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롤리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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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020. 6. 1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로리타》

신동란 옮김, 모음사 1987(13판)

 

 

 

 

 

 

 

롤리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다는 느낌?

‘불경’은 아니지? 그럼 외설스럽다?

그게 외설? 아니지! 외설하고는 다르지!

그럼?

 

소녀(여성?)의 이름은 국어사전에도 들어 있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작가 나보코프(Nabokov, V.)가 195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파격적인 소아 성애를 묘사하여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으며, 한때 판매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다시 발간되었을 때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오늘날 소아 성애를 가리키는 롤리타 콤플렉스가 일반 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나는 이 책을 '버젓이'(?) 들고 다니며 읽진 않았다.

 

"(…) 아아 이름이 아주 예쁘구나 / 계속 부르고 싶어 / 말하지 못하는 / 나쁜 상상이 사랑스러워 (…)"

어느 가수가 노래에 '제제'를 등장시켜서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그 가수를 동정하거나 옹호할 이유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 소설(내가 보기엔 결코 아이들이 봐야 할 책은 아니고 부모들이 반성하며 읽어야 할 책이다!)『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어는 보았는지 묻고 싶었는데 그런 걸 쓴 기사는 볼 수 없었다. 당연하지. 논쟁을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유치한 방법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굴 뭘(물)로 봐?”).

 

나는 이 소설 『롤리타』에 대해서도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읽어봤어요?"

36장 중 제1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로리타. 내 생명의 빛, 내 가슴의 불꽃. 나의 죄악, 나의 영혼. 로―리―타. 혀끝은 입천장 밑에서 구른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마지막 세 걸음 째에 이빨과 만난다.

로(Lo) 리(Lee) 타(Ta)

아침의 그녀는 로(Lo)였다. 신발을 신지 않고 잰 키가 4피트 10인치인 평범한 로였다. 바지를 입으면 로라, 학교에 가면 돌리였으며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였다. 그러나 내 품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로리타였다.

그녀 말고는 또 없었는가? 있었다. 그녀 아닌 다른 여자가 사실. 어느 여름날 최초의 어떤 계집아이를 내가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로리타도 없었을지 모른다. 아 그게 언제냐고? 로리타는 태어나기도 전에 나이만큼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그 해 여름이었다. 바닷가의 왕국에서. 이 엄청난 산문 스타일의 글을 살인자가 썼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늘 참작해주기 바란다.

배심원 석의 신사 숙녀 여러분, 증거 서류 제 1번에는 대천사들이, 고상한 날개가 달린, 잘못 전해들은, 단순한 대천사들이 무엇을 시기했는지 그것이 나와 있오. 이 가시들의 엉킴을 봐주기 바라오.

 

오르한 파묵은 「가혹함, 아름다움, 시간 : 나보코프의 아다와 『롤리타』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에서 가령 헤밍웨이, 사르트르, 카뮈, 포크너 같은 작가는 ‘노스탤지어’의 느낌으로 읽지만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 나보코프 같은 작가들은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는 작가들이라고 했다. 나보코프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 나보코프의 산문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것만으로는 해명이 안 된다. 나보코프의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사악함’(그의 책 제목에 이 단어가 쓰인 일도 있다)과 가혹한 면이 내재되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름다움이 ‘시간 밖’의 착각이라고 느끼게 하고, 나보코프가 살았던 삶, 시대 그리고 문화로 우리를 연결해준다. 파우스트적인 의미로 그 대가의 가혹하고 사악한 아름다움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보코프의 문장 중에서 특히 아름다운 부분을 열거했다.

 

롤리타가 테니스 치는 모습을 묘사한 유명한 장면, 샬럿이 아워글라스 호수로 천천히 들어가는 장면, 험버트가 롤리타를 잃은 후 들어앉은 산자락의 작은 마을―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노는 소리가 들리는―을 바라보는 장면, (눈[雪]이 없는 부르겔 그림) 기억 속에서 젊은 날 연인과 숲에서 만나는 장면, 어린 아들 드미트리가 기차를 보는 장면, 한 손은 아버지, 다른 한 손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는 장면, 롤리타에게 쓴 에필로그(전부 열 줄이다)에서 정확히 한 달 만에 완성했다고 한 장면, 캐스빌 시에 있는 이발사가 나오는 장면, 『아다』에 나오는 대가족 장면을 읽을 때면 삶이 정확히 이렇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을 그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선망을 자아낼 정도로 썼다고 감탄하게 된다.

 

롤리타에게 쓴 에필로그를 보면 다음과 같다(36장의 마지막 부분, 그러니까 이 소설의 끝부분).

 

그러므로 독자들이 이 책을 펼칠 즈음에는 우리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이 손에서 피가 뛰고 있는 동안에는, 너는 많은 부분을 축복받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나는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레스카까지도, 딕에게 충실해라. 다른 놈들이 너를 만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들에겐 말도 걸지 말고, 네 아기를 사랑하기 바란다. 사내아이라면 좋겠구나. 너의 남편은 언제나처럼 너에게 잘 해줄 거야. 또 그러기를 바라고,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할 때는 그때는 내가 시꺼먼 연기 같은, 아니 발광한 기린 같은 유령이 되어서 그에게 나타나 신경의 한올 한올을 다 풀어헤칠 테다. 클레어 퀼티를 동정하지는 말아라. 그와 험버트 험버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보다는 험버트 험버트를 두 달이라도 더 오래 살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들소와 천사를 생각하고 있다. 오래 가는 그림물감의 비결과 예언의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의 피난처를, 이것이 로리타 너와 내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불멸인 것이다.

나의 로리타.

 

이렇게 집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처럼 철저할 수 있을까?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