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편지

................. 그 "엄마들"이 지어준 이름

28 2021년 11월

28

책 이야기 〈물 위의 다리〉죽음 앞에서 만난 사람

앨리스 먼로 소설 〈물 위의 다리〉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 마흔넷 유부녀 지니가 캄캄한 밤에 웨이터 리키와 함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이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걸 보여 드릴 게요." 그가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지금쯤 겁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전의 정상적인 그녀라면 애당초 이렇게 따라나서지도 않았겠지만. "호저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호저는 아니에요. 호저만큼 흔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1킬로쯤 더 가서였던가, 그가 전조등을 껐다. "별 보여요? 저기, 별이요." 그가 물었다. 그가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이 그저 고요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댓글 책 이야기 2021. 11. 28.

26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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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논단 명퇴를 하겠다는 K 선생님께 (2021.11. 26)

‘명퇴 사유 예시’가 교육 단상 블로그의 단골 유입 키워드의 자리를 차지하더니 마침내 K 선생님으로부터 명퇴 얘기를 듣게 되었고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더니… 교육 말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아름다운 교육자인 건 분명하지만 세상일에는 더러 멍청한 면을 보여주는 K 선생님이 명퇴를 해서 무얼 하시겠다는 걸까요? 물어나 봅시다. 놀겠다는 대답이 쉽겠지요? 무얼 하면서요? 골프? 사십여 년을! 그 오랜 세월 누구와 함께? 혹 해외여행인가요? 사십여 년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동남아로 마구 돌아다닐 작정입니까? 골프 치러 나다니고 패키지 해외여행 두루두루 다닌다는 선배 얘기에 혹했습니까? 교사시절보다 더 바쁘고 신난다는 그 말을 믿고 있습니까? 사십여 년 그렇게 하겠다는 삶이 부럽..

댓글 교육논단 2021. 11. 26.

24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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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세상 Leisure / W. H. Davies

2016년 3월 초 어느 날, 콜로라도의 교수 '노루' 님이 이 블로그에 긴 댓글을 썼습니다. 그때 나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잘 쳐다봐주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썼을 것입니다. "선생님~" 아이들이 부르면 어떤 선생님은 웬만해선 그 애를 바라봐 주지도 않고 말할 게 있으면 해 보라는 시늉만 하곤 했습니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난 아이가 "안녕하세요, 선생님~" 해도 어떤 선생님은 코대답도 않고 지나갑니다. 나는 그게 정말 못마땅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봐 주지도 않는 주제에 그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길게 얘기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나는 2010년 2월에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나며 그 학교 교직원 전체의 의자를 모조리 회전의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22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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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뿔 2007 줄거리로 보면 의아하다 싶을 수 있다. 켄 부드르와 조헤너 패리가 결혼하는 데는 둘 사이에 구체적인 미움이나 우정, 구애, 사랑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한심한 사내 부드르.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로 늘 곤란을 겪는다. 아내 마르셀이 죽고 딸 새비서마저 장인 맥컬리 씨에게 맡겨 놓고는 이런저런 구실로 돈을 가져간다. 세월도 실없이 보낸다. 괜히 공군을 뛰쳐나왔고 주제넘게도 동료 문제로 비료 회사를 그만두었고 고용주에게 몸을 낮추지 않다가 보험회사에서도 쫓겨났다. 빌려준 돈 대신 허름하기 짝이 없는 호텔을 차지했는데 이 건물을 식당 겸 술집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장인에게 또 돈을 좀 달라고 하지만 사실은 쓸모가 전혀 없어서 철거하는..

댓글 책 이야기 2021. 11. 22.

19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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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이야기 「즐거운 일기」

즐거운 일기 최지은 11월에서 11월까지 그림 그리고 12월 마지막 날은 아무래도 슬퍼 그림 그리다 깜박 잠들기로 해요 당신이 꿈에 와 그간 이야기 들려주도록 모른 척 잠에 빠지고 이파리 갉아 먹히듯 점점 꿈이 좁아지고 잠이 달아날 듯 말 듯 꿈이 잊힐 듯 말 듯 당신이 떠나려는 사이에도 11월에서 11월이 가고 또 다른 11월 가도록 깊은 잠 들기로 해요 눈 내리는 밤이면 나쁜 기억이 있어 무서운 꿈을 꿨어요 그런 밤에도 눈을 기뻐하는 나의 늙은 개를 위해 채소를 삶고 저녁을 짓고 지친 마음은 그림 속에 주저앉히고 무엇이든 넘치지 않도록 얌전히 걸으며 그렇다 해도 12월의 끝 혼자, 식은 저녁을 다시 데우면서 잠시 창밖은 보겠지요 그때에도 가슴에 내리는 눈은 빈 접시 위에 헛것의 노래 되어 맴돌겠지만 ..

댓글 詩 이야기 2021. 11. 19.

18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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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세상 감옥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저는 이 명상 수련회를 지난 구일 동안 지도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거의 꺼낼 뻔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다시 똥 무더기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여러분은 바깥으로 나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사람을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는 나오지만 다시 기어들어 갑니다. 여기에는 재가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이 수련회가 끝나면 출가해서 스님이 될까요? 아마도 똥 무더기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갈 것입니다. 그곳이 근사하고 따뜻하며 아늑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벌레가 보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어렵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옥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세상을 알려하지 않습니다. 의지는 감..

16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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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그린썸 Green Thumb》

주례민 글·사진 《그린썸 Green Thumb》 위고 2014 막상 센트럴파크에 들어가면 옴스테드의 직감적 설계를 이해하기 위해 창조자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려는 분석적이고 탐구적인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연의 위엄 앞에서 자신이 한낱 작은 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자연스럽게 공원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 오히려 편안하다. (...)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느낌이다. 산책로, 조깅로, 자전거 도로, 승마 도로 등 기능이 다른 여러 길이 얽혀 있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244) 사람의 발길을 붙잡는 정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정원을 만드는 데 꽃만 한 것이 없다. 내가 만들고 싶은 정원은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식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

댓글 책 이야기 2021. 11. 16.

14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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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세상 나이든 사람들은 불쌍한가?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라는 책에서 세 토막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둘째 세째 토막만 옮겨쓰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의미 파악에 지장이 있어서 첫째 토막까지 옮겨놓았는데 첫째 토막은 그 의미가 어렴풋해서 둘째 토막의 맥락이 연결되는 것만으로 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