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브루너 "지식의 구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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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

2016. 10. 22.

Friday 15 July 2016. 《theguardian

 

 

《서울대에서는 누가 A⁺을 받는가》(이혜정, 2014, 다산에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1

 

캐나다에서는 국가가 학생들이 길러야 할 역량에 대한 거시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뿐, 그 역량을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기를지는 전적으로 교사의 재량이고 책임이다. 교사에 따라 어느 학생은 첫 번째 학기에 과학을 배울 수도 있고 어느 학생은 마지막 학기에 과학을 배울 수도 있다. 과학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배우는지도 교사에 따라 다르다. 당연히 교과서도 학교마다 다르고 교사마다 다르다.

 

이렇게 교사에게 교육권을 보장해 주면 창의적 수업이 가능해진다. 큰아이가 캐나다 초등학교에서 받은 과학 수업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수업에서는 '인간의 신체가 외부 자연 현상에 따라 영향받는 사례들'이라는 주제에 따라 학생들이 각자 연구 주제를 잡고, 실험을 설계해 실행하고, 실험 결과를 분석 및 해석하고, 마지막으로 교실에서 발표하는 과정을 한 학기에 걸쳐서 진행했다. 교사는 각 단계별로 학생들을 도와주고 조언해 주는 역할을 했지만 연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몫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자기만의 프로젝트에 빠져들었다.

큰아이는 언젠가 매우 큰 음악소리가 나오는 스피커 옆을 지나다가 덩달아 자신의 심장도 쿵쾅거리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강한 비트의 음악이 심장 박동수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연구 주제로 잡았다. 큰아이는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심장 박동수가 어떻게 변하는지, 익숙한 장르의 음악인지 생소한 장르의 음악인지 여부도 심장 박동수에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했다. 그리고 마치 전문 학술대회에서 박사들이 하는 것처럼 연구의 모든 과정을 커다른 종이에 요약해 친구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고 토론을 나누었다. 큰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학생들은 한 학기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배운 것인가? 나는 이들이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교육심리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제롬 브루너가 강조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물리학자가 물리학 실험실에서 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르치자"는 말을 캐나다 학교의 수업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어떤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실험을 유도하는 연습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수업의 주가 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수업에서는 교과서에 제시된 개념과 원리를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고 이를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가 평가 기준이 된다. 평가되는 내용 이외의 공부는 시간 낭비로 간주된다. 자신이 가진 호기심을 어떻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풀었는지, 그 결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평가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학생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기회가 억압된다.

창의적 과제가 가능한 수업, 교사가 창의적 운영을 할 수 있는 수업, 창의적 과정에 대한 평가가 가능한 수업,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캐나다(3,500만)가 노벨상 수상자를 20명 이상 배출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동력이 아닐까? (……)

 

 

"교육심리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제롬 브루너가 강조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물리학자가 물리학 실험실에서 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르치자"는 말을 캐나다 학교의 수업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차라리 좌절감 같은 걸 느낍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유명한 교육학자도 딴소리를 합니다. 물론 무슨 얘기를 많이 하긴 합니다. 그게 다 캐나다처럼 하지 못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고, 듣고 있을수록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데 대한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합니다.

 

브루너는 지식은 누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창안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저 캐나다 이야기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물리학자가 물리학 실험실에서 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르치자"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일 것입니다.

〈브루너의 서거에서 느끼는 교육과정 단상〉(강현석)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2 브루너가 마침내 저승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016년 6월 5일에 브루너(J. S. Bruner)가 100세에 작고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내가 브루너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85년 학과 전공과목 수업에서다. 수치로만 보면 무려 31년 동안 직간접적으로 떠올리고 되뇐 이름이다. 그 당시 학과 교수님이 강조한 용어는 '지식의 구조'였다. 브루너가 한국의 교육계에 알려진 때는 한국에서의 최초 교육과정 문헌인 정범모 교수의 『교육과정』(1956년 풍국학원 발행)에도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1968년 이경섭 교수의 학문중심 이론을 소개하는 글에서 브루너가 등장한다(이영덕의 『교육의 과정』 1970, 배영사』, 이홍우의 『교육의 과정』, 역서, 1973, 배영사. 이 책들도 주목해야 함.). 1970년대 들어서서는 이홍우 교수에 의해 브루너가 교육과정의 구세주로 등장하게 된다. 그 경위야 어찌되었든, 한국의 독자들에게 브루너는 지식의 구조, 발견학습, 나선형 구조 등으로 널리 회자된 것이 사실이다.

 

"브루너"! 교사가 되려고, 교사로 살아오면서 수없이 들은 이름입니다. 교사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부터 브루너라는 이름도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운명'이었습니다.

'학문중심 교육과정' '개념학습' '나선형 교육과정' '지식의 구조' '구성주의' '발견학습'……

 

그의 이름에 따라다니는 용어들에도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그래야 교사라는 이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도 있다고 할 용어가 몇 가지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캐나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물리학자가 물리학 실험실에서 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르치자"는 말은 실천할 수도 없었고, 실천하는 장면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말뿐이었습니다.

그게 가슴 아프고 한스럽습니다.

그 옛날, 초임교사 시절, 읍내 교육청 강당에 모인 우리 교사들에게 학문중심 교육과정과 함께 브루너를 이야기해준 장학진은 '지식의 구조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러니까 교재(교과서)의 내용을 잘 파악해서 구조화된 판서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멋진 판서 예시가 참고서("전과")에 들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머릿속에 그것밖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그게 지식의 구조화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원망하겠습니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까? 오랫동안 교육부에서 근무했지만 그의 철학이 실현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지금 어디를 다녀와 이 가을 저녁 여기 이렇게 혼자 앉아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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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4~186.

2. 강현석(경북대학교 교수), '브루너의 서거에서 느끼는 교육과정 단상'(한국교육과정학회 뉴스레터Newsletter of the Korean Society for Curriculum Studies, 2016년 7~9월호, 124호, P.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