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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진검승부, 청정도론에서 보는 갈애의 그믈과 위빠사나 통찰지의 검(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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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10. 7. 10.

 

불교와 진검승부, 청정도론에서 보는 갈애의 그믈과 위빠사나 통찰지라는 검()

 

 

 

아시아 국가에서 한류 열풍이 거세다. 그런 열풍은 해당 지역의  TV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오래 전의 드라마가 아직도 방송을 타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기도 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에서도 역시 한국의 드라마는 인기가 높다. 종종 NHK위성방송을 통하여 한국드라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내의 공중파 채널에서 일본드라마를 볼 수 없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가 이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일부 케이블채널이나 인터넷에서는 일본드라마를 볼 수 있다. 일본 드라마를 줄여서 일드라고도 한다.

 

일드 중에 신선조(新選組!)가 있었다. 2004년 제작된 NHK49부작인데, 이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명대사는 무사보다 더 무사다운 무사가 되기 위하여이다.

 

무사보다 더 무사다운 무사가 되기 위하여

 

19세기 중반 에도막부 말기 당시 미국의 흑선의 출현으로 인하여 일본열도는 크게 술렁이었다. 이와 같은 격동의 시대는 가문과 신분에 제약을 받던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도 있었다.

 

드라마 신선조의 주인공인 곤도 이사미(近藤勇, 1834-1868)와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1835-1869)역시 보잘 것 없는 미천한 농민출신들이었다.

 

무사를 중심으로 한 계급 사회에서 농민출신은 출세할 수 없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실력이 좋아도 가문이 없고, 신분이 보잘 것 없다면 위로 올라 갈 수 없는 구조 이었다.

 

그렇다면 미천한 신분의 그들이 격동기에 어떻게 출세할 수 있었을 까. 그것은 다름아닌 실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도장에서 실전에 버금 가는 훈련을 한 것이다. 그래서 진검승부에서 살아 남는 것이다.

 

진검승부를 한다면 누군가 한명은 죽어야 할 것이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먼저 베지 못하면 상대방의 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번의 승부를 위하여 실전에 버금 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가문과 신분이 미천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 한번의 승부에서 살아 남기 위한 피나는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들이 정식 무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사도를 지키며 무사보다 더 무사다운 무사가 되기로 다짐을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그 때 당시 최강의 무사조직인 신선조를 창설 할 수 있었다.

 

 

 

 

新選組!

2004 NHK49부작 OP

 

 

 

신선조의 구성원들은 미천한 신분의 농민출신이거나 신분이 낮은 떠돌이 사무라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단 그 조직에 들어 가면 무사도를 지켜야 했고, 그 어떤 진검승부에서도 살아 남기 위하여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여야 했다.

 

그래서 미천한 신분들이 모여서 만든 신선조가 무사보다 더 무사 다운’ 최강의 무사조직이 된 것이다.

 

불교에서 보는 진검승부

 

드라마신선조의 가장 재미나는 장면은 역시 진검승부장면이다. 진검승부를 하면 실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실력차이가 크면 불과 몇초안에 승부가 나지만, 실력이 비등하면 검과 검이 맞 부딪치는 장면이 오래 지속 된다. 이 때 검이 부러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실력 못지 않게 얼마나 좋은 검을 가지고 있느냐도 살아남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도 진검승부가 있다면 믿기나 할 까.

 

신선조 드라마에서 보는 진검승부는 누군가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 때 쓰는 검은 살인검(殺人劍)’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언급하는 검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活人劍)’인 것이다.

 

검은 어떻게 사용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활인검이란 무엇일까.

 

불교와 검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이다. 그러나 취모검(吹毛劍)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취모검이란 칼날 위에 솜털을 올려놓고 입으로 불면 끊어지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로 고대의 명검을 말한다. 벽암록에 나오는 말이다. 이 취모검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취모검(吹毛劍)인가

 

우리나라 불교는 격동기에 처해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을 믿는 종교도 있어서 다원화 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종교환경에서 최근 남방불교라 일컬어지고 있는 상좌불교가 소개 되고 있다. 그런데 상좌불교는 법의 불교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불자들은 신앙의 불교만 신봉해 왔다. 주로 믿는 불교를말한다. 그러다 보니 수행은 스님네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99.9%에 이르는 재가불자들이 수행을 한다고 하면 으레히 절수행, 다라니독송수행, 사경수행등 대상에 몰입하는 사마타적 수행을 한 것이다.  

 

시절인연이 되었는지 남방에서 공부와 수행을 하고 되돌아 온 수행자들이 수행지도를 하면서 우리 불자들도 법의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법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특징은 교리와 수행이 함께 가는 것이다. 따라서 위빠사나라는 생소한 수행방법과 접하게 되었는데 이제까지의 사마타적 수행방법과 품격이 다른 것이었다.

 

법의 불교인 상좌불교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 하고 있다. 초기불교는 부처님이 직접설한 법문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이런 초기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는 법이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법들을 만나면, 모든 법들이 찰라생 찰라멸 하며 조건에 따라 연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번갯불 보다 재 빠르고 예리한 법을 대면 하는 것을 빗대어 취모검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머리카락을 자를 정도로 예리한 취모검과 법의 분석은 잘 맞아 떨어진다. 마치 취모검으로 모든 법을 자르듯이 법을 분석 한다면 무상, , 무아를 철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수보살의 반야검(般若劍)

 

불교에서 말하는 검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반야검(般若劍)이다. 티벳탕카(Tibet Thangka)를 보면 문수보살이 반야검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검과 불교는 뗄레야 떼어 놀 수 없는 관계인 듯 하다. 그렇다면 문수보살은 왜 반야검을 들고 있을까. 그 검으로 무엇을 베겠다는 것인가.

 

 

 

 

문수보살(Manjushri)의 반야검

티벳탕카에서(Tibet Thangka)

사진 ; http://www.tibetshop.com/mnj252.html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이다. 따라서 문수보살이 들고 있는 검은 지혜의 검이다. 지혜의 검으로 쳐 내야 될 대상은 매우 많을 것이다.

 

가장 먼저 쳐 내야 될 대상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3독일 것이다. 3독을 제거 해야만 번뇌가 소멸 되어 열반의 언덕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혜의 칼, 반야의 검은 도데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 근거를 청정도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청정도론의 서문에서

 

청정도론은 5세기에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스님이 편찬한 4부니까야의 주석서이다. 빠알리삼장에 근거 하여 청정에 이르는 도와 과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수행지침서로서, 남방 상좌불교의 1600년 동안 부동의 준거틀이라 불리우고 있는 보석과도 같은 책이다.

 

청정도론의 서문에 붓다고사 스님이 집필동기를 적어 놓았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S.i.13)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 스님이 인용한 문구는 대부분 초기경전에 근거 한다. 이 게송 역시 초기경전인 상윳따니까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이 게송이야말로 청정도론의 전체적인 내용을 하나의 게송으로 압축하여 잘 표현 하고 있다.

 

위빠사나 통찰지라는 검()

 

이 게송에서 엉킴을 푼다라는 내용이 있다. 엉킴을 푼다는 것은 결국 열반과 해탈을 실혀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엉킴을 풀 수 있을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섯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가르는 것처럼, 계의 땅위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 위에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빳사나 통찰지의 칼을 정진의 힘으로 노력한 깨어 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믈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수어 버릴 것이다.

(청정도론 1, 127페이지)

 

 

위 글에서 몇가지 단어만 빼어 버리면 마치 무사가 진검승부 하는 듯한 모습이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대상이다. 위빠사나의 통찰지의 칼을 들고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대상은 다름아닌 갈애의 그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갈애로부터 시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글은 여러가지 내용을 함축 하고 있다. 그 함축된 의미 중에 여섯가지법은 1), 2), 3)태어나면서부터 가진 통찰지(生而知), 4)위빠사나 통찰지, 5)깨어 있는 통찰지, 6)근면함을 말한다.

 

또 비구에 대하여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라고 표현 하였는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부처님법을 따르는 수행자를 말한다. 

 

이렇게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계라는 땅위에 굳게 서서, 삼매라는 돌위에 칼을 갈았는데, 그 칼은 위빠사나 통찰지라는 검이다.

 

매순간 진검승부가

 

위빠사나의 통찰지라는 검을 두손으로 단단히 움켜 쥐고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 많은 연습과 훈련을 해 왔듯이, 정진의 힘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선법들, 특히 갈애로 인하여 발생 되는 어지러운 그믈들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통쾌한 표현인가.

 

그리고 보면 진검승부가 반드시 무사들의 세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불선법들, 특히 갈애를 대상으로 하여 한판 승부가 매 순간 펼쳐 지고 있음을 경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2010-07-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