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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에 역사하는 사탄의 핵심전략!

댓글 4

* 공지사항(필독) *

2021. 3. 23.

마지막 때에 역사하는 사탄의 핵심전략!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가장 강력한 징조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의 미혹'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미혹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미혹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미혹입니다.

 

바로.. 

"내가 괜찮으니 이건 괜찮은 것”

이라는 미혹입니다.

 

어떤 교회나 선교단체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석을 했는데,

혼적으로 자기에게 뭔가 은혜(?)가 있는 것 같으니,

이 집회는 진리안에서 분별해볼 것도 없이 

무조건 영적으로 아주 유익하고 

저 사역자는 내가 믿고 의지해도 될 사역자라 여깁니다.

 

자신이 세상 문화들을 

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서 즐기고 있으니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신거니까

감사히 누려도 되는거야..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거리낌없이 

자기가 믿고싶은 믿음,

그 믿음안에서 형성된 자기만의 

신앙적 가이드라인을 설파합니다.

 

자신이 죄를 끊지 못하고

여전히 죄에 속박되어 살고 있기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사람이 이 정도 죄는 지을 수밖에 없어.

어떻게 사람이 완벽할 수가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거리낌없이

자기가 믿고싶은 믿음,

그 믿음안에서 형성된 자기만의 

신앙적 가이드라인을 설파합니다.

 

사랑과 기복에 대한 설교가

강대상에서 주로 전해지고

그런 설교가 자신의 귀를 달콤하게 하고 

자기 마음을 심히 만져주고 위로해주며

그렇게 나에게 은혜(?)가 쎄게 임하면..

 

"교회에서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가 

주로 전해져야 되는거야..."라는 믿음을

자기안에 공고히 한 채

다른 얘기엔 거부감 갖거나 귀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주님 다시오심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휴거될만한 영적인 자격을 갖춘

신부로써의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겸비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마음은 전혀 없이..

 

교회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

또는 한번 거듭난 체험이 있는 모든 사람이 

그날에 남김없이 다 휴거된다는 믿음을 

자기안에 세워놓고, 그런 확신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배도한 교단 소속 교회에서

벗어나 거룩히 구별되어져야 하는

본질적 문제에 있어서도

"교단이 가입(연합)한건데 교회가 무슨 상관이야"

라고 하며 스스로 구별될 마음을 거둬버리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그런 자기의 인본적 논리를 그대로 설파합니다.

 

특히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이

이런식의 논리를 교인들에거 설파하며 

그렇지 않아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사역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사역자의 말만 따라가는 교인들에게

그 공동체에서 구별되지 못하고 

다 함께 멸망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사람마다 크냐작냐의 차이일뿐,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 사고의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불신자라면,

당연히 삶의 모든 가치와 방향은

자기 스스로를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난 이후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진리가 되어 

모든 삶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합니다. 

 

4복음서 곳곳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가장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 16:24, 막 8:34, 눅 9:23)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말씀앞에 비춰보았을 때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거라면..

 

자기 경험, 감정, 생각, 지식 등 

모든 것들을 철저히 부인해야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한번 거듭난 이후에도

말씀앞에 자신을 겸비하게 비춰보지 않고..

 

말씀엔 그렇게 기록되었더라도

여전히 자기 경험, 자기 감정, 지식, 생각 등,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뜻하는바대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술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부르고

교회에서 예배 열심히 드리고

이런저런 외적인 봉사나 섬김을 하면서

이로 인해 본인은 당연히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라 여깁니다.

 

신앙고백을 할 때는

하나님, 예수님이 내 살의 주인이고

나를 인도하신다고 말하지만..

 

실제 어떤 상황과 환경을 맞딱드리게 되면

철저히 내 경험, 생각, 감정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창 6:5)

 

즉 우리안에 있는 것들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의 유혹을 그대로 따라감으로써 죄의 종이 됩니다.

(갈 4:8)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3)

 

죄의 유혹에 그대로 따라가는 이유는

나의 내면이 그 죄에 합당한 터가 

기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옛사람의 습성이라고 말씀합니다.

(롬 6:6, 에벧 4:22, 골 3:9)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후에는

이런 옛사람의 습성을 버릴 수 있는 절대적 기반이 

우리 내면에 마련되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고후 1:21-22)

 

그것은 바로.. 

우리안에 내주하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

옛사람, 즉 자기를 부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 5:16,18, 디 3:5-7)

 

그래서 거듭난 후에도 본질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우리 삶 가운데 꾸준히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이런 직접적인 관계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보고 비춰볼 때에 가능합니다.

 

이게 안되면..

입술로는 하나님, 예수님을 말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기하고 통독하며 

말씀을 가까이하는 종교행위는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여전히 자기가 중심되어

말씀 따로 삶 따로 구분지어 놓고

그져 자아에 의한 기질적 성향에 의해 

삶이 움직여지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에 대해 

결코 진리의 기준을 적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명한 진리적 기준에 의한게 아니라

단순히 내가 어렵게 느껴지고, 잘 안될 것 같으니,

또 내 생각, 감정, 느낌이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런 자신의 어떠함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의 미혹에 빠져

자기 생각과 감정, 교리적 지식, 논리 등을 

내면에 깊게 셋팅시켜 놓고 

자꾸만 넓은 길, 멸망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때, 

온갖 사람의 미혹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떤식으로든 사람의 미혹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진리(말씀)앞에 자신을 비춰보지 않고

결국 자기를 부인하지 못함으로..

 

이런저런 사람의 미혹에 걸려 

다 함께 멸망길로 나아가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본인은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일어나는 이런 영적변질의 과정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이런 영적인 과정은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상황들 외에도

철저히 자기 중심적 경향으로

삶을 이끌어나가는 경우가 광장히 많습니다.

 

제가 영상을 올릴 때마다 

종종 달리는 댓글 중 하나가 바로..

제 발음이나 억양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발음 또는 억양이 너무 거슬려서

영상에 집중할 수 없고 도저히 못 듣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억양같은 경우는

수십년간 살아온 그 지역적 특색이

그대로 몸에 베여있기 때문에 

바꾸는 건 사실상 어렵습니다.

 

하지만 발음같은 경우는,

녹음할 때 최대한 신경을 쓰면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명확하게 녹음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본인의 성에 차지 않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런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들에게 있어서 

진짜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녹음할 때 사운드 자체에

잡음이 심하게 섞여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객관적(기술적) 차원의 문제라면..

 

제가 무조건 더 보완해서 

명확한 소리를 전달해야 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발음이나 억양의 문제는

거슬리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다시 말해..

이 문제는 객관적인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향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진리적 기준이 아니라  

단지 나의 기분과 감정, 느낌 등에 의해

거북스럽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그런 내면의 감상적(주관적) 요소들에 의해 반응하고 

그에 따른 말과 행동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나의 기분이나 감정, 느낌 등에 의해

거북스럽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집중이 안되는 문제임에도..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지 않으면.. 

 

본인의 그런 감상적 요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 성향이 바뀌어지도록 

하나님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거나 하는 등,

스스로가 바뀌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대부분 자기 중심적 성향에 의해 

다른 사람이 자기자신에게 맞춰주길 바라고

또 그걸 아무렇지 않게 요구합니다.

 

이런 부분은 본인이 

평소에 본인 스스로를 돌아보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쉽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기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보지 않고 

내 중심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지 않을 때 

나의 감상적 요소들에 의해 나오는 

가장 흔한 우리의 행동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감상적(주관적) 성향이 드러났다가 

뒤늦게 본인이 그걸 인식한 후

스스로 고치려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주관적 성향을 아무렇지 않게 앞세웁니다.

 

혹시나 제 발음이나 억양에 대해 

"저는 전혀 거슬리지 않아요ㅎ"

라고 말씀하실 분들이 계실 수 있는데..

 

제 발음이나 억양이 거슬려선 안된다를 

말하고자 하는게 아닙니다.

 

제 발음과 억양을 예로 들어서 말씀드린 것일 뿐..

 

자신의 무엇을 기준삼아 움직이고 있느냐,

즉, 나의 어떠함(생각, 기분, 감정, 느낌)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에 따른 진리의 기준으로 나아가고 있느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 발음이냐 억양은 별로 거슬리지 않았더라도..

 

또 다른 상황이나 문제들에선

마찬가지로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요소들에 의해

자기중심적 성향의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마다 거의 뺴놓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기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메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볼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음에도

그걸 실제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제가 하는 모든 얘기들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항상 

비슷한 내용의 메세지만 전한다" 생각하며  

역시나 자기안에 내재된 그 감상적 요소에 의해 

메세지 내용을 그냥 다 흘려 버립니다.

 

아마 이 메세지도 

그렇게 흘려버릴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수백번 반복하든, 수천번 반복하든

정말 겸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때그때마다 늘 자신에게 새롭게 적용시켜서

하나님앞에 합당한 중심으로 서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허나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저 역시 메세지를 전할 때마다

하나님앞에 온전한 중심으로 서기 위해 

가장 먼저 제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

 

제가 남들보다 잘났고 뛰어나서 

이런 메세지를 전하는게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쓰시는 통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날마다 겸비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감상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 말씀진리에 의한 철저한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아주 객관적이고 준엄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 그런 것 같으니 

이건 맞는거고,

내가 괜찮게 느끼니 이건 괜찮고,

내가 불편하니 이건 아니고 등등..

 

나의 어떠함이 아닌 

진리안에서 바른 잣대를 고수하며 

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움직여갑니다.

 

그래서 가장 본질적으로 

죄를 대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본인이 여전히 죄와의 

힘겨운 씨름 가운데 있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단호히 결단하여 싸워야 하고..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 중심에 분명하게 새기고 살아갑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5-27)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도바울조차도..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날마다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육신을 제어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한 삶을 

산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위해 그 누구보다 

가장 수고했다고 공인받는 바울조차도..

 

이처럼 겸비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과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이 중심이 되는게 아닌 

오직 예수, 오직 말씀이 진리로써 

삶의 기준이 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러합니다. 

 

스스로의 영적상태를 점검해보려면

내가 지금 무엇에 좋게 반응하고

무엇에 아멘하며 무엇에 화답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축복, 평안과 화평에 대한 메세지는 

내 안에 잘들어오는데..

 

죄와 심판, 지옥, 회개, 자기 십자가, 좁은 길 등의

진리적 메시지는 불편하고 거부감이 든다면..

 

내가 좋게 느껴지고 받아들이는 

그 마음의 방향을 무작정 따라가지 말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합당한 반응인지를

진지하게 살핀 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저 역시

옛사람의 속성이 아직 남아있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어떠한 죄도

무조건 그냥 다 용서해주시니 

이땅에서 복을 누리며 평안히 살아도 

영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고

천국행이 보장되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마음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런 옛사람의 기질, 

죄성의 기질이 여전히 내안에 

꿈틀거리고 있기에...

 

죄로 인해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철저히 죄와 싸우고 

영적인 씨름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쩔 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전진해 나갑니다.

 

또 내 오감을 자극하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도

내 마음이 원하고 반응하는 것들은 다 

진리의 기준에 합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휴거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모든 자들이 다 휴거되는 것이

실제 진리였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반응하고 

내 마음이 원하는 그런 것과는 달리

진리의 기준은 그때그때마다 다른게 아닌

절대불변의 기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열처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 처녀 다 졸고 있다가

신랑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지만.. 

 

다섯 처녀는 

어느새 기름이 다 떨어져버려서 

결국 혼인잔치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기름은 성령이 내주하셔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느냐 아니냐로

계속 채워져 있을 수도 있고

그만 떨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깨어나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그 중심은 이미 

성령의 임재가 사라져버린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나의 어떠함을 다 내려놓고

철저히 말씀을 기준삼아

겸비한 마음으로 성령 하나님께 순복하여

그분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술로는

거룩해보이는 말들을 하고

경건한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그 실상은 

내 마음이 원하고 좋게 반응하는 것,

나에게 좋은게 좋은 것만을 따라간다면..

 

신앙생활을 몇십년,몇백년을 했든

기름을 준비한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오심이 임박한 마지막 시대에는

스스로를 대하는 기준이 

냉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와 달리 재림하실 때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주로 오시는게 아니라

인간을 심판하기 위한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오심이 가까운 이 시대는

영적 전쟁이 개인적 차원부터 전지구적 차원까지 

모든 차원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그런 혼란(미혹)의 때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자기 마음 편한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쉽게만 살아가려 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기 영을 놓아버리고

포기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진리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그 기준 안에서 자기 영을 지키고 

관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삼키려 발악하는 원수마귀는..

 

니가 바라고 원하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라고 부추깁니다. 

 

그것이 우리 중심을 변질시켜서

하나님에게서 끊어놓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보면,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서 있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가 아닙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입니다. 

 

이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정말 서 있는 사람은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겸비한 마음으로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려 애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주님이 보시기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겸비하게 들여다보고 점검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미혹, 특히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미혹에 빠져 

결국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내가 내 스스로에 대해 

나는 잘 믿고 있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내가 잘 믿고 잘 살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이 인정해주셔야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래서 굳이 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서

마음의 틈을 벌리고 

교만과 같은 죄성이 들어오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가 나오는데.. 

 

그 중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에 대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계 3:17)

 

하지만 주님이 보시는 그들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계 3:18)

 

자기 스스로 자신은 

하나님을 위한 이런저런 일도 많이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매우 잘 믿고 섬기고 있다는

큰 착각(미혹)에 빠져서..

 

가장 본질인 자기 내면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버린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베드로후서 2:21)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믿는다고 하나 실상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버린 이런 사람들이..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는 불신자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과 누가복음 14장 11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리 중심에서 비롯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영적 법칙입니다. 

 

내 스스로 아직 갈 길이 멀고..

아직 더 믿음이 성장해야 하고..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주님을 찾고, 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더 부르짖고, 주님앞에 나아갑니다.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와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에 나오는

삶의 행동양식과 신앙적 습관은 전혀 다릅니다.

 

이 두 마음의 차이는.

마음의 방향성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외적으론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그 마음에서 나오는 열매의 차이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중심의 차이에서

말씀 한장을 보는 거라면.. 

 

우리 심령을 터치하시는 강력한 

성령의 조명하심과 능력이 될 수 있고..

 

기도 10분 더 하는 것이 

주님의 임재안에 더욱 깊게 나아가는 

영적인 충만함이 될 수 있습니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암기하고 

익힌다 한들 지식에 머물게 되고..

 

방언기도 3시간을 한다한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의만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람만이..

 

주님의 비밀한 마음과 뜻을 깨달아 

그 뜻하신 바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자신이 가라지가 아니라고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가라지는 처음부터 

아예 씨가 없는 속이 빈 것이고..

 

쭉정이는 꽉 차지 않고 부족하여 

충실하지 않은 씨를 말합니다.

 

혹여나 내가 이렇게 쭉정이 같은 사람은 아닌지 

준엄한 진리의 기준으로 자기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자신을 겸비하게 잘 살펴

나의 어떠함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삼아.. 

 

스스로에 대한 미혹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미혹에서 벗어나..

 

쭉정이와 가라지가 아닌

하나님앞에 거룩히 구별된 알곡 신부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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