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눈먼 장님이 장님들을 이끌 듯, 정목스님의 팔정도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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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12. 9. 25.

눈먼 장님이 장님들을 이끌 듯, 정목스님의 팔정도법문

 

 

 

마음으로 듣는 음악

 

지난 일요일 마음으로 듣는 음악을 들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간만 방송되는 이 음악프로는 정목스님이 진행하고 있다. 불교음악을 포함하여, 명상음악, 심지어 타종교음악까지 들려 주는 이 프로의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 프로의 시청자는 불자들 뿐만 아니라 비불자들도 많이 듣는 것 같다. 종종 청취자 사연에서 타종교인의 사연도 들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름청중을 몰고 다니는 스타스님

 

이렇게 인기 있는 음악프로를 듣는 청취자는 매우 많은데, 그에 따라 이 프로를 진행하는 정목스님의 인기 또한 매우 높다. 그래서 소위 라디오 스타스님으로 불리운다. 그런 스타스님을 들라면 성전스님, 월호스님, 정목스님 이렇게 세 분의 스님을 일반적으로 불교방송의 스타스님이라 부른다. 그래서 강연을 하면 구름청중을 몰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정목스님의 경우 불자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아 전국을 무대로 강연회를 거의 매주 열다 시피 하고 있다. 강연에 대한 공지는 마음으로 듣는 음악 프로 시간을 통하여 직접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심지어 법문예고도 방송으로 직접 고지하고 있는데, 마치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에서 광고까지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불자들에게 인기가 있고, 강연과 법문등으로 인하여 영향력도 매우 높은 스님의 방송시간은 청취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 따라 청취자들이 울고 웃고 또 공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은 종종 방송에서 짤막한 법문을 하기도 한다.

 

스님의 목소리는 매우 호소력 있다. 또 또렷하고 분명한 발음을 특징으로 하는 스님의 목소리는 파워가 있다.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으로 받아 들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런 스님의 한마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는데, 비록 짧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강하게 기억에 남게 한다. 이처럼 목소리가 좋은 스님의 입에서 팔정도에 대한 짤막한 법문을 들었다.

 

저건 아닌데~”

 

스님은 방송에서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불성에 대한 이야기, 빛에 대한 이야기 등 주로 대승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자신만의 독톡한 화법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치유의 기도문’이 대표적이다. “~하소서로 끝나는 치유의 기도문에 대한 출처를 알 수 없지만 방송을 듣는 시청자를 위하여 자신이 손수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방송하는 스님이 팔정도 법문을 하였는데, 정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역시 스님의 독특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정견은 다음과 같다.

 

 

이 정견이라는 것은 어느 대상을 볼 때 싫다 좋다 또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좋다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자기 방식의 견해에 따라서 잘못된 길로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이 바른 견해 정견을 가지게 되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완벽하게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목스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불교방송 2012-09-23일자)

 

 

팔정도의 정견에 대하여 ‘어느 대상을 볼 때 싫다 좋다 또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좋다’라고 자기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법문하였다.

 

정견에 대하여 모르는 불자들은 스님의 말에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수긍이 갈지 모른다. 그러나 정견에 대하여 아는 불자들이 들었을 때 분명히 저건 아닌데~” 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음에 틀림 없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正見)이 무엇이냐?”

 

장선우 감독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몇 년 전 여기, 제주에서 불자들의 모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초기불전을 공부하는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正見)이 무엇이냐고….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또는 모두 자신의 견해는 당연히 바른 견해라고 생각하고 안했는지도 모르죠.

 

(장선우 감독,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묻습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묻습니다-장선우.docx

 

 

 

장선우 감독이 영화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에 실패 하고 제주도로 귀양가듯이 지내면서 초기불교를 접하였는데, 초기불교 모임에서 누군가 “정견이 무어냐”고 물었다는 내용이다. 이 질문에 참석한 사람중에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작 한다는 말이 “정견은  바른 견해 아니냐” 정도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자들의 실상이다. 팔정도에 대하여 말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믈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정견이란

 

그렇다면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은 무엇일까.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원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위방가경(분별경-S44.1.1.8).docx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은 한마디로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정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팔정도에 대한 법문은 정형화 되어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사성제와 더불어 팔정도는 매우 생소하다. 이는 스님들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선사들의 법문에서 팔정도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암도스님의 정견

 

우리나라 선사들은 팔정도의 정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까. 일부 스님들의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암도스님의 이야기이다.

 

 

팔정도의 근본이 뭐냐하면 정견입니다. 바른 견해, 견해가 발라야 생각도 바르고 말도 바르고 행동도 바르다, 그래서 정사, 정업 그러거든요.

 

(암도스님, 선승에게 길을 묻다 , 1 암도스님(마하무량사 회주) 불교tv 2011-05-03)

 

 

조계종 원로의원으로서 교육원장 까지 지낸 암도스님은 정견에 대하여 바른견해라고 문자풀이 식 답변을 하였다. 정견이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법륜스님의 정견

 

다음으로 법륜스님의 정견에 대한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가 정견, 바르게 봐라. 바르게 본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라 이말에요. 착각해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법륜스님, 법륜스님에게 듣는 반야심경, 19 사성제, 불교tv 2012-09-25)

 

 

법륜스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견이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법륜스님 역시 초기불교 경전에 근거한 법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불교전통에서 초기불교 경전을 거들 떠 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본래부처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고

 

선사들 중에 심지어 정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가 바로 정견이다. 정견이 그대로 부처의 견해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단 2010-06-25)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docx

 

 

 

도법스님은 본래부처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내가 본래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본래 부처를 찾는 것이 수행이라 한다.

 

선불교 전통을 이어 오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은 본래 부처를 아는 것이 정답이라 본다. 이런 법문을 불교tv에서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우스님도 정견은 본래 부처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본래부처를 찾기 위하여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정견이 중요한가

 

불교에서 정견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바른 견해가 서 있어야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견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으나 선사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정견을 몰랐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불교tv에서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어떤 방향을 수행을 할 것인가는 정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신다면 수행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먼저 정견에 대한 올바른 이해하고, 그에 맞게 단계 단계를 밟으면서 수행을 하면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데,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게 되면 수행이 중구난방이 됩니다.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2 팔정도란 무엇인가?, 불교tv)

 

 

 

올바른 견해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이 중구난방으로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견을 모른채 출발한다면 목적지에 도달하기는커녕 길을 잃고 헤매이기 쉽상이라는 것이다.

 

문자풀이 수준의 법문

 

정목스님이 방송에서 정견에 대하여 사정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팔정도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이어지는 방송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사유는 바른 생각입니다. 정어는 바른 언어, 망어나 기어, 욕설하고 악담하는 것 있죠. 그리고 이사람 한테 이말 하고 저사람한테 저말하며 이간질 하는 양설, 이런 말들은 모두 바르지 못한 말들이지요. 정어는 바른 말, 바른 언어 입니다. 정업, 이것은 바른 행위이지요. 살생하거나 투도하거나 도둑질하거나 삿된 음행을 하는 것, 이것은 바른 행위가 아닌 것이지요.

 

(정목스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불교방송 2012-09-23일자)

 

 

스님은 정사유에 대하여 바른생각이라고 한자어 풀이 수준으로 매우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 갔다. 그렇다면 정사유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출리하는 사유, 악의가 없는 사유, 상해가 없는 사유를 행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정사유에 대하여 출리하는 사유, 악의가 없는 사유, 상해가 없는 사유  이렇게 세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정어, 올바른 언어

 

다음으로 정목스님은 정어에 대하여 양설, 악구등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천수경의 십악참회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빠알리 니까야의 내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빠알리 니까야에서 정어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언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언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정업, 올바른 행위

 

정업에 대해서도 역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빠알리 니까야에 있는 정업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행위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행위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정명이 생활의 질이라고?

 

다음으로 스님은 정명에 대하여 꽤 길게 설명하였다.

 

그다음에 정명입니다. 정명은 바른 생활인데, 바른 직업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물론 정업이 바른 직업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정명은 바른 일상생활인데, 일상생활속에서 수면도 질 높게 할 것, 식사도  질이 높게, 업무도 질이 높게, 운동도 질 높게, 휴식도 질 높게 하는 것이 바로 정명입니다.

 

(정목스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불교방송 2012-09-23일자)

 

 

정명이 바른 생활, 바른 직업을 가지는 것이라는 것은 빠알리니까야와 일치한다. 그런데 정명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생활의 질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삶의 질과 바른 생계, 바른 직업을 갖는 것과는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라 본다.

 

빠알리니까야에 정형구로 표현되어 있는 정명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생활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거룩한 제자가 잘못된 생활을 버리고 올바른 생활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생활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정정진과 관련된 놀라운 발언

 

이어서 스님은 정정진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스님은 정정진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인데, 무엇에 대한 바른 노력인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 육체적, 건강상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고 보시면 되요. 모든 것에 바른 노력을 기울이라는 거죠. 사실 바른 노력을 하려면 정견이 뒤따라야 되는 거죠. 바른 견해가 뒤따라야 올바른 생각도 할 수 있고, 올바른 견해가 뒤따르지 않으면 내 눈에 보이는 바를 다 탓하게 되고 비난부터 하게 되지요.

 

종교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 있지 못하면서 그저 눈에 보이는 보여지는 현상만 가지고 종교인들을 다 싸 잡아서 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거 저거이러면서.

 

사실 본인에게 종교적인 생활을 해 보라면 과연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거거든요. 우리는 타인의 삶을 뭉퉁거려 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뭉퉁거려 매타작을 많이 하잖아요.

 

사실 이런 것은 우리 삶에서 바른 노력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정정진, 타인을 비난하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바로 세우라는 거죠. 이게 바른 노력이거든요.

 

(정목스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불교방송 2012-09-23일자)

 

 

 

스님은 정정진을 바른 노력이라고 해석하면서, 그런 바른 노력이라는 것이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 육체적, 건강상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정진과 관련하여 종교인들을 비방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의 말을 하였다.

 

정정진과 종교인을 비판하는 것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정정진에 대하여 타인을 비난하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발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방송을 통하여 정정진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는커녕 종교인을 비방하지 않는 것을 바른 노력이라 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정정진

 

그렇다면 정정진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정정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정진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생겨나게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하고,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근하고,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만하게 하여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하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정진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정목스님이 말한 것과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정정진이라는 것의 골자는 선법과 불선법을 구분하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 것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생겨나게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함

불선법을 억제 하기 위하여 노력함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함

일어난 불선법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함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근함

선법을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함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만하게 하여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

일어난 선법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노력함

 

 

 

부처님은 네 가지의 경우의 수를 들었다. 선법과 불선법,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선법이면 취하고, 불선법이면 버리는 것이 올바른 정진이라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종교인들에 대하여 싸 잡아서 비방하는 행위에 대하여 지적하며 이를 바른노력과 연계하여 설명하였다. 과연 방송을 듣는 이들은 스님이 말한 정정진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 하였을까.

 

정념이 무너지면 세상자체가 다 미쳐버립니다

 

이어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지막이 정념입니다. 바른 의식상태이에요. 정신을 온전히 가지라는 겁니다. 이 바른 정신상태를 가지지 못하게 될 때는 거의 세상이 미친듯이 돌아가지요. 정념이 무너지면 세상자체가 다 미쳐버립니다. 이상과 목적을 지혜롭게 가지런히 가지라 하는 것이 바로 정념입니다.  바른 의식을 지니도록 하라.

 

(정목스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불교방송 2012-09-23일자)

 

 

스님은 마지막이 정념이라고 하였다. 정정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념이 마지막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스님이 말한 정념에 대한 정의를 보면 바른 의식상태라 한다. 그리고 정신을 온전히 가지는 것이 정념이라 한다. 또 이상과 목적을 지혜롭게 가지는 것이 정념이라 한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설명하며 정념이 무너지면 세상이 다 미쳐 버릴 것이라 한다.

 

스님은 왜 사념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부처님은 정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새김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대하여 몸의 관찰을 행하고,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감수에 관해 감수의 관찰을 행하고,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대하여 마음의 관찰을 행하고,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법에 대하여 법의 관찰을 행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새김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올바로 알아차릴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 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관찰, 느낌()의 관찰, 마음()의 관찰, ()의 관찰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를 사념처라 한다. ---법 네 가지에 대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정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사념처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스님은 왜 사념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을까. 사념처에 대하여 몰라서 못한것일까. 알면서도 안한 것일까.

 

왜 정정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을까

 

팔정도의 마지막 항목이 정정이다. 그러나 스님은 이를 생략하였다.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랫는지 알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집중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인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홀로 명상하며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과 무사유와 무숙고와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희열이 사라진 뒤 평정하고 주의 깊고 세삼하게 육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주의 깊고 행복하다' 고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불쾌를 없애고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주의 깊은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집중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정정은 삼매에 대한 것으로 네가지 선정의 단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가 사유숙고인데 이를 초선이라 한다. 두번째가 희열을 특징으로 하는 이선정, 세번째가 행복을 특징으로 하는 삼선정, 네번째가 평온을 특징으로 하는 사선정단계이다. 이렇게 네 가지 단계에 대하여 정정, 올바른 집중이라 하였다.

 

메뉴얼대로 살라 하는데

 

스님은 팔정도 설명을 마무리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여덟가지의 바른 길 팔정도가 불교에서 삶의 원리를 이야기 한 것이고요, 살아가는 삶의 방식, 바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메뉴얼이에요. 이 방식대로 살아 가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저부터 라도 부처님이 일러 주신 이 매뉴얼대로 살고 있는지를 자문해 봐야 됩니다. 그냥 매뉴얼 대로 가면 되는데, 내 방식대로 가는 거에요. 

 

(정목스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불교방송 2012-09-23일자)

 

 

스님은 매뉴얼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팔정도는 매뉴얼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달리 해석하면 안된다고 강조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가지 말자고 한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 보인다. 스님은 팔정도 법문을 하는데 있어서 경전대로, 매뉴얼 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대로 이야기 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견해를 법문이라고

 

불자들은 매뉴얼대로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경전에 쓰여 있는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1. 1. 5. 1)”라고 하였다.

 

그런데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매뉴얼 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 매뉴얼과 관계 없는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전국의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법문한 것이다.

 

방송의 사유화와 권력화

스님의 방송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다. 방송이 시작된 지난 2004년부터 지금까지 틈틈이 듣고 있는데, 갈수록 권력화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방송을 통하여 청취자 사연을 들려 주면서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들려 주는 가 하면, 혹시라도 자신을 비판하는 글이 있다면 방송에서 종교인을 비방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방송을 통하여 개인적인 강연일정이나 법회일정을 광고하기도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방송이 한 개인에 의하여 사유화 되고 또 권력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어느 방송에서도 자화자찬식 또는 개인일정에 대한 광고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독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에서만큼은 예외인 것 같다.

 

한국불교의 수치인가 직무유기인가

 

이와 같은 방송권력을 통하여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전달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표출한다는데 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팔정도 법문 같은 것이다.

 

스님은 팔정도 법문을 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면으로 보았을 때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였다. 특히 정견에 대하여 사성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정정진이나 정념에 대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정정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님은 팔정도에 대하여 몰랐기 때문에 설명을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설명을 못해 준것일까. 만일 팔정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모른 채 법문을 하였다면 이는 한국불교의 수치라 본다. 반면 알면서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눈먼 장님이 장님들을 이끌 듯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thāpi nāma jaccandho,        야타삐 나마 잣짠도

naro apariāyako;              나로 아빠리나야꼬

Ekadā yāti maggena,             에까다 야띠 막게나

ummaggenāpi ekadā.              움막게나삐 에까다

Sasāre sasara bālo,        삼사레 삼사람 발로

tathā apariāyako;              따타 아빠리나야꼬

Karoti ekadā puñña          까로띠 에까다 뿐냥

apuññamapi ekadā.               아뿐냐마삐 에까다

Yadā ca ñatvā so dhamma,      야다 짜 나뜨와 소 담망

saccāni abhisamessati;          삿짜니 아비사멧사띠

Tadā avijjūpasamā,              따다 아윗주빠사마

upasanto carissatī ti.          우빠산또 짜릿사띠 띠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바른길로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듯

 

윤회에 돌고 도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어떤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법을 알고서 진리들을 관찰할 때

무명은 가라앉고 고요하게 다닐 것이다.

 

(청정도론 제17 119, 대림스님역)

 

 

 

 

 

눈먼자들 도시 (2008)

 

 

 

앞 못 보는 장님들의 행렬이 있다. 맨 앞에 선 사람도, 중간에 선 사람도, 맨 뒤에 선 사람도 그 누구도 아무것도 본 적이 없다. 그런 장님 행렬을 이끌고 있는 사람 역시 장님으로서 아무것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바른 길로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부처님의 매뉴얼 대로 살아가지 않은 불자들은 장님과도 같다. 더구나 불자를 이끌어 가는 스님이 매뉴얼 대로 경전의 가르침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견해대로 이끈다면 눈먼 장님이 장님들을 이끄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2012-09-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