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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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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필독) *

2021. 2. 26.

그리스도인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습관!

 

 

 

신앙생활에 있어서 습관이 중요한 이유는..

 

습관이 되면 

우리에게 아주 큰 영적인 유익이 되는 부분이 있고,

 

반대로 습관이 되면

절대로 안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핵심은 바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그런 교제가 있어야만

우리가 그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 뜻대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이런 교제에 있어서 

핵심은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말씀과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합니다.

(행 6:4, 딤전 4:5)

 

말씀과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 읽고 묵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삶 가운데 주기적으로 이뤄짐으로써 습관화된다면..

 

우리에게 큰 영적 유익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누가복음 22:39)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말씀하는데..

 

감람산에 가신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습관적으로 감람산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처럼

늘 하시던대로, 즉 습관을 따라

산에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습관화되신 부분은 바로

행동의 습관화입니다.

 

즉 일정한 시간에 늘 하시던대로 

감람산에 올라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드렸던 것인데..

 

행위 자체가 습관화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가 주기적으로 이뤄지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행동이 습관화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영적인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행동이 습관화될 때

함께 습관화되어선 안되는게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습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산에 가셔서 기도를 드리실 때는

그 몸에 습관이 베여서 그렇게 행하셨지만..

 

그 마음은 항상 그렇듯이

불쌍한 백성들이 구원받길 바라시는 

사랑과 온유의 마음이셨습니다. 

(요 17장 전체.)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5-17)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실 때 

습관화된 행동과 달리 그 마음만은 

백성들을 향한 변치않는

사랑과 온유의 마음이셨던 것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4복음서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종교행위에 대해 자주 언급이 됩니다.

 

특히 이들은 

기도와 금식 등 경건한 종교행위에 

아주 철저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종교행위의 습관화로 따지면

이들보다 더 몸에 벤 이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누가복음 18:11-12)

 

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적 특징들을 

비유를 통해 있는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행동의 습관화와 더불어

마음까지 습관화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의 습관화와 더불어

마음이 어떻게 변질되어 버렸는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27)

 

이들이 스스로 

경건해보이는 종교행위를

습관화시켜서 열심을 다하지만..

 

동시에 그 마음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변질된 상태가 되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습관화된 우리의 '행동'이,

'마음'에 안좋은 영향을 주도록 

그냥 내버려둔다면..

 

말씀 읽고 기도할 때 

마음의 진정성이 사라져 버릴 뿐 아니라

하나님앞에 더 가증한 상태로

적용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습관화 되버리면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습관화된 행동에 의해 

늘 똑같은 패턴의 말씀과 기도행위를

주문 외듯이 율법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란,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는 교제를 하게 되고..

 

내가 원하고자 하는게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져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상황에 따라 구해야 할 어떤 기도내용이 있으면

그런 교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순리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기도를..

내가 원하고자 하는 응답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으로만 인식하게 됩니다.

 

심지어 원하는 바를 응답받기 위한 목적으로

금식기도나 새벽기도, 40일,100일 작정기도 등에

올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것이 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기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닌

타인을 위한 기도만 하는 것은 

괜찮다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의 목록을 나열해놓고

구원받게 해달라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물론, 자기의 유익과 욕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이런 기도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이런 기도는 

꼭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본질은 앞서 본 것처럼

나를 위해 생명값 치루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님께 부어짐으로써 

그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요 10:30,16:32)

 

그래서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기도하실 때도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를 목적으로 두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이 부어져서 영혼들을 위한 마음을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그 사람에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대화하는게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대화 나누고 교제하길 원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기도했느냐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위해 얼마나 중보했느냐도 아닙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앞에 나아와 그져 

함께 시간을 갖는 것 자체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목적이자 본질로써 

우리 중심에 깔려있어야 합니다.

 

그런 중심이 깔려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져

영혼들을 향한 기도가 되어져야 하고..

 

이것이 영적인 순리입니다.

 

우리안에 내주하신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느끼거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이런 본질적 전제를 중심에 깔고

잠잠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고 있느냐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인식이 

우리 중심에 본질로 깔려 있지 않으면..

 

설사 나 자신을 위한게 아닌,

타인을 위한 여러 기도제목을 부르짖으며

5-6시간 동안 기도한다 해도

기도에 대한 응답과는 별개로

기도하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는

더 이상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어떤 분들은

"그럼 악한 영을 대적하는 

기도를 하는 것도 잘못된거냐"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 오해하면 안되는게..

 

우리의 기도를 받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을 대적하는 것을

기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흔히 "대적기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연히 말해

악한 영을 대적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선포'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이런저런 방식으로 공격해옴을 감지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여

악한 영을 결박시키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약 4:7, 벧전 5:9)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우리를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름으로 악한 영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권한입니다.

 

그래서 기도 전이나, 기도하는 도중에..

 

악한 영이 잡생각을 집어넣거나

또는 감정이나 느낌을 자극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영에게

선포하여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은

전혀 문제될게 없습니다.

 

이 부분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자체가 

우리 기도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스스로에 대한 겸비한 마음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될 때..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기록된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깨달아 알게 되어짐으로써..

 

삶 가운데 가장 먼저 나에게 적용시킨 후 

다른 사람에게도 흘려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중심으로 말씀을 대하지 않으면..

 

내가 듣고싶고, 보고싶고, 

적용하길 원하는 구절들만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결국 내가 평안과 위로와 은혜받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구절들만 가려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거나 

강대상에서 설교할 때 대부분..

 

교인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말씀을 아주 편향적으로 

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이

진짜 살아계신 참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속성을 알게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 심판하지 않으시고

복 주시고, 은혜 주시고, 위로만 해주신다는..

 

그런 반쪽짜리 하나님만을 마주하면서도

본인들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존에 그런 설교만 듣던 분들이

제 채널에 와서 이런 메세지를 듣게 되면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부분적인 진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말씀을 

보고 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깨달아 알게 됨으로써

나에게 적용시켰을 때..

 

때론 양심을 강하게 후벼파는 듯한

심적 부담과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더 분명하게 돌아보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져 이땅에서 

위로받고, 은혜받고,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현실적 차원에 국한된 목적으로 

말씀 대하는 일을 습관화시킵니다.

 

이런 잘못된 마음으로

행동을 습관화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이땅에 사는게 아니라..

 

내 뜻(욕구,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다를게 없습니다.

 

즉 겉으로는 경건해보이는 

종교행위에 열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

자기중심적 신앙패턴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습관화 됐을 때 

나타나는 특징 두번째는..

 

그런 행위가..

스스로의 거룩함을 내세우고 표방하는

'외식'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하루에 2시간씩

기도행위를 한다고 하면,

그 기도가 어떻게 주님앞에 드려졌는지는 

전혀 생각치 않고..

 

기도를 2시간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스스로 만족해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의롭게 여깁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의 비유를 통해 본 그대로입니다. 

 

반대로,

정해진 시간에 하루에 2시간씩 

꼭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는 

낙담하거나 우울함에 빠져듭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는

교제를 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드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경건해 보이는 행위를 

빠지지 않고 날마다 했느냐의 여부에 포커스를 두고서..

 

그 행위 자체를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느냐의 잣대로 삼아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종교행위를 

정해놓은대로 꼬박꼬박 잘하게 되면..

 

그 행위 자체로 

자신은 하나님앞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철썩같이 믿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그렇게 기도행위에 열을 올리면서 

자신처럼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아주 대놓고 판단,정죄하진 않더라도

은연중에 자기 종교적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만약 그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설사 오늘은 늘 하던대로 

기도시간을 갖지 못했더라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감동을 받는 등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특정시간에 주님과 더 직접적인 

교제의 시간을 갖길 원하는 것이지..

 

그 특정시간에 기도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들에겐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정시간만이 아닌

삶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특정시간에 특정행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마음에 타격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시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더라도

스스로 마음의 타격을 받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일절의 판단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인도함에 의해

말씀을 깨달아 알게 되는게 아니라..

 

그져 많이 보고, 많이 암기하고, 많이 공부해서 

머릿속 지식으로만 쌓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많이 안다 자부하는 그 지식이

나를 교만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자기 지식으로

가르치려 하면서 은연중에 

자기 지식을 뽐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보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습관화가

행동의 습관화가 아닌  

우리 마음의 습관화로 이어지게 되면..

 

내안에 축적되어지는 말씀에 관한 지식이

나를 더욱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행위가 

삶 가운데 주기적으로 이뤄질 때..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영적 유익은 

분명 값지고 귀한 보배일 수 있지만.. 

 

자칫 주기적인 행동의 습관과 더불어 

마음까지 습관화 되버리면 

이런 영적인 대참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처럼..

행동의 습관화가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쳐

결국 마음이 습관화 되버리면..

 

내가 그 어떤 경건한 행위를 하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앞에 

온전한 행위가 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행동과 더불어 마음이 습관화되지 않도록

날마다 자기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아무리 하루이 3-4시간씩 꼬박꼬박 기도하고

말씀을 하루에 100장씩 보면서 암기하고..

일년에 열댓번을 통독한다 해도..

 

그런 종교행위가 결코 나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행동의 습관화가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날마다 주님앞에 나아가 

주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고..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면서

삶 가운데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촉매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동의 습관화로 

주님과 교제하는 일에 열심을 기울일 때..

 

우리 마음이 결코 무뎌지거나 

그로인해 사탄에게 틈을 허용하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경건해보이는 행위지만..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게 되는 

'거룩한'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의를 내세우게 만드는 

'악독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데

이런 말세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씀하면서..

 

5절에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이들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경건의 모양은 

이런저런 종교행위를 의미하고..

 

경건의 능력은 

경건의 본질인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즉 경건한 모양을 내기 위해선 

날마다 열심을 기울이지만..

 

진짜 본질인 마음은 

경건한 상태를 갖지 않는 경우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더욱 

본질인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될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행동의 습관화가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어주는

촉매제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 마음이 합당한 상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방언과 예언 등 이런저런 눈에 보이는 은사들과

또 경건해보이는 이런저런 행위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되는

그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그런 상태에서 나타나는 

이런저런 은사나 행위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본질은 언제나 

우리 마음의 온전함이라는 것이고..

 

이 본질 안에서

행동의 습관화가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산에 올라가 기도에 힘쓰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몸소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말씀과 기도에 있어서

행동은 습관화를 추구하여 

영적인 유익을 삼으려 하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마음의 습관화는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시는 이유는 다른게 아닙니다.

 

당신의 아들의 핏값을 주고 사신 우리를

너무나 끔찍히도 사랑하시기에..

함께 교제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부모는 자식과 함께 교제하고 싶은 이유는

단지 자식을 사랑해서입니다.

 

그런데 장성한 자식은 

다른 의도와 목적 때문에..

 

부모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교제하는 척합니다.

 

만약 부모가..

자식이 그런 의도로 자기에게

접근하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하물며..

우리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경건해보이는 행위에만 열심을 낸다면 

하나님앞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행위 이전에

우리 마음을 먼저 살피고 점검하며..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과 교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건한 행동의 습관화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날마다 겸비함으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뜻대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잠언 24:12)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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