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후순위라도 괜찮겠습니까?-퇴임을 앞둔 선생님께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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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012. 12. 3.

 

 

12월입니다. 연일 기온이 떨어지니까 이젠 겨울입니다.

퇴임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준비, 그 준비가 미흡하니까 퇴임하면 곧 순식간에 늙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몇 년 더 살지도 못하고 죽는 경우조차 있습니다.

 

 

 

아침에 더러 경춘선 ITX 열차를 탑니다. 물론 일반 전철을 더 자주 탑니다. ITX(Intercity Train eXpress)는 '청춘(靑春) 열차'라고도 부르는 고급 열차여서 일반 전철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KTX에 버금간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청춘! 그렇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열차는 젊은이들이 많이 탑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곧잘 값이 싼 일반 전철을 타고, 그리 바쁘지도 않을 것 같은 ──이게 바로 착각이겠지요── 젊은이들은 '청춘' 열차를 탑니다.

선생님께서는 퇴임하면 일반 전철과 '청춘' 열차 중 어떤 것을 타겠습니까? 오기로라도 반드시 그 고급 '청춘' 열차를 타겠습니까? 그런 마음이라면 아직 퇴임 준비가 잘 되지 않은 것입니다.

 

 

 

'청춘' 열차는 표를 끊을 때부터 '현실적인' 신분이 구분되어 드러납니다.

표는 창구에 가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옛 방법은 표 구입에 필요한 돈만 있으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참으로 공정한 구입 절차였지만 ── 몇 대의 기계(말하자면 '자판기')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액정 화면의 표시를 보고 손가락으로 의사 표시를 해서 구입하기 때문에, 기계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의사 표시가 되고, 그 표시의 정확한 의미 파악을 하지 못하면 일쑤 그 절차가 지연되거나 결국 표를 살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차가 들어올 시각이 가까워지면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청하는 다급한 소리가 들립니다. 노인은 서투르기 마련이고, 조급하면 더욱 그렇고, 그러면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더구나 전철역의 공익요원들은 절대로 늙은이의 편이 아닙니다.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아가씨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 당연하니까 노인들은 젊은 여인들이 그 공익요원들의 우선적인 도움으로 표를 사고 난 후에 후순위의 도움을 요청하면 속상한 꼴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러다가 그 '청춘' 열차가 떠나버리는 경우를 가상해 두는 것이 좋고, 그 난처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아예 집에서 인터넷으로 표를 미리 구입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습니다. 늙으면 이런 것입니다. 행정실 직원이 모든 것을 챙겨주던 어제까지의 일상이 순식간에 옛일이 되어버리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혈혈단신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노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퇴임을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교육부장관을 두 번이나 지낸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는, 지금 강원도 고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분의 그 생활은 놀랍기 짝이 없는 것으로, 더구나 인생 3모작론을 펼쳐서 많은 이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블로그 <현강재>에 그 인생 3모작에 관한 글이 실려 있으므로 이 글은 여기서 그만 읽고, 당장 그분 블로그로 옮겨가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저로서는 그분과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좀 겨루고 싶은 생각이 단 한 푼어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 이것이 그분 블로그로 옮겨가는 주소입니다.

 

                 블로그 <현강재>의 「인생 3모작론」

                         [http://hyungang.tistory.com/trackback/115](http://hyungang.tistory.com/trackback/115)

 

 

 

그분의 인생 3모작론에 대해서는 얼마 전 조선일보 주말 섹션 'WHY' 1~2면의 인터뷰 기사에도 소개되었습니다.1 많이 옮기고 싶지만, '인생 3모작'의 핵심만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 전 부총리는 인생을 3모작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회사에서 정년을 맞는 55세까지 30년가량 일하고 그 뒤 10여년은 적성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며 칠십 넘어서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비우며 살자는 것이다. 그게 고령화 사회를 살 해법이라는 것이다.

…(중략)…

―‘인생 3모작론(論)’에 대한 반향(反響)이 있던가요?

“인생 2모작에 대해선 주변에서 이미 확산되고 있는 걸 확인하고 있습니다. 50대 중반인 제자 한 명은 대기업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땄다더군요. 올해 육십 된 교수 한 분은 전문 심리 상담사가 되는 게 퇴직 후의 꿈이랍니다. 그것을 위해 2년째 대학원에 다니고 있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긴 했어요.”

―재미있는 일?

“제가 인생 3모작에 대한 글을 쓴 지 2년 가까운 얼마 전에 연세대 정무권 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스웨덴의 라인펠트 총리가 선생님 얘기와 거의 같은 말을 했다’면서요.”

―어떤 얘기였습니까.

“라인펠트 총리는 자유보수온건당 당수(黨首)로 중도 우파 연립정부의 젊은 총리입니다. 그가 올 2월 7일 스웨덴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웨덴인들은 첫 직장에서 30년간 열심히 일하고 다음엔 좀 더 느슨한 일자리로 바꿔 20년간, 즉 75세까지 일터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건 없지 않습니까.

“제가 말한 제3기는 인생의 ‘부록(附錄)’ 같은 것이니 그리 개의할 필요는 없어요. 단 그가 75세까지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엔 꽤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 3모작!

멋진 일이지만, 실현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미 퇴임을 '코앞'에 두었으면 더욱 어려운 과제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기로는 처세술이 다 그렇습니다. 참 쉬울 것 같지만, 그 중 가장 쉬울 것 같은 것도 막상 실천하려면 막막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앉아 있으면 곤란한 것도 분명합니다. 연금이 꽤 많아서 그것으로 살면 될 것 같지만, 골프나 치러 다니고 꿈에 그리던 해외여행을 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그 어려움이란 사실은 돈보다는 퇴임 이튿날부터 당장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는 냉엄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지도 모릅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그렇지 그 어려움이란 아무에게나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퇴임을 하면 왜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게 됩니까? 이건 참 말을 꺼내기가 어렵지만, 그대로 털어놓으면 전화를 할 일이 없어진 것이고, 그건…… 말하자면…… 이제는…… 그만큼……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대해서는, 저도 마찬가지 입장이니까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전직 기자였던 베르나르 올리비에(75), 은퇴 후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에 이르는 1099일의 여행기록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3부작을 펴내 유럽은 물론 한국의 걷기 여행자들에게도 '구루(guru, 스승)'가 된 그도 마찬가지였답니다. 60세, 퇴임을 하게 되자 침몰하는 배처럼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극도의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쟁과 질병, 맹수가 도사리는 실크로드 1만2000km를 걷고 또 걸으며 그 어려움을 이겼답니다. 길이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선물했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2

 

- 은퇴 후 무엇이 그렇게도 당신을 힘들게 했던 걸까. 자살을 생각할 만큼.

"직장에 다닐 때는 내 자리와 이름과 존재할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연금 생활자가 되면서 방향 잡을 키도, 목적지도 없는 구제민이 되어버렸다. 무기력감,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괴로웠다. 내가 사랑한 아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자식들은 독립해 떠나갔다. 내겐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사례만 봐도 퇴임은 장난이 아닙니다. 충분히 심각한 일에 분명합니다.

수다스럽지만 예를 한 번만 더 들어볼까요? 방금 읽은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남편은 은퇴 후 한동안 아주 많이 힘들어했어요. 하루 종일 자신을 찾는 전화 한 통 없다보니 자신감을 잃고 무력감에 빠진 거예요. 새로운 일거리를 찾기도 했지만 몇 년 동안 우울해하며 방황했어요.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죠. '좋아. 일단 아침에 일어나자. 그리고 생각해보자. 남편에게 뭐가 필요한지.' 그런데 그 사람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더군요. …(후략)…"3

 

 

 

실천하기 참 쉽고 좋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우선 조건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를, '어제까지의 나'를 빨리 잊고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다. 모든 것이 충분하다.'

옳은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필요한 건 이런 마음가짐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저 프랑스 전직 기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이미 바른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시 일어선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그냥 주저앉는가 일어서는가 그게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춘천-용산 간 급행으로 달리는 저 열차 이름은 '청춘'이라는 사실이고, 전철역 그 공익요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보다는 아름답고 싱그러운 젊은 여인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실은 저도 지금 일어서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이 이 한마디가 저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야 하므로 부디 힘 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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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일보, 2012.10.27,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서울 토박이' 안병영 前 교육부장관, 산골생활 4년을 말하다 「농부 된 부총리 ‘왜 몰랐을까 은둔의 즐거움’」
  2. 조선일보, 2012.11.3, [Why][김윤덕의 사람] '제주올레 찾은 도보여행의 개척자, 베르나르 올리비에' 「길을 떠나 홀로 걸어보라... 길이 보이리니」
  3. 칼 필레머, 박여진 옮김,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토네이도미디어그룹, 2012), 59~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