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최은영 단편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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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021. 8. 3.

 

 

 

그렇게 지내서는 안 될 사이에 담을 쌓고,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게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연이야 개별적인 것이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그런 일에 대해 막막한 느낌입니다.

어찌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느낍니다.

젊었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뿐입니다.

이것이 늙음의 정체가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르렸습니다.

이건 누가 고치라고 한다고 고쳐질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넉넉지 않다는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은, 어렴풋한 아니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얘기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그럴 힘도 없습니다.

그런 얘기 한 편의 여러 장면에서 '현재' '과거' '관점' '결말'을 보여줄 수 있는 네 장면을 내 마음대로 골라 옮겨 썼습니다.

 

 

 

최은영 단편 《답신》

《현대문학》 2021년 6월호

 

 

 

나는 어른이 된 너를 몰라. 너도 나를 모르지. 영화관에 가서 표를 살 때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 카페에 가서 음료를 주문할 때, 계산대 반대편에 서 있는 네 또래 아르바이트생을 보면 그들이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카드 결제하실 건가요, 네, 카드는 이쪽에 꽂아주세요, 네, 봉투가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주차 등록해드릴까요, 아니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서로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를 하지. 만약 내 눈앞의 사람이 너라는 걸 내가 안다면, 네가 나를 몰라본다고 해도 좋다고, 그런 식으로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어.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까.(78)(현재)

 

 

"긴 말 안 할게. 너희 형부, 네가 사과하기를 바라셔. 잘못했다는 한 마디만 하면 돼. 주말에 우리 집으로 와."

나는 뒤돌아 언니를 바라봤어.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지.

"나 신고 안 했어. 신고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신고를 해."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언니."

나는 언니를 부르고 한참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어.

"언니도 그랬잖아."

언니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책상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깍지 낀 손을 바라봤어. 언니의 귀와 얼굴, 목이 울긋불긋해진 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봤어. 언니가 느낄 수치심을 어림하면서 나는 뒤틀린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언니의 무너진 마음 위에 올라서서 입을 열었어.

"언니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야. 형부가 언니 인생을 망친 거지. 근데 내가 왜 사과를 해."(83~84)(과거 : 언니='너'의 어머니)

 

 

너에게 당연한 건 없었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도, 더운 날 땀이 나는 것도, 길고양이들이 사람이 무서워 자동차 밑으로 피하는 것도 너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어. 왜? 너는 묻고 또 물었지. 최선을 다해 대답하려고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할 말이 없어졌어. 그럴 때면 이모도 그 이유를 알고 싶네, 라고 대답했지. 그 대답은 언제나 너를 싱긋이 웃게 했어.

나는 내 마음속에서 너와 그런 식으로 대화하곤 했어. 내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말하면 너는 왜냐고 물어. 그럼 나는 내가 너희 아빠에게 심한 폭력을 저질러서 너희 가족에게 절연당했다고 답하지. 왜? 다시 묻는 너에게 나는 답해. 너희 아빠가 내 언니를 괴롭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고. 그에게 경고하고도 싶었다고. 너는 내게 다시 왜냐고 물어. 나는 답하지. 사랑하는 언니를 보호하고 싶어서, 언니가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고. 너는 왜냐고 물어. 때때로 사랑은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하니까. 나는 대답해. 왜? 너는 말간 얼굴로 내게 다시 묻지. 그럼 나는 답해.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이모는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만날 수 없게 된 거네. 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지. 그래, 맞아. 어느덧 나와 너는 얼굴을 마주 보고서 웃고 있어.

너에게는 내가 아닌 나를 보여주고 싶었어. 마음 넓은 나, 재미있는 나,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나, 용기 있는 나...... 그런 나로 가장하면서  어쩌면 그런 나도 내 모습의 일부가 아닐까 희망을 품었어.(93~94)(생각)

 

 

스물세 살 생일이었어. 그날은 기상 시간보다 한참 일찍 눈이 떠졌지. 눈을 뜨니 창문으로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앞에 서서 운동장에 내리는 눈을 봤어. 아직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진 가느다란 눈발이 흰 조명등 빛을 받아서 반짝이며 땅으로 내려오는 거야. 조명등 빛이 닿은 눈발이 내 눈에는 꼭 하늘로 이어진 길처럼 보였고, 어쩐지 그 빛나는 눈이 내리는 그곳에 내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너를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그 순간이었어. 내가 영원히 너에게 다다를 수 없는 타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었지. 그 순간에도 너의 세계에서 나는 빠른 속도로 지워지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래도, 그래도......(94)(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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