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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불교사 ⑩ 30본산 제도와 사법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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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1.

⑩ 30본산 제도와 사법의 시행
 
주지 선거제 도입으로 權僧 출현 길 열어
기사등록일 [2006년 10월 16일 13:39 월요일]
 

각 사찰 내규 총독부가 일괄 초안…통치 편의 위해 작성
수평적 사찰 관계 수직구조 변환…전쟁에 佛具 헌납 강요

<사진설명>30본산 연합사무소가 있었던 각황사 전경.

조선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들 선포하고 이 법령에 따라 전국의 사찰 가운데 규모가 큰 30개의 사찰을 본사로 지정하고 주변의 크고 작은 사찰들을 말사로 배속시키는 30본사 체제를 확립하였다.

30본사 체제는 1924년에 전라남도 화엄사가 선암사의 말사에서 본사로 승격됨으로써 31본사가 된다. 30본사 체제의 성립으로 불교계는 30개로 분할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총독부는 중앙에 불교계를 총괄할 수 있는 기관을 두지 않았다. 30본사 주지의 임면을 관할하고, 각 본사의 사법을 개별적으로 인가하는 등 모든 사안을 총독부가 직접 관장함으로써 불교계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사찰령이 시행될 무렵 총독부의 불교정책은 현상유지였다. 총독부가 30본사를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 사사관리서를 설치하고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지정하였을 때 중법산으로 16개의 수사찰을 지정한 바 있다.

1906년 불법을 연구하고 청년 승려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창립된 불교연구회는 운영비를 모으기 위해서 전국 27개 사찰을 지정하여 분담금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이 27개 사찰의 명단은 전하지 않고 7개 사찰만을 알 수 있다. 7개 사찰은 봉선사·봉은사·속리사(법주사)·월정사·통도사·범어사·송광사이다. 사찰령이 시행되기 이전인 1910년 9월 13일부터 16일까지 전국 사찰 주지 330여명이 원흥사에서 종무회를 열고 조선불교 현상 타개와 발전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 때 포교사 양성소를 운영하기 위해서 전국에 29개 대찰(大刹)에서 학생 1명씩을 선발하여 4개월간 교육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종무원 유지비 4천원과 포교사 양성소 운영비 360원을 각 사찰에서 분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쉽게도 이러한 사실을 전하는『매일신보』기사는 29개 대찰이라고만 되어있고 명단은 전하지 않는다. 총독부가 30본사를 정할 때 불교계의 이러한 움직임을 참조하였을 것이지만 사사관리서에서 정한 16개의 중법산 가운데 빠진 사찰도 있고 본·말사의 관계가 뒤바뀐 사례도 있어 구체적인 선정기준은 알 수가 없다.

30본사 제도의 시행은 불교계를 종래 수평적인 관계에서 수직적인 관계로 변화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규모에 따라서 상하관계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30본사 체제하에서 말사는 본사에 귀속되어 모든 사안에 대하여 본사의 지시를 받아야 했고 말사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하여야 했다.

주지 선출 문제도 조선시대까지는 사찰의 모든 승려들이 참가하여 합의 형식으로 추대하는 산중공의제(山中公議制)였다. 사찰령 체제하에서 본사 주지는 그 본사 재적승려와 산내(山內) 말사에 승적을 가진 승려가 참여하는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었다. 얼핏보면 선거제도가 산중공의제 보다 민주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산중공의제는 직접 민주제인 까닭에 주지가 선출되는 과정에서 토론을 거치게 됨으로써 신임 주지 후보에 대한 자격 검증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무기명 비밀 투표는 후보자에 대한 검증 절차가 없고, 단지 선거장의 유세만으로 판단해야 하므로 후유증과 불만이 남을 소지가 많다. 더구나 새로 선출된 본사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관건 개입의 소지가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러하였다. 1937년에 한용운이 쓴 글에 나타난 본사 주지 선거의 모습은 이러하다.

‘조선에 사찰령이라는 특수 법령이 있은 후로 본산 주지는 조선 총독의 말사 주지는 지방 장관의 인가를 받게 되어 있는데 법리상으로만 보면 사찰에서 주지를 선출하여 소관 관청의 인가를 받는 것이므로 하등의 간섭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관청에서는 인가권만 가진 것이 아니라 불인가권도 가지고 있으므로 가령 사찰 주지의 자격으로는 적임자라 할지라도 관청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인가를 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압력이 내재되어 있다. 관청에서 종종 주지의 자격자를 내시(內示)하는 일이 있으며 심하면 행정관 혹은 경찰관을 주지 선거장에 입회시키는 일도 없지 아니하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용운은 본사 주지의 역할이 지대함으로 어떤 승려가 본사 주지가 되느냐에 따라서 그 지방의 불교가 흥할 수도 있고 쇠퇴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본사 주지를 총독부가 장악해야만 불교계를 식민통치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30본사 제도의 시행은 이러한 식민통치의 구도 아래서 시행되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0본사 주지들은 불교계의 여러 사안들을 협의할 수 있는 협의체를 필요로 하였다. 1912년 5월 28일 전원종종무원(前圓宗宗務院) 임시사무소에서 11개 본사 주지들이 회동하였다. 이들은 동년 6월 17일에 30본사 주지회의를 열기로 합의하였다. 이 회의의 안건은 사법과 사찰령시행규칙 준수, 사법을 통일적으로 제정할 것, 원종종무원 문제 해결, 본원(本院) 미래 방침을 정할 것 등 이었다. 이 회의 결과 원종종무원을 해산하고, 종명은 조선시대 선교 양종으로 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30본산 주지들의 회의체로써 30본산주지회의원을 성립시키고 본산 주지들의 회의를 정례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성립하였던 원종종무원은 일제시대에 30본산주지회의원으로 재편되었다. 30본산주지회의원 체제는 1915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제6차 회의를 계기로 30본산연합사무소 체제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30본산 주지들은 총독 관저로 초대되어 총독으로부터 훈시를 들었다. 그리고 30본산주지회의원 회의장에 총독부 내무부장과 지방국장, 일본 불교학자인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 이완용 등이 방문하였다.

이들이 방문한 목적은 이 회의에서 제정될 30본산의 규약인 「조선사찰각본사연합제규」의 내용에 혹시라도 총독부 측에서 불순한 의도로 생각되는 조문이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서 일 것이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것은 「조선사찰각본사연합제규」를 개정할 때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30본산연합사무소의 내규 성격을 가지는 연합제규를 총독의 사전 허가를 얻어야 개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은 30본사 주지들의 의식의 한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은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든 자의든 간에 불교계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관권에 예속되는 길을 택하였다.

총독부는 본사 주지들이 선출된 이후 30본사로 하여금 각기 사법(寺法)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사법의 초안 역시 사찰령을 입안한 총독부 내무국 지방과의 촉탁이 있던 와타나베(渡邊)가 일본 승정(僧政)을 참작하여 식민통치에 편리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30본사는 와타나베의 초안에 따라서 각 본산의 연원과 사승관계(師承關係)만 약간씩 수정하여 사법을 작성하였다. 따라서 사법은 표면상으로 30개였지만 그 내용은 하나였다. 전문 13장 100개조로 된 사법의 내용은 총칙△사격 △주지 △직사(職司) △회계 △재산 △법식(法式) △승규(僧規) △포교 △포상 △징계 △섭중(攝衆) △잡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법 가운데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총칙은 법맥의 연원을 서산(西山) 또는 부휴(浮休)로부터 출발하여 선교 양종을 겸용하고 불법의 실현을 기한다고 규정하였다. 본사 주지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법에 규정된 다음과 같은 사안에서 본사 주지의 권한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본사 주지를 모욕하고 승풍(僧風)을 문란케 한 자 또는 종의(宗義)에 어긋나는 이설(異說)을 주장하고 본사 주지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자, 정치에 관한 담론을 하거나 정치 단체에 가입하여 승려의 본분을 실추한 자 등은 주지의 직권으로 치탈도첩을 시킬 수 있었다. 치탈도법은 승려 신분을 박탈하는 승단(僧團)에서 시행하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사진설명>총독부가 제시한 초안에 따라서 30본사에서 제정한 사법.

법식은 일본 황실의 주요한 기념일 즉 일본의 건국자인 신무천황(神武天皇) 즉위일과 천황의 생일, 천황이 지내는 주요한 제사(祭祀) 등에 법요식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불타의 열반·탄생·성도일과 역대조사의 기일도 법식일로 규정하였다. 눈에 띄는 것은 일본 황실의 기념일이 교조인 불타의 기념일 보다 앞서 명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조보다도 천황이 우선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무기를 제조할 금속이 부족하자 금속류 공출을 시행하였다.

이 때 조선불교계는 범종·요령·촛대 등 많은 불구(佛具)를 헌납하였지만 일본 사찰은 철제로 된 불상까지도 헌납하였다.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야 종교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쟁에 광분한 군국주의 일본이 불교계에 저지른 만행이었고, 전쟁과 살생을 부정하는 불교도들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법 제70조에는 ‘천황폐하성수만세’라는 패를 본존불 앞에 두고 매일 축원할 것을 명시하였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는 1910년대 초반에 총독부는 불교계의 활동을 규정하는 법령들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이로써 불교계는 대한제국이 보장하였던 제한적인 자율성마저도 박탈당하고 사찰령이라는 총독부의 구속을 받는 30본사 체제로 개편되었다. 총독부는 불교계 내부의 자체적인 규약을 만드는 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법령의 시행으로 불교계는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봉쇄당하였고, 강요된 것은 식민통치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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