 

그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앞에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즉 그들의 영혼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주라는 말씀의 진짜 의미입니다.

 

무조건 부드럽고 상냥한 외적인 태도로

일관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2장은 온유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디모데후서 2:25)

 

앞구절인 24절에선 분명

모든 사람들과 온유함으로 

다투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했는데..

 

25절에선 거역하는 자는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온유함으로 훈계한다는 것은

앞서 본 갈라디아서 6장 1절 말씀처럼

온유한 심령으로 훈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온유한 심령으로 훈계를 했을 때

혹시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그가 진리안에 바로 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심령은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내면의 요소 중 하나입니다.  

 

만약 진리안에 바로 서길 바라는 

온유한 심령으로 나아갔지만.. 

 

상대는 그걸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여서

외적인 분위기가 아주 냉랭해지게 됐을 때..

 

그럼에도 그 사람이 

온유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끝까지 진리를 타협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는 자기 감정대로 받아들여서

설사 외적인 분위기는 안좋아 지더라도

결코 다툼이 일어나진 않습니다.

 

다툼은 쌍방이 다 감정적으로 나아갔을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보여지는 상황 자체를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면.. 

 

진리를 타협치 않고 그대로 전한 

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게 됩니다.

 

괜히 그런 말을 해서 

분위기를 흐려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에선..

 

냉랭하고 분열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외적인 분위기와 전혀 상관없이..

 

인간적인 감정이 아닌 

진리안에 바로 서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한 그 사람은

온유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되고..

 

진리를 자기 감정으로 받아들인 상대는

하나님앞에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큰 책망을 듣게 될 사람이 됩니다. 

 

이 부분을 성령안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이 온유함을 받아들이게 되면..

 

처음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해서

상황과 분위기가 안좋아지는 것을 본 후..

 

"그래 그 정도 죄 짓는다고 

큰 문젠 없을거야 괜찮아"라고 하며

분위기를 밝고 화평하게 만들기 위해 

사람의 감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냥 용납하고 다독여 줌으로써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육적인 현실은

온유하고 화평한 상황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영적인 실상은 

보이는 현실앞에 진리를 완전히 타협하여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버린 

전혀 온유하지 않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그 외적인 태도가 어떠했든간에

하나님앞에선 결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 안에서의 온유함은..

 

그 사람이 범죄했을 때

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이 아니라..

 

진리안에서 회복되길 바라는 

온유한 심령(마음)으로.. 

 

그가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 자각하고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죄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면..

 

아주 직설적이고 강한 책망을 해서라도

그가 죄에 대해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리안에서 진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예수님께서 자기자신을 소개할 때 

겸손하고 마음이 온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늘보좌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으시며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런 일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에게 부드럽고 상냥한 태도로

나아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의 어떠함(생각, 지식, 감정) 다 내려놓고 

순종해야 할 대상에게 죽기까지 순종하려는 

그런 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런 온유와 겸손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셨는데..

 

그 순종의 삶 안에는 

우리 인간적 기준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도 

많이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성전 안에서 물건을 사고팔며 

장사하는 상황을 보시고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안의 양과 소를 다 내쫓으시고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요 2:14-15)

 

사람 기준에서

온유와 겸손한 마음을 가진 예수님이라면..

 

설사 그 상황이 잘못된 상황이라 해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전에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시며 

눈물로 호소하셔야 맞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대적하는 그 상황에 대해

의분을 참지 않으시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경건한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그 속은 더러움으로 가득찬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향해선 

직설적인 단어와 어조로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3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33)

 

온유와 겸손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다는 것이..

 

온유하다는 의미를 

사람 기준으로 인식하는 이들에겐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이 

이처럼 강하게 책망하실 수 있는 이유는..

다른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책망안에는 결코

자신의 어떠함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어떠함,

즉 자기 생각, 지식, 감정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요 8:15-16)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8:28)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거스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영적으로 살기를 바라는

온유한 심령으로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감정적인 미운 마음이 들어서

그들을 책망한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그런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지 않으신 이유는..

 

자신의 영적상태를 인식하지 않고

또 스스로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멸망길을 향해 내달리는 이들에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강하게 드러내 선포하는 것이..

 

듣는 사람의 내면이 

그 진리에 반응할 수 있도록 이끄는

가장 합당한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리에 반응한다는 말은..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일지..

아니면 진리를 완전히 거부할지에 대한

중심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든 사람 상처주지 않고 기분 상하지 않도록

진리를 교묘하게 타협하고 변질시켜서 전하게 된다면..

 

듣는 사람은 온전한 진리를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죄를 당할 때 

오히려 그 사람들을 꾸짖으시며 다 보내십니다.

 

그리고선 그 여자에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아무도 없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테니

이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바리새인들과 달리

간음한 여자에겐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신 이유는..

 

이 여자의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상태를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중심이 있음을 아셨기에..

 

강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시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때론 강하게 책망하시고

때론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셨지만..

 

이런 예수님이

한결같이 온유한 분일 수 있는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어떠함(자기 생각, 감정)이 기준되서

그런 자기 뜻에 의해 행동하신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들이 진리안에 돌아올 수 있길 바라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상을 둘러엎으실 때에도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미운 감정이 들어서 

그렇게 행동하신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그 상황 자체를

강하게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유대인들에 대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을 죽게 만든 사람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적 감정(마음)을 비롯한 

자신의 어떠함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강하게

그 온유함을 내보이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기준에선

전혀 온유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뜻에만 전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과 겸손함을 끝까지 지켜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온유함에 대해 

외적인 모습과 태도를 본질로 말씀하는게 아니라..

 

온유함의 본질은 바로

온유한 마음(심령)이라고 말씀하고.. 

 

그 온유한 마음은 반드시

진리에 기반한 온유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진리 안에서의 온유함"에 대해 

야고보서 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21)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이

우리 안에 접붙여져 있지만

그 말씀을 우리가 온유함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모든 더러운 것과 악을 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더러운 것들과 악을 내버리지 않으면

온유함으로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든 더러운 것들과 악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버리지 않으면..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즉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갈 수 있는 말씀들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

즉 내가 기준된 나의 어떠함(생각, 감정, 지식, 욕심)을 

철저히 내버릴 때

진짜 온유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인자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38)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어떠함을 다 내려놓고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구하면서..

(마 26:39, 막 14:36, 눅 22:42)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 안에서의 겸손과 온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친히 우리에게 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벧전 2:21, 딤전 1:16)

 

그럼에도 온유함에 대해

사람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은..

 

"진리 안에서"가 전제되지 않았음에도..

 

무조건 밝고 화기애애하고 

서로 단합되는 그런 상황만을

온유함이 넘치는 그림이라 여길 것이고..

 

진리를 철저히 거스르고 있지만 

공동체 내에 화평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그 화평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전한다면..

 

전혀 온유해보이지 않고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모양이 어떠하든

자신이 홀로 그렇게 외쳐서라도

사람들이 진리안에 바로 서길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전하는 거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앞에 

홀로 온유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물론 모두가 '예'라고 할 떄

'아니오'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실상은 진리가 아닌 자기 기준(지식, 생각)에 의한

고집을 담대하게 내세우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먼저 얘기한 그런 경우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모세는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온유함을 가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배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선 

내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선

배도행위에 가담하고 

여호와의 편에 서지 않은 자들을 

모조리 다 처단함으로써 

하나님앞에 공의를 바로 세웁니다.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그들이 살기를 바라며 용서를 구했던 것이

모세의 온유한 심령이었지만..

 

가증한 죄악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한 자들 앞에선

부드러운 태도로 그 죄를 용납해 버리는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공의의 기준으로 단호하게 행동한 것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자

모세의 온유한 심령에 의해 나타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함의 본질은

진리 안에서의 온유함, 

즉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온유함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심령은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 본질이지만 

온유해보이는 현상(태도,분위기)은 상대적 비본질입니다. 

 

하지만 그 기준점을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두게 되면 

본질과 현상을 대체시켜 버림으로써..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참담한 지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안에서 

전반적으로 빚어지고 있는 영적인 비극입니다.  

 

실제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문제 앞에서..

 

누구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를

본인이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면

이런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철저히 사람 기준에 의한 

옮고그름을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분별하여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전에 

성경 번역본에 관한 메세지를 전했을 때..

 

생각의 기준점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기준된 자기 고집을 

끝까지 내세우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어떤 번역본을 통해서도

하고자 하시면 성령님이 인도하시지만 

그래도 난 개인적으로 

좀 더 정확한 번역본을 보겠다”

라고 하는 것과..

 

"그래도 정확한 번역본을 보는 것이 맞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 

애초부터 자신의 어떠함만을 

판단과 분별의 절대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섭리를 

스스로가 제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는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

무슨 얘길 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이런 경우가 많아진다는게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온유함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말씀)이 아닌 자신에게 두고 있다면..

 

"그래도.. 

괜히 싸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만들고 

분열(?)을 초래하는 것보다

화평함을 유지하고 단합하는게 낫다"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메세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그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만든 

종교적 기준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면..

 

성경은 온유함에 대해 

드러나는 태도적 차원이 아니라

우리 심령의 온유함을 본질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진리안에 바로 서길 바라는 

그 온유한 심령으로 진리를 전하고 선포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냥하고 부드럽고 싹싹하고

화평한 분위기가 형성되는게 아니라..

 

그 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온유한 심령을 유지하며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앞에 진짜 온유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옳다 생각하는 인본적 기준을 셋팅해놓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섭리를

자신들의 기준과 관점에 맞게 임의로 바꿔서

자신들이 믿고싶은 하나님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래서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기 생각과 지식(교리), 욕구에 의해

또 자기가 따르는 사람(사역자)에 의해

하나님을 거스르는 미혹으로 나아가 버리고..

 

교회적 차원에서는..

사랑, 평화, 정의, 선교, 연합 등의 

거룩해보이는 명분을 내세워

실상은 하나님을 배도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자행하고 있는게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온유한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전하든간에

자신의 어떠함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시는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면서..

 

그 진리를 접하는 사람들이

진리안에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님오심이 임박한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은

이런 온유한 심령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시고..

 

주님은 그런 사람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구별된 거룩한 신부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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