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모처럼 화창한 이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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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세상

2021. 10. 3.

초가을 어느 날 '답설재'에서

 

 

 

2019년이었나? 그해 가을, 날씨가 좋은 날마다 나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른바 '공사 간에' 사소한 일들이야 늘 일어나는 것이고 마음이 흔들릴 만큼의 부담을 주는 큰 일만 없으면 살아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아도 불안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해 가을도 그랬겠지?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었겠지? 괜히 '이러다가 무슨 일이 나는 거나 아닐까?'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런 건 말도 꺼내기 싫지만 흔히 "전쟁 전야"라는 말을 쓰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진다더니, 이 가을도 오자마자 저 하늘이 더 높아진 것 같았다.

하늘이 정말 높아지나?

그건 아니겠지?

이런 하늘에 대한 좋은 묘사가 어디 있었지 싶어서 찾아보았더니 소설 "하우스 키핑"(매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랜덤하우스 2008, 233~234)이었다.

 

이모가 문가에 선 채 자주 호수 너머를 내다보며 말했다. "참 아름다운 날이구나." 통통한 아기 천사처럼 부푼 하얀 뭉게구름이 위풍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하늘을 흘러 다녔고, 하늘과 호수는 우아한 담청색으로 빛났다. 노아의 홍수가 절정을 이루면서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이를 측은히 여기는 날이 왔다. 위대한 자연이 물 위에 반사되도록 예정된 바로 그날 아침, 노아의 아내가 덧문을 열었던 게 분명하다고 상상해 보라. 홍수로 넘쳐흐르던 물이 잔물결을 이루면서 반짝반짝 빛나고, 이제는 달라진 신의 섭리 아래 구름은 오로지 아름다운 풍광만을 더할 뿐이었다는 사실도 능히 짐작이 가리라. 정말로 물속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창밖을 내다보던 노아의 아내는 죽음의 무도회 한가운데에서 모든 일가친척들과 같이 있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얼떨떨한 햇빛 아래에서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이곳을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수를 내다보고 있노라면 노아의 홍수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물 위에서 길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언덕도 다 아라라트 산이 되게 마련이다. 물밑에는 항상 과거가 쌓여 있으니, 사라지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죽으면서도 살아남은 과거다. 노아의 아내가 늙은 다음, 어디선가 대홍수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녀는 자신의 상복이 머리 위로 둥둥 뜨고 물이 땋은 머리를 다 풀어헤칠 때까지 그곳을 향해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또 자식들에게 물려줌으로써 그 따분한 이야기가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도록 했을 것이다. 그녀는 이름 없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누구 하나 찾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는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이 편했다. 그들의 죽음이나 탄생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누구 하나 기념해 주지 않는 그런 사람들 틈에서 말이다.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보인다.

이렇게 흘러가고 그러면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인가 뭔가도 '언제였던가' 싶게 흐지부지 사라지면 좋겠다.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여 사람들 표정도 밝음으로 넘치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다.

저 아이들이 마스크를 벗은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돌아다니고 아주머니들은 그런 아이들이 아직도 그렇게 외쳐대며 저기 저 놀이터 주변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지 간혹 창문 너머로 내다보는 나날이 이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파삭파삭 소리가 다 들리도록 늙어간들 뭐 그리 애닯겠는가*......

 

 

 

(* '애달프겠는가'가 맞는 말이라는데 왠지 '애닯겠는가'로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