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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ehipassika)” 토론의 달인 붓다(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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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12. 11. 22.

 

 

와서 보라(ehipassika)” 토론의 달인 붓다(Buddha)

 

 

 

 

단일화 TV 토론을 보았는데

 

야권후보 단일화 TV 토론을 보았다. 늦은 시간에 이루어진 토론에서 예상한 대로 이었다. 그 동안 인터넷뉴스사이트에서 각 후보의 토론을 죽 지켜 보았는데, 이날 토론에서도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일대일 양자토론을 보면 역량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말 몇 마디, 표정 하나만 보아도 승패를 알 수 있다. 더구나 토론이 진행되면 될수록 격차는 커진다. 그런 토론을 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매스컴의 기사를 보면 중립적인 보도가 대부분이다.

 

TV토론이 없었다면 후보자의 역량에 대하여 매스컴의 기사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해관계로 뭉쳐진 집단에서 이미지조작, 여론조작이나 왜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 토론사이트의 기사나 댓글을 보면 더욱 더 심하다.  

 

토론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많이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는 물론 사회전반에 대하여 두루두루 상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설득 시킬 수 있는 개인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얼굴표정, 말하는 태도, 몸짓 등 토론을 함으로써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마스크까지 준수하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공감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진정한 대통령감일 것이다.

 

부처님은 토론의 달인

 

TV토론을 지켜 보면서 토론을 잘 해야 국민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고 공감 할 수 있음을 느꼈다. 한마디로 토론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그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초기경을 보면 부처님은 토론의 대가이자 토론의 달인 이었다. 빠알리니까야에서  수 천개에 달하는 경을 보면, 부처님은 제자들을 포함하여 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심지어 범천, 천인, 마라들과도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또 부처님과 견해를 달리 하는 이교도와 사상가와 대화도 있다.  

 

이렇게 부처님이 다양한 존재들과 대화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토론을 통하여 가르침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특히 견해가 다른 이들을 토론으로 제압하였다. 그런 대상 중에 마라(Māra)가 있다.

 

악마여, 그대가 패했네

 

빠알리니까야에 등장하는 마라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부처님 반대편에 서 있다. 우리말로 악마라고 불리우는 빠삐만(Papiman)이 대표적이다. 그런 빠삐만은 부처님과의 대화에서 항상 대조적인 견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우루벨라 마을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아자빨라 보리수 아래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그 한적한 곳에서 홀로 고요히 명상하는데 마음에 이와 같이 ‘참으로 나는 고행에서 벗어났다. 참으로 내가 그 이로움이 없는 고행에서 벗어난 것은 훌륭한 일이다. 내가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어 깨달음을 이룬 것은 훌륭한 일이다.’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 올랐다.

 

마침 악마 빠삐만이 세존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채고는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시로 말했다.

 

[빠삐만] “젊은 학인들은 청정함으로 이끄는

고행의 실천을 버리고

청정한 삶의 길에서 빗나가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 여기네.”

 

그때 세존께서는 ‘이것은 악마 빠삐만이다’라고 알아채고 악마 빠삐만에게 이와 같이 시로 대답하셨다.

 

[세존] “불사(不死)를 위한

어떠한 고행도 소용이 없고

마른 땅위에 배의 노나 키처럼

모든 고행이 쓸모없음을 아니,

 

계행과 삼매와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닦아서

나는 위없는 청정한 삶에 이르렀으니,

악마여, 그대가 패했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

 

(따빠깜마경-Tapokammasutta-고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1-1), 전재성님역)

 

 

부처님과 악마 빠삐만이 고행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항상 부처님의 반대편에 서서 다른 입장을 보여 주는 빠삐만이 고행을 포기하는 것은 청정함을 포기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행을 위한 고행이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 마치 땅 위에 있는 배의 키와 같은 것처럼 고행 그 자체를 위한 고행은 쓸모가 없음을 말한다. 대신 계--혜 삼학을 닦아서 청정을 이루었음을 말한다.

 

알면 사라진다

 

부처님이 악마가 패했음을 선언하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악마 빠삐만은 왜 이와 같은 말을 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악마 빠삐만은 다른 종교에서와 달리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내서 깨달음의 길을 분명히 하는데 사용된다. 철학적으로 악마는 번뇌, 업의 형성력, 존재의 다발(오온)등을 상징한다. 악마 마라는 자재천(Vasavatti)으로 하늘아들 다마리까(Damarika)라 불리며, 타화자재천에 살면서 수행자들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를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다. 악마는 제석천처럼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가 거느린 군대를 마군(maracena)’라 한다.

 

마라가 일반적으로 악마를 뜻하지만, 천인으로서의 마라도 있고, 열반과 반대 되는 세간적 존재로서 마라도 있다. 후대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마라를 들고 있다.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가지 마라가 있는데, 경에 따르면 자신을 잘 아는 존재에 대하여 매우 두려워 한다. 그래서 알기만 하면 사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치 빈방에 불을 켰을 때 일시에 환해 지듯이 귀신으로서의 마라, 번뇌로서의 마라, 무명으로서의 마라, 업으로서의 마라, 죽음으로서의 마라는 그 실체를 아는 순간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몰랐을 때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지만 알고 나면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마라는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을 매우 두려워 한다. 그래서 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과 함께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알면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는 유행자 왓차곳따(Vacchagotta)

 

이와 같이 부처님은 악마와의 토론에서 악마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어 떠나게 만들었다. 토론의 달인 부처님은 이교도와의 토론에서도 상대방을 굴복 시킨다. 이교도이자 유행자인 왓차곳따와의 대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밧차곳따]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수행승이 그와 같이 마음이 해탈했다면, 사후에 어디에 태어납니까?’라고 물어도, 그대는 ‘밧차여,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존자 고따마여,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도, ‘밧차여,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존자 고따마여,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어도, ‘밧차여,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존자 고따마여,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입니까?’라고 물어도, ‘밧차여,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이러한 것 때문에 저는 의혹에 떨어졌고, 이러한 것 때문에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전에는 존자 고따마와 대화하면서 제가 얻은 신뢰의 척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유행자 왓차곳따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고 있다.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부처님은 사변적 견해는 정글이고 견해의 왜곡으로서 고통을 수반하여 번뇌만 증장 시킬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말한다.

 

법은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왓차곳따는 만족을 하지 못하였는지 부처님에게 신뢰가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불만을 토로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밧차여,

그러한 말들이 그대를 의혹에 떨어지게 하고, 그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밧차여, 이 가르침은 깊고, 심오하여,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와 같이 다른 견해를 갖고, 다른 가르침을 수용하고, 다른 경향을 가지고, 다른 수행을 하고, 다른 스승을 따르는 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밧차여, 내가 다시 그것에 관하여 거꾸로 묻겠습니다. 밧차여, 이해하는 대로 설명하십시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다른 견해를 가진 외도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설법하는 것은 피곤한 일일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불의 비유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문답식으로 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세존]

“밧차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면, 그대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른다.’라고 아십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타오르면, 나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른다.’라고 압니다.”

 

[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존자 고따마여, 나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풀과 섶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밧차여, 그대는 ‘내 앞에서 불이 꺼진다.’라고 압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꺼진다면, 존자 고따마여, 나는 ‘내 앞에서 불이 꺼진다.’라고 압니다.”

 

[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 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이나 북쪽의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 불은 풀과 섶의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린다고 여겨집니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불의 비유를 들면서 문답과 토론식으로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다. 불이 타오르는 것은 풀과 섶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타오르는 것이고, 꺼지는 것은 땔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불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라한의 사후문제

 

이어서 부처님은 오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세존]

밧차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물질로써 여래를 묘사하려고 하지만, 여래는 그 물질을 버렸습니다. 여래는 물질의 뿌리를 끊고, 밑둥치가 잘려진 야자수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밧차여,

참으로 여래는 물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어 마치 커다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오온에서 물질의 예를 들어 번뇌 다한 아라한의 사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이 불의 비유와 오온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을까. 이는 외도 왓차곳따가 번뇌 다한 아라한의 사후에 대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적 관점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경계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목숨 바쳐

 

이렇게 부처님은 대화와 토론으로서 상대방의 잘못된 견해를 논파 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나면 경에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밧차곳따]

 “세존이신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 있는 자에게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서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Aggi-Vacchagotta Sutta: To Vacchagotta on Fire

 

 

 

이것이 토론의 힘이다. 대화를 통한 문답식 화법으로 이교도를 굴복 시킨것이다. 그 결과 이교도는 삼보에 귀의 하였고 이는 개종을 말한다. 더구나 목숨 바쳐 귀의하겠다고 하였다.

 

와서 보라(ehipassika)”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통령 후보자를 만나거나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다만 언론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후보자의 이미지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TV토론을 통하여 후보자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표정과 말 하는 모습으로 파악 할 수 있다. 더구나 상대방과 일대일 토론을 하였을 경우 역량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제서야  유권자들은 언론의 이미지 작업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와서 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을 접해 왔다. 그래서 부처님이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 줄 것처럼 유일신교와 다름 없는 기복에 매달려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경을 접하다 보면 인간적인 부처님을 접하게 되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ti.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현실적인 가르침이라 한다. 그래서 현세의 삶에 유익한 (sandiṭṭhika)’가르침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간을 초월한 것(akālika)’이라 하였다. 이는 성스런 삶의 길을 실천하는 결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즉시 효과가 있고 또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와서 보라(ehipassika)’라는 말은 명백하게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숨길만한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주먹을 꽉 움켜 쥐고서 결코 주먹을 펴지 않는 스승의 주먹(師拳)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opanayika)이라 한다.  이는 목표인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2012-11-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