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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에서 왜 ‘정견(正見)’이 가장 먼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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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11. 7. 12.

 

 

 

팔정도에서 왜 정견(正見)’이 가장 먼저일까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들라면 보통 네 명을 든다. 흔히 사대성인이라라고 불리우는 부처님,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이다. 모두 인류문명의 개화기에 활동하였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언뜻 생각나는 말은 공자의 경우 인의예지신이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예수는 죄를 대속한 것등이 생각난다. 부처님의 경우 대표적으로 팔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왜 성인이라고 부를까.

 

마치 신을 본 것처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인습과 관습 에 따라 사는 경향이 있다.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누군가 성인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따져 보지도 않고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신이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니까 따지지 않고 믿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나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 중 어느 한사람이라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디가니까야:13 떼윗자 경 1-15,19,24,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렇게 부처님이 묻자, 와셋타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재차 브라흐민의 스승들중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마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와셋타는 역시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베다 시구의 저자이며 암송자들인 고대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들은 전승된 그대로 정확하게 그대로의 어조로 암송한다.

(디가니까야:13 떼윗자 경 1-15,19,24,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어느 누구도 신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승된 내용을 그대로 암송하여 마치 신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한다는 것이다.

 

요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창조주나 초월적 존재를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옥이나 천국의 세계와 같은 사후의 세계도 리얼하게단언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성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 성인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따져 보지도 않고 성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려면 성인이 될만한 요소나 조건이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언행이 일치한다든가, 인격이 높은 것등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사대성인들은 모두 요건을 만족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자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가르침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 성인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부처님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여덟가지 바른길이라는 뜻이지만, 더 구체적인 제목은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 한다. 성스러운 여덟가지 도의 길을 말한다. 이는 빠알리어 아리야 아땅기까 막가(Ariya-atthangika-magga)’제목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The Noble eightfold Path라 하여 팔정도는 반드시 성스럽다” “고귀하하다” “숭고하다라는 뜻의 출세간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팔정도는 성인이 되는 길을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경지에 모두 이를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 성인이 되어 궁극적 목표인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길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성인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 Mahāparinibbana Sutta,대반열반경,  D16)에서

 

따라서 팔정도만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는데, 부처님은 팔정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릴 때 뿐만아니라 열반에 들기 바로 전까지도 팔정도가 자신의 가르침의 전부임을 말씀하셨는데, 마하빠리닙바나경( Mahāparinibbana Sutta,대반열반경,  D1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서는 사문들이 텅 비어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  Mahāparinibbana Sutta, 대반열반경,  D16, 각묵스님역)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전문.docx

 

 

 

 

 

 

 

 

팔정도(The Noble eightfold Path)

 

 

 

여기에서 사문은 성자를 말하는데, 첫 번째 사문이 수다원, 두 번째 사문이 사다함, 세 번째 사문이 아나함, 네 번째 사문이 아라한을 뜻한다. 부처님은 경에서 팔지성도가 없으면 세상에 성자가 있을 수 없고, 팔지성도가 있으면 성자가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팔정도를 실천하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팔정도는 어떤 것일까.

 

팔정도는 어떤 것일까

 

팔정도는 가장 중요한 불교윤리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진리이기도 하다. 그런 팔정도는 다음과 같은 표로 알 수 있다.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a-gāmiī-paipadā-ariyasacca)

팔정도(八正道, ariya-aṭṭhagika-magga) = 중도(中道, majjhima-paipadā)

삼학(三學,

ti-sikkhā)

계온(戒蘊,

sīla-kkhandha)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

거짓말하지 않기, 중상모략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잡담하지 않기

바른 행동(正業,

sammā-kammanta)

살생하지 않기,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기, 사음하지 않기,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

그릇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바른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

정온(定蘊,

samādhi-kkhandha)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사정근(四正勤)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 느낌, 마음, 마음대상의 사념처(四念處)

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

혜온(慧蘊,

paññā-kkhandha)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아는 것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kappa)

출리의 사유, 악의없음의 사유, 해치지 않음의 사유

 

출처 :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4번 주해. 김한상역

 

 

표와 같이 팔정도는 사성제에 있어서 도성제에 해당된다. 그런 팔정도는 계정혜삼학으로 나눌 수 있다. , 계에 해당하는 정어, 정업. 정명이 있고, 정에 해당하는 정정진, 정념, 정정이 있다. 마지막으로 혜에 해당하는 정견, 정사유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그 어디에도 종교적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윤리적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대로 실천한다면 모두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팔정도의 순서가 정어부터 되어 있다. 이는 계정혜삼학의 순서에 입각하여 표를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계를 준수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항상 계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정, 그리고 혜로 이어진다. 이처럼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팔정도에서 정견이 왜 가장 먼저일까

 

그런데 부처님이 설한 팔정도의 순서를 보면 정견이 가장 먼저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순서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순이다. 이는 혜계정이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가장 먼저 계를 강조하는 정어, 정업, 정명을 앞에 내세우지 않고 혜에 해당되는 정견을 가장 먼저 말씀 하셨을까.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는 불교TV사이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실 혜에는 두 단계의 지혜가 있습니다. 먼저 지혜는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종의 ‘이해’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본적인 지혜’이고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의 길에서는 지혜가 정점을 이룹니다. 이렇게 지혜의 ‘정상’측면과 ‘시작’측면이 두단계입니다.

(아상가 교수)

 

 

아상가 교수는 정견이 가장 먼저 나온 이유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정견과 사성제

 

만약 어떤 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가졌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정견을 가장 앞에 두었는데, 이는 정견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이 앞에 둘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잘 설명해주고 있다. 팔정도의 정견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 는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45  막가 상윳따8,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정견(바른 견해)에 대하여 명백하게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 부터 불교수행은 시작된다는 말과 같다.

 

불교적 믿음인 삿다(saddha, )

 

부처님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로 가는 도에 대하여 설하였을 때 이를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여 수긍하게 되었을 때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불교적 믿음인데, 이는 맹목적 믿음과 달리 이해하면서 믿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를 불교적 용어로 삿다(saddha, )’라고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후 그 다음 단계로서 계를 지키고, 또 그 다음에 마음집중과 마음을 개발하여 궁극적으로 불교적 지혜를 완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단계는 세 가지 단계가 아니라 네 가지 단계가 될 것이라고 아상가교수는 말한다. 즉 다음과 같이 표로 만들어 볼 수 있다.

 

 

팔정도의 사단계 해석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믿음

Saddha

Sīla

Samādhi

Paññā

바른 믿음

(정견)

바른말과 바른행동

(정어, 정업, 정명)

마음의 개발

(정정진, 정념, 정정)

위빠사나 통찰

(정견, 정사유)

 

 

1단계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이는 이해하며 믿는 것을 말하며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사성제를 이해하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신뢰가 생겨 이 길로 죽 가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리라는 다짐을 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런 바탕하에서 계를 지키며 마음을 개발하고, 지혜를 통찰하게 되는 것이 팔정도의 가르침이라 한다.

 

 

정견이 서지 않으면

 

그런데 불교적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불교는 무아를 주장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을 것 같고, 또 부처님이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는데 과연 진짜 있는 것인지 의심할 수 있다. 또 부처님이 설한 경전일지라도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내용이 있어서 사념처에 관한 경 이외에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도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신반의하거나 의심을 하는 한 결코 앞으로 나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 수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정견을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견이 서지 않으면 불교수행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 수행에서 정견과 관계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팔정도와 계정혜, 어느 것이 우선인가

 

청정도론은 5부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수행지침서로서의 청정도론은 일곱가지 청정을 닦아야 한다고 한다. 그 일곱가지 청정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계청정이다. 다음으로 마음청정이다. 그다음에 다섯가지가 지혜를 닦는 청정에 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의 순서를 보면 철저하게 계정혜순서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팔정도의 혜계정의 순서와 다르다. 이는 계정혜가 팔정도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담마딘나(Dhammadinnā) 비구니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담마딘나의 전남편인 위사카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담마딘나비구니에게 질문하는 과정이 있는데, 거기에서 담마딘니비구니는 팔정도가 삼학에 속한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라고 맞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았을 때 청정도론에서 계정혜의 순서는 올바른 것이라 볼 수 있다.

 

팔정도와 칠청정의 관계를 보면

 

그런데 칠청정중 무려 다섯개에 해당되는 것이 혜와 관련된 것인데, 지혜를 개발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이 바로 견해와 의심에 극복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른 견해가 서 있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 갈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팔정도에서 정견이 가장 먼저 나온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칠청정과 팔정도와 관련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팔정도와 칠청정의 관계

 

칠청정

팔정도

사성제

16단계지혜

 

1

계청정

(sīla visuddhi)

(정어, 정업, 정명)

 

 

 

2

마음청정

(citta visuddhi)

(정정진, 정념, 정정)

 

 

 

3

견청정

(diṭṭhi visuddhi)

믿음

(정견)

고성제

1.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여실견(如實見)

있는 그대로 봄

(Yathā-bhūta-dassana)

4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

(kakhāvitaraa visuddhi)

집성제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여실지(如實智)

있는 그대로의 지혜

(Yathā-bhūta-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정견, 정사유)

도성제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4. 생멸의 지혜

5. 무너짐의 지혜

6. 공포의 지혜

7. 위험의 지혜

8. 역겨움의 지혜

9.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

11.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

12. 수순하는 지혜

 

 

 

13.종성의 지혜

 

7

지와 견의 청정

 

14.도의 지혜

15.과의 지혜

16.회광반조의 지혜

 

 

 

 

위 표를 보면 팔정도에서 왜 정견이 앞에 나와야 되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 정견은 칠청정에서 견청정(3)’의심을 극복함의 청정(4)’임을 알 수 있고, 동시에 고성제와 집성제에 관한 것이고, 또 여실견과 여실지의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아상가 교수는 팔정도의 혜에 대하여 두개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칠청정에서 믿음에 대한 것이 견청정(3)’의심을 극복함의 청정(4)’이라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아상가교수의 강의는 철저하게 청정도론에 바탕을 둔 강의라고 보여진다.

 

있는 그대로의 지혜와 정견

 

그렇다면 청정도론에서 정견에 대하여 어떻게 표현 하였을까. 견청정과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있다라든가 혹은 나라고 거머쥐는 토대가 되는 중생이란 것은 없다. 궁극적인 뜻으로 볼 때 오직 정신-물질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는 자의 봄(, dassana)을 있는 그대로의 봄(athā-bhūta-dassana, 實見)라 한다.

(청정도론, 18장 견청정)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신-물질의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삼세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얻은 지혜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 한다.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dhammatthiti ñāna, 法住智), 있는 그대로의 지혜(Yathā-bhūta-ñāna), 바르게 봄(samma dassana, 정견)이 이것이 동의어이다.

(청정도론, 19 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도를 닦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일이  있는 그대로보는 것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지혜란 오로지 정신과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을 뿐 갈애의 토대가 되는 개념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나 또는 나의 것, 나의 영혼, 중생, 초월적존재, 절대자, 창조주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견해에서 벗어나는 것이 도를 닦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현상을 무상’ ‘’ ‘무아로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청정도론에서 정견이란 조건에 따르는 원인과 결과로 보는 있는 그대로의지혜를 말한다. 다른 말로 연기법이라 한다. 조건지워져 발생되는 연기법은 자연의 근본 법칙이다.

 

또 정견은 팔정도에서 가장 앞서 나오는 것으로서 이는 다름 아닌 사성제를 이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견청정과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은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정견의 등식을 보면

 

사성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믿고 신뢰하는것을 말한다. 그것이 삿다(믿음)이다. 그러고 보면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

 

 

팔정도의 정견=

사성제를 아는 것=

불교적 믿음(saddha)=

견청정의심을 극복함의 청정’=

물질-정신 구분하는 지혜원인-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여실견과 여실지=

연기법=

, 중생, 영혼,초월적 존재, 창조주, 절대자는 없음

 

 

이와 같은 등식을 이해하고 난 후 본격적으로 수행으로 들어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팔정도수행은 항상 정견이 앞에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스스로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팔정도

 

흔히 사대성인이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인류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뛰어난 가르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모두 다르다. 따라서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가톨릭에서 성인이 되는 조건은 기적을 행하거나 순교하는 것이라 한다. 대체로 기독교성인의 특징은 죽은 뒤에 공식적인 평가를 내려 성인칭호를 붙여 준다고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성인은 팔정도로 완성된다. 그리고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완성된다. 그런 성인은 팔정도만 닦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자신을 스스로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 팔정도이다. 그래서일까 서구에서 불교가 유행하고 미래의 대안으로 떠 오르는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고귀한 존재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정견이다. 정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때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사성제를 모르고 불교수행을 한다는 것은 사상누각과 같다는 것이다.

 

또 정견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있느 그대로 보는 지혜를 말하는 데, 이는 나, 나의 것, 중생, 영혼, 초월적 존재, 창조주, 절대자와 같은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실재하지도 않고 동시에 실체도 없는 개념에 빌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을 뿐더로 정견이 서 있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다.

 

 

 

2011-07-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