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렘브란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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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세상

2021.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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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지에서 가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만나곤 한다. 특히 말년의 작품 앞에 서면 왠지 숙연해진다. 대체로 어두운 그림이지만 불가사의한 빛을 내뿜고 있다. 몇 겹에 걸쳐 붓을 칠한 어두운 배경에, 희미하게 떨리는 듯한 붓의 터치가 겹쳐진 붉은 갈색의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주름진 얼굴이 떠 있다. 할 말을 잊고 체념한 듯한 표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난다. 그림을 볼 때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자세히 보면 곳곳에 다시 그렸거나 명료하지 않은 붓질이 눈에 띈다. 어쩌면 그림 밑바탕에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가 지운 흔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랬듯이 아무리 그리고 그려도 뜻대로 되지 않아 중간에 붓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화가의 행위가 도리어 그림을 불가해한 것,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이우환 화가의 글은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읽는다. '의무적으로' 읽는다. 그렇긴 하지만 이번엔 어떤 얘기지? 기대를 갖고 때로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기 시작한다. 이걸 '의무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면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 램브란트의 자화성 이야기는「AI와 렘브란트, 그리고 초상화」라는 에세이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現代文學》2018년 11월호).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내가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기보다 미술을 이해할 시간과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하면 정확할 것 같다.

 

나는 그동안 램브란트의 자화상들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무심코? 기억에 남는 초상화이긴 했으니 이 글을 정신을 차려서 읽었겠지?

그렇지만 그 기억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램브란트의 초상화야."

누가 그림을 보여주며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뭔가 아는 척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을 느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게 뭐지?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 빛의 마술사? 초상화의 대가? 그 정도의 대답으로 저 사람이 만족할까? 혹 수능시험에 날 만한 문제를 물으면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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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우환 선생의 저 글을 읽으며 예전에 교과서에서 보던 그 화투장 크기의 램브란트의 초상화를 기억해냈고,  인터넷에서 램브란트의 초상화들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이우환 선생은 이 초상화들 중에서 주로 어떤 것을 이야기한 것일까?'

노인이 된 나는 비로소 미술 교과서의 미술, 수능시험에 출제될 만한 내용 같은 건 제발 잊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이라 할지라도 이우환 화가의 방법으로 들여다보기로 작정했다. 늘 자신에게는 뭐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그런 전문가의 글에 현혹되지 말고 이우환 화가처럼(화가처럼? 그건 아니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로 다짐했다.

 

이우환 화가는 AI가 더 발전하면 램브란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까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건 램브란트에 대한 무궁무진한 관심과 사랑이다. 램브란트에 대해 끝없이 탐구해보고 싶은 열정일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램브란트의 초상화를 자꾸 들여다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