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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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세상

2022. 5. 12.

 

 

 

국민학교 다닐 때는 사이렌이 울리면 재빨리 '책보'를 싸서 머리에 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괴뢰군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할 경우를 대비하는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는 줄도 모른 채 들에서 일만 하고 있을 아버지와 엄마가 걱정스러웠고, 평상시와 하나도 다름없는 두 분을 보면 안심이 되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본래 어리석었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수십 년 간 사회정의 구현의 기본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초임 학교에서의 어느 날, 1교시 후에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홍보하려고 마을로 나갔습니다.

농촌이 한창 바쁜 시기였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좀 나오라고 해서 곧 국민투표를 하게 되는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면 '찬성'에 기표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연습을 했는데도 말이 꼬여서 조리 있게 설명하진 못했습니다. 어느 분이(아, 지금도 그 표정이 떠오르는 그분...) 농사일이 바쁜 시기지만 나라의 중대사니까 투표하러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주었고, 다들 그 말을 수긍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얼른 일을 계속하라고 했는데 누군가 이렇게 일부러 나왔으니 농주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했고, 나는 고맙지만 아이들이 기다린다고 사양하고 돌아섰습니다.

나라의 중대사는 잘 처리되었는지 국민투표 후에는 별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 잊었겠지만 그 시간에 자습을 했을 아이들(그때 그 시골 학교에는 담임을 하는 교사들 외에는 교장 교감 각 한 명, 그리고 종을 치고 시험지를 인쇄하는 청부 한 명뿐이었습니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거의 다 세상을 떠났을, 그날 논둑으로 나와서 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논으로 들어간 그 농부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그만 미안해하고 싶습니다.

잊고 싶습니다.

 

아침저녁 뉴스 시청 시간에도 좀 느긋해지고 싶습니다.

내가 조바심을 갖거나 걱정을 하거나 열을 올리거나 해서 달라진 것도 없었습니다.

뭐하려고 공연히 끝까지 스스로 앓으며 살겠습니까?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내 아들딸 손자 손녀가 살아갈 세상이니까 세상 일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렇게 조바심을 갖거나 초조해하거나 과도한 걱정을 하거나 열을 올리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실은 뉴스 시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나운서들이 아침부터 괜히 열을 올리는 것이 특히 그렇습니다. 좀 조용조용 얘기해도 좋을 텐데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르듯 하는지, 신경이 쓰이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써놓고 실천하고 싶은 다짐입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에게도 그만 미안해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