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Leisure / W. H. Davies

댓글 16

내가 만난 세상

2021. 11. 24.

 

 

 

2016년 3월 초 어느 날, 콜로라도의 교수 '노루' 님이 이 블로그에 긴 댓글을 썼습니다.

그때 나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잘 쳐다봐주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썼을 것입니다.

"선생님~"

아이들이 부르면 어떤 선생님은 웬만해선 그 애를 바라봐 주지도 않고 말할 게 있으면 해 보라는 시늉만 하곤 했습니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난 아이가 "안녕하세요, 선생님~" 해도 어떤 선생님은 코대답도 않고 지나갑니다.

나는 그게 정말 못마땅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봐 주지도 않는 주제에 그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길게 얘기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나는 2010년 2월에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나며 그 학교 교직원 전체의 의자를 모조리 회전의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아이가 선생님 가까이 오거든 그 아이를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회전의자는 몸을 돌리기가 아주 좋지 않습니까? 부디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이 노루 님이 쓴 댓글입니다.

 

 

"아이들 쳐다봐 줄 시간도 없는데 뭘 가르친다는 건지"
그 생각은 못했네요. ㅎ
파란편지님 아니고서는 쉽게 못 떠올릴 생각이지만요. ㅎ

요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Roberson Davies는 캐나다의
소설가/극작가/비평가/언론인/교수이고, 웨일즈 사람인
W. H. Davies는, 저 시 한 편이 실려 있는 책의 '시인 소개'
부분에 의하면, 유럽을 유랑하며 '카우보이'나 과일 따는
노동자로 일하다가, 버나드 쇼가 서문을 쓴, 그의
"Autobiography of a Supertramp 대단한 떠돌이의 자서전"
(1908)으로 유명해진 후 소설가/시인이 되었다네요.

영시에서 운(韻)은, 제겐, 각운(脚韻)이나 보일 정도이고 그
정도로나 저는 즐기는 터라, 'Leisure'도 그래서도 재미있네요.
나중에 또 읽어보기 쉽게, 아예 전문을 베껴놓아야겠어요.

                    
Leisure / W. H. Davies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care?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And stare as long as sheep or cows.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Streams full of stars, like skies at night.

No time to turn at Beauty's glance,
And watch her feet, how they can dance.

No time to wait till her mouth can
Enrich thar smile her eyes began.

A poor life this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저 여인이 저기 서 있는데 내가 어떻게

로마나 러시아의

또는 스페인의 정치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지?

 

How can I, that girl standing there,
My attention fix
On Roman or on Russian
Or on Spanish politics?....

 

             -- W. B. Yeats, "Politics"

 

 

돌볼 일로 꽉 차서, 서서 빤히 쳐다볼

시간도 없으면, 이게 무슨 삶이지?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 W. H. Davies, "Leisure"

 

 

저 여인이 저 코트에서 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내 테니스에 집중할 수 있지?

 

살아 있음으로

잰 몸놀림이 너무 즐겁다는 걸까.

자연에 대한 예의도 지키면서

자연에 더 가까워진, 활짝 벗어부친

고운 차림이라서 더

아, 환희가 팡팡 뛰는 걸까.

 

오월의 맑은 토요일

내겐 겹겹으로 행복한 이른 아침.

 

 

마지막의 "저 여인이 저 코트에서 뛰고 있는데"는 노루 님의 작품입니다.

바라본다는 행위의 의미가 서로 좀 다른 것 같은데 깊이 생각하면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