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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③ 하늘을 달리는 칭장열차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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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8.

[라싸를 가다]③ 하늘을 달리는 칭장열차 下
 
팔만사천번 오체투지하며 수미산이 되다
기사등록일 [2009년 02월 02일 13:09 월요일]
 

양 무릎과 이마, 양 손바닥을 영혼의 품에 내려놓습니다
이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삼독(三毒)이 사라집니다
그러기를 팔만 사천 번, 업장이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티베트 고원을 지나는 비행기에서 티베트 중부지역의 고원을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꼿꼿하게 서 있는 설산들은 마치 팔만사천 부처님을 상징하듯 성스럽고 장엄하다.

-오체투지-

라마라 걉수췌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췔라 걉수췌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겐듈라 걉수췌
(일체 생명의 존귀함에 귀의합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양 무릎과 이마, 양 손바닥을 / 영혼의 품에, 자연의 품에 내려놓습니다

이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삼독(三毒)이 사라집니다 / 영혼은 맑아지고 마음은 수미산(須彌山)이 되어갑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 수미산님(=강kang 린포체님)께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삼독의 그림자가 불꽃처럼 일더니 이윽고 둘이 됩니다 / 찰나의 지체도 없이 번뇌가 일기 전에 다시 엎드립니다

그러기를 팔만 사천 번, 업장이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 수미산님이 팔만 사천 법문을 설하며 빛을 비춥니다

칭장(靑藏) 열차는 티베트의 동북부 시닝(西寧)과 꺼얼무를 거쳐 낙추를 지나고 있다. 40여 시간을 티베트 동북부 고원들을 가로질러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다. 그 동안 지나쳐온 눈 덮인 팔만 사천의 설산들은 마치 팔만 사천의 법문을 설하듯 장엄하고 신이하다. 목적지인 라싸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주 눈에 들어오는 풍경 중 하나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순례자의 모습이다. 100km 이상의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잠깐 바라볼 뿐인데도 순례자의 고행은 몇 분 동안 깊은 감동을 남긴다. 경이롭고도 성스러운 영상이다.

땅에 엎드렸을 때 발끝에서 손끝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세 걸음을 걸은 뒤 양 무릎과 이마, 양 손바닥을 땅에 대는 오체투지, 티베트인들의 그것은 친견하는 사람들에게도 질투와 시기, 욕망 등 불꽃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습성을 지닌 삼독의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영혼의 땅인 라싸와 수미산까지 오로지 오체투지를 하면서 순례하는 그들에게선 편안함과 맑음, 순수하고 장엄한 열정만이 느껴진다.

열차 밖은 영하 10도 이하여서 살을 에인다. 거칠 것 없이 내리 꽂는 햇빛은 직접 볼 때면 눈을 멍하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공기는 희박해서 그냥 서 있기에도 숨이 차다. 그곳의 환경이 오죽 혹독했으면 ‘티베트 고원에선 햇빛에 그대로 노출된 얼굴은 화상을 입고 그늘에 있는 발은 동상을 입는다’는 말이 나왔을까. 척박한 환경에서도 오체투지를 멈추지 않는 순례자들에게 자연은 유일한 도반이다. 바람과 돌과 들꽃과 해님과 달님만이 그들과 함께 할 뿐이다. 그들은 차를 타고 지나거나 순례 길 인근 마을에 사는 티베트인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과 돈을 보시하면서 복덕과 축원을 청할 때 잠시 걸음을 멈춘다. 보는 사람이 있건 없건 그들의 단순하고도 지루한 오체투지는 같은 형태로 끝없이 반복된다.

어느 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가난한 티베트인.

수미산으로 향하는 오체투지 순례, 그것은 목숨을 건 고행의 길이기도 하다. 수백, 수천 km를 가면서도 약간의 옷가지와 방수복, 먹을거리를 담을 수 있는 작은 손수레가 순례자들이 지닌 재산의 전부이다. 그들은 지금 편안하게 열차에 앉아 있는 이방인들에게 티베트인들이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눈의 나라를, 구름의 나라를 그들만이 꿈꾸는 샹그릴라(이상향)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티베트인들이 자연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자연에 어떻게 귀의하는가를, 자연과 어떻게 하나가 되어 가는가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오체투지를 하면 무슨 이득이 따르기에 그토록 목숨을 건 순례에 매달리는가.’
충분히 제기할만한 의문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순례자들이 오체투지를 통해 물질적으로는 얻는 이익은 없다. 오체투지는 이생과 함께 전생 또는 그 전전생(前前生)에 지은 일체의 업장을 하나하나 정화해가는 최상의 방법이며 일체의 생명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자비와 용서의 마음을 증득해 가는 과정이다. 자연은 순례자들에게 때로는 목숨을 내놓으라며 몰아 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표독스럽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이런 험난한 여정은 순례자들의 발원을 더욱 곧고 강하게 담금질한다. 외부의 고통으로 인하여 순례자들이 순례를 포기하거나 멈추는 법은 없다. 순례자들은 세 걸음을 걸으면서 하늘과 땅, 나에게 늘 성스럽고 정직하기를 기원하면서 오체투지를 이어갈 것을 발원하고 다짐한다.

티베트인들의 오체투지 순례는 1000여년 이상을 이어 온 전통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오체투지 순례에 나서는 힘의 원천은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환생’(還生)과 업(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온다. 그들은 인간계로 태어나거나 혹은 축생계로 태어나는 것을 분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로 태어나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환생이란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뿐이며 오체투지를 통해 다음 생에 그 무엇으로 태어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량심(資糧心)을 키울 뿐이다. 다음 생에 더 좋은 집에서 태어나기를, 그 어떤 대가를 바라면서 오체투지에 나서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이번 생에서 지은 업으로 말미암아 다음 생에 야크나 영양, 개미 혹은 그 보다 더 작은 미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생명에 대한 존귀함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티베트인들의 영성이 이렇게 순수하기에 티베트 고원에서 살아가는 새와 사슴, 여우같은 야생동물들은 결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티베트 고원의 동물들 사이에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수백년 동안 쌓였기 때문이리라.

칭장 열차는 잡고 싶은 티베트의 자연들과 영성들을 잠깐 잠깐 보여줄 뿐 기다려 주지 않는다. 속절없이 지나치고 또 지나친다. 지나는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나 맑고 순수해 눈은 자꾸 뒤로 향한다. 이제 두어 시간만 더 가면 목적지인 라싸이다. 라싸가 가까워지면서 야크 목장도 자주 눈에 들어온다. 600kg 가량의 우람한 체구를 자랑하는 야크는 눈을 파헤치면서 다 말라비틀어진 풀뿌리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야크는 우리 전통의 검정소(흑우)가 검은색 사자갈기를 지닌 모습으로 그리면 될 듯하다. 커다란 눈망울은 흑우와 비슷할 정도로 맑지만 멀리서 보면 사나운 괴물처럼 보인다. 그들은 티베트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보배로운 가족이다. 고기와 버터, 버터 램프, 털 옷, 육포를 제공하는 야크들은 티베트인들의 삶과 건강을 위해 존재한다. 동물은 물론 작은 곤충의 생명까지도 자신의 생명으로 여길 만큼 귀히 여기는 티베트인들이 육식을 한다는 것이 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삶의 방편이라고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거슬린다. 그러나 달라이라마가 기억하는 어렸을 적 고향 이야기에서 육식에 관한 이해를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을 듯하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이 태어난 티베트 북동부의 작은 마을인 ‘타크처’에 대해 여느 티베트인들과 같이 대단히 소박하면서도, 가난하지만 행복한 공동체로 기억하고 있다. 중국이 침공하기 직전인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타크처는 원시 농경공동체 사회를 그대로 유지해 왔다. 환경은 혹독하고 삶에 필요한 물질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는 물물교환을 통해 경제 활동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며 윤리와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농경공동체를 이어 왔다. 달라이라마는 육식을 해야만 하는 티베트인들의 식습관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사실 고기를 먹는 습관은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기 이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티베트인들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지요. 그러나 티베트 대부분이 매우 춥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야 했습니다. 다만 죽은 동물의 고기를 팔고 사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도살은 특정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도맡아 했으며 자신들의 삶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을 방생하는 일이 티베트인들의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라싸 근처에 있는 야크 목장.

달라이라마의 기억처럼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죽어가는 야크나 양을 살리기 위해 방생을 자주한다. 더러 구두쇠들이 있기는 하지만 부자는 물론 가난한 이들도 도살을 앞둔 동물들을 사서 방생하는 일을 삼보에 공양을 올리는 공덕 다음의 덕행으로 치고 있다.

잠깐 잠깐 차장 밖으로 스치는 야크의 얼굴을 마냥 생각하다 보니 티베트 고원에 있는 티베트인 목장과 중국인 목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티베트와 중국의 성품을 그대로 일러주는 방생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야기의 줄거리인 즉, 티베트인 목장 주인들은 대개 한 해 결산을 하고 새해가 되거나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야크를 방생한다. 그런데 티베트와 인접해 있는 쓰촨성 등지에서 이주해 와 야크 목장을 하는 중국인들은 티베트인들이 방생한 야크들을 얌체처럼 다시 잡아간다. 모든 중국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티베트의 자연을 마구 파헤치고 개발하고 티베트의 불교를 말살하는 중국의 현재 모습과 겹치니 더욱 쓴웃음만 나온다.

티베트인들은 분명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절대적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숙명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업에 따라 태어났음을 너무나 쉽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경향도 짙다. 가난한 농부가 부유한 지주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지독한 가난에도 그들은 티베트를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중 하나라고 확신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계 유수의 디지털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부유한 행복보다도 더 오래가는 소박하고 가난한 행복들을 자랑한다.

그 옛날 티베트에서는 토지를 가진 지주나 사찰이 소작농을 핍박하거나 고통을 주는 일이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압제하고 노예로 삼아 부역을 하게 하는 일 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중국이 티베트를 침탈하면서 승려와 지주들로부터 티베트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봉건노예제도를 철폐했다고 떠들어 대는 일은 명백한 허구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은 티베트의 민족과 문화, 정신은 물론 삼림 70% 이상을 황폐화시켰으며 나무를 벌목하면서 수많은 동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티베트인들이 수백년 동안 동물들의 마음에 촘촘히 새겨놓은 인간의 자비는 이젠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티베트의 설산과 호수, 야크를 바라보며 마음을 씻어내는데도 참을 수 없는 중국에 대한 증오는 짬도 없이 밀려온다.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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