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다, 티끌 없는 자와 법구경 말라왁가(Malavag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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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13. 2. 2.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다, 티끌 없는 자와 법구경 말라왁가(Malavagga)

 

 

 

불교에서 가장 작은 것을 뜻 하는 말이 여럿 있다. 그 중에 띠끌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 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S20:2)”라고 아주 큰 것과 비교하여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흙먼지(pasu)는 띠끌(mala)과 같다.

 

노잣돈이 없을 때

 

초기경에서 띠끌은 작고, 하찮고, 저열한 의미로 쓰여 진다. 그리고 더럽고 부정한 뜻으로도 쓰여진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번역은 전재성님의 법구경-담바파다를 참고 하였다.

 

 

1.

Paṇḍupalāso va dānisi,
Yamapuris
ā pi ca ta upaṭṭhitā,
Uyyogamukhe ca ti
ṭṭhasi,
P
ātheyyam-pi ca te na vijjati.

 

이제 그대야말로 낙엽과도 같다.

염라왕의 사자들이 그대 가까이에 있고

그대는 떠남의 문턱에 서 있으니,

그대에게는 노잣돈 조차도 없구나.(Dhp235)

 

2.

So karohi dīpam-attano,
Khippa
vāyama paṇḍito bhava,
Niddhantamalo ana
gao,
Dibba
ariyabhūmim-ehisi.

 

그대는 자신을 섬으로 만들어라.

서둘러 정진하여 현명한 님이 되라.

띠끌은 날려버리고 허물을 여의면,

그대는 천상계의 고귀한 곳에 이르리.(Dhp236)

 

 

법구경 열여덟번째 품인 말라왁가(Malavagga)에 나오는 게송이다. 우리말로 ‘띠끌의 품’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살만치 살아서 임종을 앞에 둔 노인에게 주는 격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고 지은 업대로 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밧데까랏따경(M131)에서는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오늘 잘 살다가도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그런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첫 번째 게송에서는 “노잣돈 조차도 없구나”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노잣돈(Pātheyyam)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선업공덕을 지어 놓는 것이 노잣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업공덕을 쌓아 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게송에서는 자신을 섬으로 만들라고 하였다. 이는 노잣돈하고 대비되는 문구이다. 게송에서 말하는 섬(dīpa)섬이 바다에서 난파된 배의 피난처 역할을 하듯이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피난처로 만들라는 뜻이다. 다름 아닌 열반을 뜻한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을 때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이다.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열반을 성취하여 죽었을 때 고귀한 곳에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정거천을 말한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바로 저 세상에

 

대책 없이 한평생 되는 대로 살다가 임종을 맞았을 때 어떻게 될까. 반면 주어진 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자의 삶은 어떤 것일까. 서로 대조 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3.

Upanītavayo ca dānisi,
Sampay
ātosi Yamassa santike,

Vāso pi ca te natthi antarā,
P
ātheyyam-pi ca te na vijjati.

 

이제 그대는 나이가 기울었고

염라왕의 앞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머물 곳이 없고

그대에게는 노잣돈 조차도 없다. (Dhp237)

 

4.

So karohi dīpam-attano,
Khippa
vāyama paṇḍito bhava,
Niddhantamalo ana
gao,
Na puna j
ātijara upehisi.

 

그대는 자신을 섬으로 만들어라.

서둘러 정진하여 현명한 님이 되라.

띠끌을 날려버리고 허물이 없으면,

태어남과 늙음에 다시 떨어지지 않으리. (Dhp238)

 

 

나이가 기울었다는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살만큼 살았고 노령에 이르렀고 고령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런데 죽었을 때 도중에 머물곳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사람들은 인생길을 걸어 간다. 힘들면 도중에 쉬어 가기도 하고, 바쁘면 달려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바로 저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중에 머물곳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더구나 선업공덕이라는 노잣돈 마저 마련해 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초기경에 따르면 불행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악처에 태어 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띠끌을 날려 버렸을 때, 즉 오염원을 소멸시켰을 때 생사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한다. 이전의 게송에서 돌아 오지 않은 길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라면, 이번 게송에서는 거룩한 길에 대해서 노래한 것이다. 이번 생에서 열반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을 말한다.

 

내 버려 두었을 때

 

다음으로 띠끌, 즉 오염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게송이다.

 

 

5.

Anupubbena medhāvī

thokathoka khae khae,
Kamm
āro rajatasseva

niddhame malam-attano.

 

현명한 자라면 점차로

순간 순간 조금씩 조금씩

대장장이가 녹을 없애듯,

자신의 티끌을 없애야 하리. (Dhp239)

 

6.

Ayasā va mala samuṭṭhita,
Tadu
ṭṭhāya tam-eva khādati,

Eva atidhonacārina

Sakakammāni nayanti duggati.

 

쇠로부터 생겨난 녹은

자신에게서 나와 자신을 삼킨다.

이와 같이 죄 많은 자를

스스로 지은 업이 악한 곳으로 이끈다. (Dhp240)

 

 

대장장이는 쇠붙이를 다룬다. 따라서 녹이 생겨날 수 없다. 그래서 현자를 대장장이에 비유하였다. 만일 쇠붙이를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벌겋게 녹이 슬게 될 것이다. 녹이 너무 슬어 버리면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이 몸과 마음을 내 버려 둔다면 결국 악처로 이끌게 될 것이라 한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다음으로 띠끌의 예를 여러가지로 든 게송이다.

 

 

7.

Asajjhāyamalā mantā,

anuṭṭhānamalā gharā,
Mala
vaṇṇassa kosajja,

pamādo rakkhato mala.

 

경구는 외우지 않음이 티끌이요

집은 보살피지 않음이 티끌이다.

용모는 가꾸지 않음이 띠끌이고

수호자에게는 방일이 띠끌이다. (Dhp241)

 

8.

Malitthiyā duccarita,

macchera dadato mala,
Mal
ā ve pāpakā dhammā

asmi loke paramhi ca.

 

정숙하지 않음은 여인의 티끌이고

인색한 것은 보시자의 티끌이다.

그리고 악한 것들이야말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티끌이다. (Dhp242)

 

9.

Tato malā malatara,

avijjā parama mala,
Eta
mala pahatvāna

nimmalā hotha bhikkhavo.

 

그 모든 티끌 보다 더욱 더러운 것,

최악의 티끌은 무명이다.

이러한 티끌을 버리고

수행승들이여, 티끌을 여의어라. (Dhp243)

 

 

일곱 번째 게송은 마치 엔트로피(Entropy)법칙을 보는 것 같다. 내버려 두었을 때 질서에서 무질서로이동하는 것이 자연의 속성이다. 그래서 회사를 관리하지 않으면 부도가 나게 되어 있고,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문제아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구역을 보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지럽혀진다. 아무도 손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경을 외우지 않으면 잊어 버리게 되고, 용모도 가꾸지 않으면 추해 보인다. 수행자가 게으름을 피면 탐진치만 치성하게 될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쫒아 내는 이유는 정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여인은 친정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다. 가문의 골칫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숙하지 않은 것이 여인의 띠끌이라 하였다.

 

보시자의 티끌은 인색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 이 다음에 돈 벌면 왕창 보시 하겠다’는 심보와 같은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을 하여 스스로 보시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만한 티끌이 없다. 이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띠끌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무명(avijjā)’이다. 그래서 ‘그 모든 티끌 보다 더 더러운 것 (Tato malā malatara)’이라고 하였다. 그런 무명은 어떤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하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라 한다.

 

뻔뻔하고 파렴치한 자

 

그렇다면 띠끌을 없애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염된 삶과 띠끌 없는 삶의 방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0.

Sujīva ahirikena

kākasūrena dhasinā,
Pakkhandin
ā pagabbhena,

sakiliṭṭhena jīvita.

 

부끄러움을 모르고

까마귀처럼 교활하고 무례하고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오염된 삶을 사는 것은 쉽다. (Dhp244)

 

 

11.

Hirimatā ca dujjīva,

nicca sucigavesinā,
Al
īnenāpagabbhena,

suddhājīvena passatā.

 

항상 부끄러움을 알고

청정을 찾고 집착을 여의고

겸손하고 식견을 갖추고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어렵다. (Dhp245)

 

 

오염된 삶과 청정한 삶에 대한 것이다. 오염된 삶을 사는 자들은 쉽게 사는 것이라 한다. 이는 본능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뻔뻔하고 파렴치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까마귀의 예를 들었는데 이는 무슨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비구가 탁발을 나갔을 때 아낌 없이 배푸는 집을 기억해 놓는다고 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나는 할일이 있다라고 말하며 마을로 가서 아침에 기억해 둔 집을 찾아 가는 것이다. 집주인은 내키지 않지만 공양을 하게 된다.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쉽게 살려고 하는 자를 까마귀와 같이 교활한 자라 한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어떤 자일까. 각주에 따르면 고난을 통해서 삶을 사는 자라 한다. 정당하지 않은 물질에 대해서는 배설물 보듯이 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삶의 이득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자를 청정한 삶을 사는 것(suddhājīvena)’을 말하는데, 이는 거친 삶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고된 노동과 음주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의 게송을 보면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기본덕목이다. 

 

 

12.

Yo pāam-atipāteti,

musāvādañ-ca bhāsati,
Loke adinna
ādiyati,

paradārañ-ca gacchati,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거짓말을 말하고

세상에서 주지 않는 것을 취하고

남의 아내를 범하는 것. (Dhp246)

 

 

13.

Surāmerayapānañ-ca

yo naro anuyuñjati,

Idheva peso lokasmi

mūla khaati attano.

 

곡주나 과일주 등에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를 파낸다. (Dhp247)

 

 

14.

Evam-bho purisa jānāhi

pāpadhammā asaññatā.
M
ā ta lobho adhammo ca

cira dukkhāya randhayu.

 

사랑스런 벗이여, 이와 같이 알라.

악한 원리는 난폭하다.

탐욕과 부정이 그대를 오랜 세월

고통으로 괴롭히게 하지 말라. (Dhp248)

 

 

오계에 대한 것이다. 특히 불음주계에 대하여 하나의 게송으로 표현 하였다. 곡주, 과일주 등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자는 자신의 뿌리를 파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말은 무슨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저 세상은 고사하고, 이 세상에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을 성립시키는 뿌리를-, 밭이나 토지 등을-농사에 이용하지 않고 파괴하거나, 그것을 이용하여 술을 마시면서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한 자는 의지할 데가 없이 파멸한다.’라고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술을 마시면 파멸하게 되어 있음을 말한다.

 

수행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재가자의 경우 노동으로 인하여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때로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탄광 막장에서 석탄가루를 마셔 가며 곡괭이질을 한 광부가 있다. 일을 끝내고 동료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는 장면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신성한 노동의 대가에 대한 보상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고된 노동에 따른 보상차원에서 음주하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다만 적절하게 마셔야 할 것이다.

 

갈애의 강

 

다음으로 보시와 공양에 대한 것이다.

 

 

15.

Dadāti ve yathāsaddha

yathāpasādana jano,
Tattha ve ma
ku yo hoti ~ paresa pānabhojane
Na so div
ā vā ratti vā ~ samādhi adhigacchati.

 

사람은 믿음에 따라 보시하고

기쁨에 따라 보시한다.

다른 사람에게 얻은 마실 것과 먹을 것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밤이나 낮이나 삼매를 얻지 못한다. (Dhp249)

 

 

16.

Yassa ceta samucchinna

mūlaghacca samūhata,
Sa ve div
ā vā ratti vā

samādhi adhigacchati.

 

그러나 이것이 제거되고

뿌리째 뽑히고 폐기된 님,

그는 밤이나 낮이나

참으로 삼매를 얻는다. (Dhp250)

 

17.

Natthi rāgasamo aggi,

natthi dosasamo gaho,
Natthi mohasama
jāla,

natthi tahāsamā nadī.

 

탐욕과 같은 불이 없고

성냄에 견줄 포획자가 없다.

어리석음과 같은 그물이 없고

갈애에 견줄 강이 없다. (Dhp251)

 

 

우리나라에는 탁발의 전통이 없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탁발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믿음으로 보시하고 기쁨으로 보시한 재가자의 공양이 ‘내가 얻은 것은 조금이고 거친것이다.’라고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음식에 대하여 탐착하는 자는 삼매(samādhi)를 얻지 못할 것이라 한다. 이는 도(magga)와 과(phala)를 얻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도와 과를 얻지 못하는 자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탐욕을 불로, 성냄을 포획자로, 어리석음을 그물로 묘사하였다. 그런 탐진치의 근원은 결국 갈애(tahā)라는 것이다. 이를 갈애의 강으로 묘사하였다. 갈애의 강이란 갈수기와 풍수기와 관계없이 항상 불만족 상태로서 채워지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건전한 비판은 권장되고 장려 되어야

 

띠끌이 있는 자는 많은 허물이 있다. 다음과 같이 헐 뜯는 자이다.

 

 

18.

Sudassa vajjam-aññesa,

attano pana duddasa,
Paresa
hi so vajjāni

opuāti yathā bhusa,
Attano pana ch
ādeti

kali va kitavā saho.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왕겨처럼 키로 켜지만,

자신의 잘못은 덮어버린다.

교활한 도박꾼이

잘못 던진 주사위를 감추듯. (Dhp252)

 

 

19.

Paravajjānupassissa

nicca ujjhānasaññino
Āsavā tassa vaḍḍhanti,

ārā so āsavakkhayā.

 

남의 잘못을 보고서

항상 혐책의 상념을 지니면,

그의 번뇌는 증가하니,

번뇌의 부숨과는 멀어지리. (Dhp253)

 

 

띠끌 있는 자의 특징은 남의 허물을 잘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허물에 대하여 왕겨를 날리듯이 키질 한다는 것이다. 곡식을 키로 켜서 바람에 왕겨를 날려 보내는 것처럼 승가 내에서 남의 잘못을 퍼뜨리는 것이다. 이는 비방과 비난에 대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건전한 비판은 권장되고 장려 되어야 한다. 비판과 비난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다

 

마지막으로 띠끌이 없는 자를 허공에 비유하였다.

 

 

19.

Ākāse pada natthi,

samao natthi bāhire,
Papañc
ābhiratā pajā,

nippapañcā Tathāgatā.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고

수행자는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뭇삶은 희론을 즐기지만

여래는 희론의 여윔을 즐긴다. (Dhp254)

 

 

21.

Ākāse pada natthi,

samao natthi bāhire,
Sakhārā sassatā natthi,

natthi Buddhāna iñjita.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고

수행자는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형성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깨달은 님에게는 동요가 없다. (Dhp255)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행위를 하긴 하되 과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이를 ‘작용만 하는 마음’ 또는 ‘작용심(kiriya-citta)’이라 한다.

 

이렇게 발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 밖에 없다. 부처님 가르침 밖에서는 도와 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희론(Papañcā)을 즐기지 않고, 희론을 여의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 한다. 이때 희론은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희론은 잡념이나 망상 같은 것을 말한다. 희론은 크게 갈애에서 만들어진 희론, 견해에서 만들어진 희론, 자만에서 만들어진 희론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이런 희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맛지마니까야 마두삔다까경(M18)에 따르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삼사화합), 삼사화합을 조건으로 접촉이 일어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난다. 그리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접촉에 따른 느낌-지각-사유에서 희론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

 

이렇게 띠끌이 없고, 오염원이 없고, 희론을 여읜 부처님의 제자들은 허공을 나는 새와 같은 것이다. 발자취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동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형성된 것은 무상함을 알기에 오온에 대하여 갈애를 일으키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깨달은 님들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Bird in fly

 

 

 

2013-02-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