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두려울 때 붓다, 담마, 상가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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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10. 12. 23.

 

 

 

두려울 때 붓다, 담마, 상가를 생각하라

 

 

 

시들어 가는 꽃을 보며

 

행운목 꽃이 시들어 간다. 마치 밤송이처럼 작고 동그란 여러개의 꽃들이 다발을 이루어 피고 있었는데,  1주일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꽃의 반은 시들어 있다.

 

꽃이 시들어 가는 모습은 처참하다. 그것도 내 꽃이라고 생각했을 때 더욱 그렇다. 들에 핀 꽃은 시들어 가건 말건 나와 무관하기 때문에 별다른 감정이 일어 나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지만, 내것이 시들어 간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애착이 일어난다. 애지중지 하던 그림이 찢어 졌을 때, 값비싼 도자기가 깨졌을 때 마치 자신에게 큰 상처가 난 것처럼 아까워 한다. 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그 소유물을 잃어버렸다거나 망가졌을 때 아쉬워지고 때로는 분노까지 느끼기도 한다. 그런 감정은 사물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평생모은 돈을 사기 당했다거나, 심지어 투기를 하는데 있어서 기회를 놓쳐서 못 먹은 경우도 내것이라는 강한 집착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집착의 절정은 자신과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군대에 간 사람이 2년 또는 3년을 버티는 힘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자신의 애인을 생각하며 힘든 군대생활을 보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 역시 버팀목은 가족이다. 여우 같은 아내보다 토끼같은 자식을 생각하면 지금 받고 있는 모욕과 수모쯤은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다.

 

세상살기가 힘겹고, 두렵고, 어려움에 처할 때 마다 항상 애인을 그리며, 가족을 떠 올리며 버텨 가지만 항상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 애인도 시간이 지나남에 따라 변심할 수 있고, 자식들 또한 자라감에 따라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마치 꽃이 시간에 지남에 따라 시들듯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웃블로거의 글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존재하는 인간은 매우 나약하다. 그래서 믿을 것이 못 되는 인간 보다 어떤 변치 않는 영원한 대상을 찾게 된다. 그런 대상은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이다.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를 찾는 이유는 영원에 대한 집착의 결과이다. 변화하여 결국 멸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이웃 블로그에서 좋은 내용을 발견하였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관념이 심리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은 자기보호와 자기보존이다. 사람은 자기보호를 위하여 신을 창조하였다. 자기자신의 보호와 안전과 안녕을 위하여 신에게 의존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 아빠에게 의존하듯이. 사람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영원히 사는 不死 '영혼' 또는 아트만의 관념을 품어 왔다.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달래려고 이 두 가지를 갈구한다.

(왈풀라 라훌라 스님의 글에서,  출처:http://blog.daum.net/whoami555/13742024)

 

 

이웃블로거 후박나무님의 글 현응스님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를 읽고라는 글에서 따온 내용이다.

 

인간이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을 만든 이유는 인간의 무지와 두려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보호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듯한 개념의 신을 만들고 거기에 스스로 의지 하였고, 또 자기존재를 위하여 영원히 살고 싶다는 영원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영혼이나 아트만과 같은 불변의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들 신이나 아트만은 실재하지 않고 단지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존의 욕구와 영원에 대한 욕구

 

단지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이 갖는 법에 대한 무지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일 것이다. 법에 대한 무지는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늘 죽을까봐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런 두려움을 해소 하기 위하여 책도 읽고, 잡담도 하고, 음악도 들어 보지만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다. 임시로 그 두려움을 잊고자 하는 노력일 뿐이다.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신을 만들었고, 아트만을 만들었다. 이를 대승경전에서는 어느 정도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고 후박나무님은 글에서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욕망을 긍정하고 충족시켜 주는 방편을 사용하다 보니 초기불교와 정 반대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해탈열반대신에 법신상주’와 ‘실유불성, ‘무상 고 무아대신 상락아정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주관화를 들고 있다. 연기, 무아라는 객관적인 표현이 여래장, 불성과 같이 주관적인 표현으로 바뀐 것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 오고, 이는 힌두이즘의 상주론과 아트만의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교리를 주관화 하였을 때 결과는

 

그렇다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교리를 객관화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이에 대하여 현응스님은 대승불교가 일어날 당시 시대적 상황을 들고 있다. 중생들이 보기에 모든 것은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무아라거나 실재하지 않는 연기의 법칙을 이야기하다 보니 현실성이 떨어져 실재론적 사상들과 대론 하기 위하여 방어적 차원에서 실재론을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교리를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언급한 자기보존 욕망때문이다. 교리를 객관화 하여 실재론적 방편을 사용하여 법신상주’ ‘실유불성’ ‘상락아정과 같은 대승불교의 방편은 잘 먹혀 들어가 놀라울만한 효과를 얻었다 한다.

 

대승불교의 상주론은 인간의 실존의 욕구영원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리의 주관화 작업과 영원에 대한 집착은 결국 상주론을 주장하는 힌두이즘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방편은 결국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결과가 되었다고 학자들은 본다.

 

불교의 존재관은 어떻게 바뀌었나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자연의 이법이다. 따라서 불교의 존재관 역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무상 고 무아에 바탕을 둔다. 이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이다. 그러나 대승운동이 일어나고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되면서 불교의 존재관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져 간다.

 

 

무상,무아,연기 →공(),→가(),→중()→불성,진여,여래장→마음이 부처→만물이 부처

 

 

이렇게 바뀌는 이유는 존재를 보는 방식이다. 존재를 무상 고 무아로 본다면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되지만 후대로 내려 갈수록 용어가 변질 되는 것은 주관화 작업때문이라 한다.

 

중국불교에서는 인도불교의 무상 고 무아 보다 진여, 여래장, 불성 등과 같이 영원한 부처를 표방하였는데 이를 대승이라 하여 상위에 두고, 반면에 전통불교를 소승의 가르침이라 폄하 하였다.

 

인도불교에서 객관적 진리인 무상 고 무아 대신 공사상과 여래장사상으로 주관하여 마음이 부처라는 주관화라는 방편으로 상주론의 힌두이즘과 구별이 없어져 급격하게 밀교화 되고 결국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듯이 중국불교 역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래부처라는 말은 모순

 

중국불교는 인도의 대승불교에서 한 걸음 더 나가 마음이 부처라거나 모든 만물이 부처라는 불성과 법성사상으로 발전한다. 이런 불교의 특징은 주관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본래부처라는 말도 그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런데 본래부처라는 말은 모순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래부처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자주 설명한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이러한 설명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주관적인 표현과 객관적인 표현이 합쳐져서 만들어낸 모순이다.

 

 

본래부처라는 말은 주관적 표현과 객관적 표현이 합쳐서 만들어낸 모순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부처라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한다.

 

 

이 부처라는 주관적인 표현이 ‘본래’ ‘만물’이라는 객관적인 표현과 합쳐지면서 ‘본래부처’ ‘만물이 부처’라는 표현이 되고나면 각각의 단어들이 갖는 다른 입장 때문에 모순적인 문장이 만들어 진다. 그래서 “본래 부처라면 언제 어떻게 번뇌가 일어났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본래부처라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뇌가 일어나는 이유는 말의 모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를 다시 정견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본래 연기무아의 존재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다.

 

 

본래처라는 말 대신 초기불교의 교리대로 연기무아로 표현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본래부처라는 주관적인 용어대신 연기무아라는 객관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본래 연기,무아인데 언제 어떻게 번뇌가 일어났는가?”라는 의문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앉으나 서나 관세음보살”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bbs불교방송에서 경전공부 시간에 어느 스님은 강의 도중 불자들에게 앉으나 서나 관세음보살하고,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하라고 말한다. 이는 실재론에 입각한 방편으로 본다. 이런 방편을 사용하는 이유가 중생들이 연기와 무아의 법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실재론에 입각하여 방편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도불교에서 보았듯이 이와 같은 실재론적 방편은 결국 상주론과 구별이 없어져 불교가 사라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유일신교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앉으나 서나 관세음보살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은 여전히 유효 할까. 또 불교이면서도 부처님이라는 말 대신 불성을 사용하며 불성에 귀의 한다는 방송의 멘트는 정당할까. 과연 이 땅에서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초기불교경전을 한 권으로 만들어 놓은 책을 읽고 있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이다. 그 책에 두려울 때 붓다, 담마, 승가를 생각하라는 제목의 경이 있다.

 

앉으나 서나 부처님(Buddha)

 

상윳따 니까야에 있는 이 경을 보면 두려움, 공포, 전률이 일어날 때 부처님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는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로서의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라고 하였을까.

 

 

부처님은 아라한(應供)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正邊智)이며, 지혜와 덕행을 갖춘 분(明行足)이며, 바른 길로 잘 가신 분(善逝)이며, 세상을 잘 아는 분(世間解)이며, 견줄바가 없는 분이며(無上士),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며, 신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며, 깨달으신 분()이며, 존귀하신 분(世尊)이시다.”라고 외우면 두려움, 전율, 공포가 사라질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11 삭까 상윳따 1:3)

 

 

이렇게 부처님의 덕을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질 것이라 한다.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Anuttaro dhammavara
adesayī        아눗따로 담마와랑 아데새이
Idampi buddhe ratana
paīta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최상의 것을 알고, 주고, 가져오는 분 께서

최상의 담마를 가르쳐 주었네!

붓다는 이 세상 제일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숫따니빠따의 보배경 13번 게송에서)

 

 

 

 

보배경 13번 게송 빠알리어 Imee Ooi(黃慧音)창송

 

 

 

 

 

자나 깨나 담마(Dhamma)

 

그런데 경에서 부처님은 나를 생각할 수 없다면 나의 가르침을 생각하라고 한다. 어떻게 가르침을 생각하는 것일까.

 

 

가르침은 부처님에 의하여 잘 설해져 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직접 볼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고, 지혜로운 이들에 의해 체득된 것이다.”라고 외우면 두려움, 전율, 공포가 사라질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11 삭까 상윳따 1:3)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고, 볼만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Khaya virāga amata paīta               카양 위라-강 아마땅 빠니-
Yadajjhag
ā sakyamunī samāhito,                야닷자가- 사꺄무니- 사마-히또
Na tena dhammena samatthi kiñc
ī               나 떼나 담메나 사맛티 낀찌-
Idampi dhamme ratana
paīta                이담삐 담메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사꺄무니족 성자의 마음집중으로 발견된

갈애의 소멸과 죽음의 극복은

그 무엇과 비교 할 수 없다네!

담마는 이 세상 제일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숫따니빠따의 보배경 4번 게송에서)

 

 

 

공덕의 복밭, 성스런 상가(Sangha)

 

그런데 부처님은 가르침을 생각할 수 없다면 이 번에는 승가를 생각하라고말씀 하신다. 어떻게 승가를 생각 하여야 할까.

 

 

부처님 제자들의 승가는 훌륭한 길을 수행하며, 정직한 길을 수행하며, 진리의 길을 수행하며, 합당한 길을 수행한다. 이러한 부처님의 제자들의 승가는 네쌍으로 여덟가지로 되어 있고 공양받을 만하며, 공경받을 만하며,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의 복밭이다. “라고 외우면 두려움, 전율, 공포가 사라질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11 삭까 상윳따 1:3)

 

 

부처님을 안내자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해탈과 열반에 이르신 성자들은 부처님을 면전에서 보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한 복밭이지 나무나 흙, , 쇠붙이로 만든 복밭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Ye puggalā aṭṭhasata pasatthā                 예 뿍갈라- 앗타사땅 빠삿타-
Catt
āri etāni yugāni honti,                          짯따-리 에따-니 유가-니 혼띠
Te dakkhi
eyyā sugatassa sāvakā               떼 닥키네이야- 수가땃사 사-와까-

Etesu dinnāni mahapphalāni,                      에떼수 딘나-니 마합팔라-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네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이 있어

성자들로 찬양받을 만한 분들,

부처님의 제자로서 공양을 받을 만한 분들,

그들에게 보시하면 큰 공덕을 짓는다네!

상가는 이 세상 제일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숫따니빠따의 보배경 6번 게송에서)

 

 

 

 

 

사진: 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wallpaper_eng.html

 

 

 

부처님과 고속도로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전율, 공포가 일어 났을 때 부처님이나 가르침, 승가를 생각하라는 내용인데, 이는 불자들이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도 유효할 것이라 본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자들이 의지해야 될 대상은 삼보이다. 삼보가 아닌 다른 대상에 의지한다는 것은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라고 볼 수 없다. 삼보에 의지하여 부처님이 깨달은 길로 그냥 가면 되는 것이다. 그 길은 부처님이 이미 닦아 놓은 시속 100키로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다. 이런 좋은 길을 내버려 두고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험한 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을까.

 

 

 

2010-12-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