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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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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필독) *

2021. 4. 1.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특징!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24-27)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마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닥쳐도

주추를 반석위에 놓았기 때문에

그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은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시면서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치면 그 집은 처참히 

무너져내릴 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1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것에 대해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6-20)

 

여기서 보면

내 말을 듣고 행하는지 아닌지는 

그들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하시면서..

 

가시나무가 포도를..

엉겅퀴가 무화과열매를 맺을 수 없듯..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반드시 못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어떠한지는 바로..

 

어떤 기초(토대)위에 

집을 지었느냐에 따라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모래 위에 집을 짓게 되면..

그 토대 자체가 못된 나무와 같기 때문에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면 그 집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짐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고..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되면..

그 토대 자체가 좋은 나무와 같기 때문에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절대 무너지지 않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집 다 겉으로만 보면 

번지르르하게 지어진 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집을 지탱하는 기반은

천국과 지옥 차이입니다.

 

보이지 않는 본질의 기반이

반석이냐 모래냐에 따라

그 열매는 극과 극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 일 없을 땐 

그냥 화려한 모양의 집처럼 보이나..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는 등,

상황과 환경, 문제앞에 맞딱드리게 되면

그 집을 지탱하는 기반이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집의 겉모습이 아닌,

보이지 않지만 집을 지탱하고 있는 기반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기반이 무엇이냐에 따라

집의 형체를 바꾸려 하는 만만찮은 

현실의 상황과 환경, 유혹이 닥쳐왔을 때..

 

처참히 박살나고 무너지느냐 

아니면 견고히 버텨낼 수 있느냐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말씀하고..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 모양을 전혀 다르지 않게 지어놓은 후..

 

잠시잠깐 동안은 

그 형체를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허나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서 집에 부딪히면

그 집의 실체가 어떠한지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와 동일한 영적인 법칙(원리)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보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3:18-23)

 

여기서 보면..

씨가 어디에 뿌려졌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20-22절에 보면

"말씀을 듣고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나 

환란과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져 결실하지 못하고

또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면 23절을 보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이 차이는..

말씀이 뿌리내려진 기반이 어떠하냐에 따라

결실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20-22절에선 

말씀을 일시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나

환란과 박해, 세상 염려와 유혹 등으로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져 내린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23절에서 

30,60,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이유는..

 

동일하게 환난과 박해, 

세상 염려와 유혹이 덮쳐오지만 

다 이겨냈기에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견고한 반석 위에

말씀이 뿌리내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마 13장 23절에선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

30,60,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누가복음 8장 15절에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즉 좋은 땅에 말씀이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앞에 합당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앞서 본 마태복음 7장에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

즉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바로..

 

"온전한 중심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마 7장 16절 이하에서 말씀하는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인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선 반드시

그 내면의 기반, 즉 우리 마음이 

하나님앞에 합당한 마음이여야 합니다.

(누가복음 8:15)

 

이런 합당한 마음이 

내면의 기반으로 깔려 있을 때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는 

유일한 전제조건은 바로..

 

우리 중심이 그 은혜를 받을만한 상태일 때..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깨닫게 된 말씀을 삶에 적용시켜

그 말씀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핵심이 되는 

가장 본질적인 (내면의) 기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중심의 합당한 상태"”

 

그러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앞에 합당한 상태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요?

 

바로 우리 마음안에

아주 확고한 진리적 기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적 기준이란,

우리안에 내주하신 진리의 성령님께 

우리의 어떠함 다 내려놓고 순복함으로

그분의 인도함을 따라가려는 마음자세가 되어질 때..

 

그분께서 친히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깨달아 알게 해주심으로

그 말씀을 우리 중심에 두게 되면..

우리에게 확고한 진리적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 전혀 상관없이 

그져 내가 성경을 많이 읽고 암기하고 묵상하고

통독해서 "말씀을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상태에서 

"말씀 말씀"을 강조하는 그런 율법적 차원이 아니라..

 

정말 내 중심이 그분앞에 온전히 순복되어져서

그분의 인도함을 따라갈 때 

그분께서 친히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역사해주심으로

말씀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함 속에

말씀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삶 가운데 일어나는 어떤 상황과 환경, 유혹 속에서도

능히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반석위에 지은 집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반석위에 주추를 박아놓았기 때문이라는 마 7:25 말씀이..

 

바로 우리안에 진리의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친히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롬 8:9, 갈 2:20-21)

 

성경을 보면..

내주하신 성령의 인도함(능력)을 따라

믿음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길 원하노라"

(로마서 15:13)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라디아서 5:5)

 

즉,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성령안에서 그분의 인도함 가운데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부터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짜 본질적 믿음은..

 

내 바라는 것들을 들어주시는 믿음이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나를 도우시고 지켜주신다는 

제한적인 부분에 국한된 그런 믿음을 넘어서..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내 삶의 전반을 통치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께 삶을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이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의 본질안에 온전히 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바를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주실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이 본질적 믿음안에서 나오는

믿음의 자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히 11:6, 약 5:15, 요일 5:14)

 

그래서 진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먼저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내가 원하는 바가 하나님 뜻과 일치하는지를

먼저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져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무조건 들어주실줄 믿고(?)

또 이미 받은 줄로 여기며(?) 

담대히(?) 기다리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은 

이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도 

앞서 말한 그 본질적 믿음과 동일합니다. 

 

"너희가 믿음안에 있는가"라는 말은..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내 삶의 전반을 

통치하시고 이끌어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께 온전히 순복하며 삶을 내어드리고 있는가를 의미합니다.

 

이런 믿음안에 거하고 있는가를 점검하여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너희의 신분을 스스로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뒷부분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는 것이고..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실제 우리 삶이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이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써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안에 내주하신 성령이 우리 삶을 

인도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걸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께 삶을 전적으로 내어드리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그 삶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성령의 인도함이 아닌

자신의 자아(기질, 욕구)가 이끄는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거하는 성전임에도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아무렇지 않게 지음으로

그 성전을 더럽히게 되는 것으로써 

그런 사람은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써

성령님이 우리안에 거하고 계심에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더럽힌다는 말의 의미는.. 

 

술 마시고, 담배 피고, 허랑방탕하여

우리 육신의 몸을 더럽힌다는 

그런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

 

성령님과의 실제적인 교통함 속에 

그분의 인도함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뜻과 욕구대로 살면서..

 

성령께서 자기 안에 거하고 계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고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알지 못한다는 것은

머리로 알지 못하는 차원이 아니라..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과 상관없는

내 뜻대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순복하는

이 믿음안에 거하고 있어야만..

 

온전한 진리적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합당한 마음(반석)이 기반되어지는 것이고..

 

이런 합당한 마음이 기반되어질 때..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그 어떤 상황과 환경, 문제 앞에서..

또 세상의 쾌락과 유혹, 

거대한 미혹의 광풍 앞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믿음으로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 자체가

성령안에 온전히 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먼저 12장 15절에 보면

"너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선 에서의 비유에 대해 말씀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에서는 장자로써 택함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자신이 그런 장자권을 가지고

아버지로부터 모든 복을 물려받을 수 있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장자권을 지켜내려는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 야곱이 팥죽을 주는 대신에

형의 장자권을 달라고 하자..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현실의 상황앞에 굴복하고 타협하여

자기의 가장 중요한 권한을 쉽게 팔아넘깁니다.

 

이때 에서의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내 장자권을 동생에게 내어준다는 마음으로

장자권을 내어주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장 현실의 상황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데

"장자권을 주겠단 말 한마디 했다고 

설마 내 장자권이 넘어가겠어?”

라는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뒤늦게 아버지 앞에 나아가

장자(맏아들)인 자신을 축복해달라며 

애원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 27:31-32)

 

그가 만약 

장자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면..

 

그 어떤 상황과 현실 앞에서라도..

설사 배가 고파서 진짜 죽을 것 같더라도..

동생이 장자권 주면 팥죽을 주겠다는 말을 해도.. 

 

"장자권만은 절대 안돼"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안에는 

한번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권은

절대 날아가버리지 않을 거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현실앞에 그렇게 타협해 버렸음에도.. 

 

장자권이 넘겨졌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1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말씀처럼..

 

장자권을 넘긴 행위(현상)가 나오게 된 

에서의 중심(본질)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에서는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넘긴 뒤 

뒤늦게 자기 아버지에게 나아가

내가 장자이니

나를 축복해달라 애원하며 나아갔을 때..

이미 때는 늦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왜 뒤늦게 아버지한테 나를 축복해달라 

통곡하며 나아갔음에도 

허락되지 못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17절은

"그가 눈물을 흘리며 구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부분을..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뜻을 돌릴 곳을 구했으나 그것을 찾지 못했다."

고 표현하고..

 

KJV(킹제임스 영어)에서는 

"found no place of repentance"

“회개의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표현합니다.

 

에서가 아버지께 애원하던 그 곳(상황)은 

회개함으로 아버지 뜻을 돌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번역본마다 조금씩 

그 표현은 다르지만 본질적 의미는

“아버지 뜻을 돌이킬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즉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눈물을 흘리며 구했는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까요?

 

아버지께 버림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야곱과 에서, 이삭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보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하심은 나오지 않고

그들의 현실속 상황 전개만 계속 이어집니다. 

 

이런 야곱과 에서, 이삭의 상황이

히브리서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에서가 기업을 물려받기 위한 자로 

택함 받은 자였지만 

아버지께 결국 버림 받았다는 것을 통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어떤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그대로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본 고린도후서 13장에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고 계심을 알지 못하는 자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했고..

 

고린도전서 3장에선

"성령이 너희안에 계심을 알지 못하고 더럽히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받는 상황이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에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앞에 섰을 때

자신들은 한번 거듭나 구원받았고 

상급 받기를 기대하며 자신들이 이런저런 

의로운 일도 많이 행했다고 주님께 호소하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불법자로 판결받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상황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훗날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는 것을..

 

에서의 경우를 통해 

히브리서 저자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들에서 이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내산 같은 곳이 아닙니다. 

곧,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흑암과 침침함이 뒤덮이고, 폭풍이 일고,

나팔이 울리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히 12:18-19, 22-23_표준새번역)

 

히브리서 저자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뒤

아버지 앞에 나아갔을 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버림받은 

에서의 경우를 교훈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장자의 명분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잘 지켜내면..

 

하나님이 계신 그 나라, 

즉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버림 받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장자의 명분을 지켜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것이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이후

죄사함과 구원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사는 이땅에서의 시간은

주님앞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때입니다.

 

그런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전에 성령훼방 죄에 대해 말씀드린 것처럼

이땅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이 그 중심의 변질로 말미암아

회개 자체를 하지 않았을 때..

 

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고

그 마음과 생각이 철저히 통제받게 됨으로

회개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계 16:9)

 

또 사울처럼 가증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척 했기 때문에

사함 받지 못하고 버림 받는 것이지.. 

 

전심으로 주님앞에 나아가 눈물로 회개했는데 

주님이 고개 돌리고 외면해 버리시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이..

 

이땅에서 적용되는 

십자가 대속에 의한 죄사함의 원리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두아디라 교회는 

"음녀 이세벨을 용납하고 내 종들을 행음하게 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자체로만 놓고 보더라도

너무나 끔찍한 (배도)죄입니다. 

 

그런데 2장 21절에 보면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조차도..

 

이땅에서의 시간 속에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커녕 

자살할 마음을 확정짓고 목숨을 끊음으로

스스로 회개의 기회를 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끓어버림으로 

회개할 기회 자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것은..

 

회개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회개할 기회를 받았지만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이 예정되는 것이

이땅에서 적용되어지는 영적 원리이고..

 

회개할 기회가 사라져 실제 멸망 받는 일은

이땅을 벗어나 하나님이 계시는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오해가 

제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구약의 에서가 

변질된 중심으로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현실에 굴복하여 

장자권을 아무렇지 않게 팔아넘기고서도

인식하지 못하며 살다가..

 

아버지 앞에서 눈물로 애원했지만 

끝내 버림받은 스토리는.. 

 

오늘날 한번 구원받았으니 

자신은 절대불변의 상속자라 여기며 

내주하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현실에 굴복하여 자기 양심을 팔아버리고 

“이 정도 죄 짓는다고 구원을 잃겠어?”라고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채 

자기 자아대로 나아가 버리는 이들에게..

 

훗날 하나님 앞에서 

난 구원받은 자이고 이런저런 행위도 했으니 

상급을 달라 애원해도 결국 버림받게 된다는

가장 큰 교훈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를 향해 

주님이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게 있습니다.

 

바로 "이기는 자"입니다.

(계 2:7,11,17,26, 3:5,12,21)

 

현실앞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유혹과 고난, 박해를 이겨낸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그에 따른 상급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두 교회도 아니고, 일곱교회 모두를 향해 

"이기는 자들에게는.."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이런저런 상황과 문제들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적용되는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다 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상황과 문제들을 마주했을 때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견고한 믿음의 반석위에 

반드시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우리에게 당연히 따라오는

여러 상황과 문제 앞에서..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과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에겐 

누구도 예외가 없는 통과의례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현실의 상황과 문제 앞에 

내가 과연 반석위에 견고히 서서 

중심을 잘 지켜내는가에 따라..

 

우리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져 이땅에서 복받고 은혜받고 위로받고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대로, 잘 먹고 살기 위해,

램프의 지니처럼 내 소원 빌고 복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과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게 되면..

 

우리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하면서

그분의 뜻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오늘날 믿는다는 많은 교회들을 보면..

 

교인들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성령 안에서의 그 본질적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게 아니라.. 

 

단지 교회라는 공동체적 울타리안에 가둬놓고

그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봉사, 섬김, 헌신)만 잘 하면

무조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처럼 유도하고.. 

 

또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삶이 아닌..

 

땅에 국한된 은혜, 축복, 위로 등의 

인본적 메세지만 편향적으로 전하면서 

사람이 만들어낸 반쪽짜리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목사나 사역자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땅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함으로써..

 

결국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여 다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프레임에 갇힌 신앙생활에 

내 영이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게 되면

모래위에 화려한 모양의 집을 짓는 것과 같기에..

 

강풍이 불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나면

그 집은 속절없이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즉 상황과 환경, 문제, 유혹 앞에서

믿음으로 견디고 이겨내는게 아니라.. 

굴복하고 타협하고서도 그걸 스스로 합리화하여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게 되버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지음받았고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지음받은 우리가

영혼없는 로봇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가는게 아니라..

 

하나님과 서로 사랑의 교제속에서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피 흘리는 고통을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롬 5:8-11, 갈 1:4)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심으로..

(요 14:16,26, 15:26, 16:7-8)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 순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이 믿음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즉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믿는다는 모양은 갖추고 있으나

이 온전한 반석위에 집을 세우지 않으면

절대로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할 때

내가 이러이러한 외적인 종교행위 자체를 

잘 하고 있느냐에 집중하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의 동기로, 어떤 목적으로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느냐를 살피고..

 

정말 내가 성령 안에서 

그분의 인도함을 받고 있느냐를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그것도 마지막 중의 마지막 때입니다.

 

언제 예정하신 마지막 7년의 타임라인이 

가동될지 모를 그런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환란의 타임라인을 전후로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여러 상황과 문제들을 

마주해야 할 것이고..

 

이미 우한 바이러스 사태를 기점으로 

그런 상황과 문제들이 우리 앞에 

실제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정말 

든든한 반석위에 집을 지어놓았는지

아니면 모래위에 집을 지어놓았는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고 점검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 바로 서서

주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안에 있지 않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셔서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버림받은 자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본인 스스로를 겸비하게 돌아보고

지금이라도 하나님앞에 나아가 

돌이켜 회개할 것은 철저히 회개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마지막 때가 되면 더더욱

만만찮은 현실의 상황과 환경, 유혹앞에 

믿음을 지켜내지 못하고 굴복해버리는 일이

더욱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시대적 현실 속에서 

더더욱 내 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보고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임재하셔서

친히 내 삶을 인도해 가실 수 있도록

그의 뜻대로 순복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하고

하나님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 단 한 사람도 

멸망받는 걸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다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겸비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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