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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의 영향과 옴마니반메훔, ‘팍스 몽골리카’시대의 기황후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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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13. 12. 31.

 

 

티벳불교의 영향과 옴마니반메훔, ‘팍스 몽골리카시대의 기황후를 보고

 

 

 

기황후를 보고 있는데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기황후이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 10시에 MBC에서 방영되는데 이제 방송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국내 드라마에 빠져 든 것은 드믄 일이다. 오래 전에 용의 눈물같은 역사드라마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매우 오래 전의 일이다. 그 후로 수 많은 사극이 만들어 졌음에도 흥미를 가지고 지켜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것이어서 크게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 기황후의 경우 달랐다. 그것은 우리나라를 벗어난 것이고 더구나  팍스몽골리카(Pax Mongolica)’라 불리우는 시대적 배경을 하고 있EK. 더구나 고려인 출신이 황후가 되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하지원(기승냥역),주진모(왕유역), 지창욱(원나라 혜종역)

MBC 50부작 사극(2013)

 

 

사극 기황후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 원나라시대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원나라 쇠퇴기이다. 징기스칸이 초원을 통일하고 쿠빌라이가 중국까지 평정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13세기와 달리 기황후가 활약하던 시대는 14세기 초로서 끝물에 해당된다. 그래서 기황후의 시대적 배경은 원나라 혜종시대로서 명나라 주원장에게 수도를 내 주고 망해가던 시기이다.  비록 원나라가 쇠퇴기 이긴 하지만 어떻게 고려출신이 세계를 지배한 원나라의 황후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 매우 흥미롭다.

 

기황후 드라마를 보면 원나라 황실이 등장하기 때문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미흡하기 짝이 없다. 특히 전투장면 등을 보면 어설프기 까지 하다. 이는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보여진다. 저비용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사극을 만들려다 보니 곳곳에서 헛점이 보이는 것이다. 특히 칼을 들고 싸우는 장면이나 대규모 전투 장면이 그렇다. 이는 방송사의 한계로서 중국이나 일본의 시대드라마와 비교 된다.

 

한중일 드라마의 차이는?

 

다채널시대이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이다. 그래서 중국드라마(중드)’일본드라마(일드)’를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드라마 중에서도 관심 있기 보는 것은 시대드라마이다. 중드는 주로 케이블 채널에서 보고, 일드는 인터넷에서 접한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과 한국 시대드라마를 나라 마다 다른 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칼싸움이나 전투하는 장면이다.

 

중드의 경우 칼싸움 하는 장면을 보면 하늘을 날아 다니는 듯이 보인다. 지붕과 지붕을 날아 다니는 등 비현실적인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비교적 역사적 사실을 잘 묘사 하였다고 평가 받는 여황제 무측천(일월능공, CCTV)’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처럼 하늘을 날아 다니는 장면은 거의 모든 중드에서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과장되고 스케일이 크고 기이한 것을 좋아 하는 중국인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일월능공(여황제, 무측천)에서의 류효경

일월능공은 중국에서 2006 CCTV에서 방영되었다.

‘여황제 무측천’에 푹빠져, 일월능공 오프닝 테마곡

 

 

반면 일드의 경우 매우 사실적이다. 칼 싸움 장면을 보면 손에 땀을 쥐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막부말기의 시대드라마 신선조(2004, NHK)’를 보면 진검승부하는 장면이 실감난다. 검이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 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하게 만든다. 이는 일본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일본 시대드라마 중에서도 막부말기나 전국시대에 대한 것이 가장 흥미진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진검승부나 전투장면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신선조 혈풍록의 한장면

 

1) 검() 자루에 인생을 걸고, 막부말기 마지막 사무라이 신선조를 보고

2) 일본 역사드라마에서 배울점, 신선조 세리자와 가모 진검승부현장 야기저택

3) 진검승부의 정신신선조 혈풍록(新選組血風錄) 보고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중드와 일드의 중간쯤으로 보여 진다.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지만 일드에서 보는 것처럼 긴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또 중드에서 보는 것처럼 과장되고 장대하고 기이한 장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중드와 일드의 중간형태이긴 하지만 어설프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그렇다고 하여 이와 같은 칼싸움이나 전투장면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싸움 하는 장면은 단지 극적인 표현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장면을 통하여 허무한 죽음과 명분없는 전쟁을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 드라마를 통하여 항상 느끼는 것은 무상함이다.

 

지금 제아무리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라이온킹에 지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늙어지면 사자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듯이 권력 역시 무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칼싸움이나 전쟁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극은 제행무상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역사공부를 하고 글을 썼어야

 

중드와 일드 사극을 보면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그리고 CCTV NHK와 같은 공영방송에서 자사의 방송을 대표하는 간판방송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구성이 짜임새 있고 스케일 또한 방대하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로서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MBC에서 방영하고 있는 기황후의 경우 원나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임에도 사실적 묘사나 장대한 스케일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방송사의 한계이자 작가의 한계라고도 보여진다. 이런 한계에 대하여 프레시안에서 어느 컬럼니스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역사에 대한 왜곡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드라마 작가들이 일상적으로 고등학교에서 배운 정도의 지식 정도만으로 제작하기에 앞서 좀 더 공부하고 몽골 관련 전문 학자들에게 자문하고서 드라마 제작에 임했으면 이런 이상한 드라마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하지…,, 김운회 동양대 교수, 프레시안 2013-12-17)

 

 

김운회교수는 작가에 대하여 충고하고 있다. 역사공부를 하고 글을 썼어야 했다는 것이다. 단지 교과서에서 배운 몇 줄에 지나지 않는 상식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글을 쓴 결과 역사를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았음을 말한다. 오히려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과분할 정도라 한다. 이에 대하여 몽골제국의 고려국에 대한 짝사랑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이런 사실은 고려사절요 등에 이미 기록 되어 있는 사실이라 한다. 그래서 팍스 몽골리카 시절의 세계지도를 보면 동아시아 대부분과 유럽의 일부가 제국의 영토에 편입 되었으나 고려만큼은 독립국가로 유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팍스 몽골리카시절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대체 어느 정도 밀접하였을까?

 

팍스 몽골리카

 

지금의 시대에 대하여 흔히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라 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미국 제국주의적 정책을 추진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전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경찰국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전세계의 지배자로서의 역할이다. 그래서 미국의 지배하에 전세계가 평화를 누리고 있는 시대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팍스 아메리카나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팍스 브리태니카이다. 이는 미국 이전에 영국에 의하여 세계 질서가 유지 되던 시대를 말한다. 이처럼 팍스(Pax)’를 붙인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시대를 들 수 있다. 로마제국에 의하여 질서가 유지되던 시대를 말한다. 그래서 로마제국 전성기에 대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한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는 없었을까? 물론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팍스 시니카(Pax Cinica)’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들 수 있다. ‘팍스 시니카 중국에 있어서 대제국 시대를 말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부터 시작하여 중국 최대의 영토를 이룬 당나라 등 아시아에서 패권을 이룬 종주국으로서의 시대이다.

 

그런데 팍스 몽골리카 시대가 있었다. 13세기 원나라 시대를 말한다. 초원을 지배하고 중국까지 점령하여 아시아 전역은 물로 유럽 일부까지 지배한 대제국 시대이다. 이를 팍스 몽골리카라 한다. 몽골제국에 의한 세계 질서와 평화가 유지 되던 시대를 말한다.

 

그런데 팍스 몽골리카 시대가 있었다. 13세기 원나라 시대를 말한다. 초원을 지배하고 중국까지 점령하여 아시아 전역은 물로 유럽 일부까지 지배한 대제국 시대를 팍스 몽골리카라 한다. 몽골제국(Mongol Empire, 1206–1368)에 의한 세계 질서와 평화가 유지 되던 시대를 말한다.

 

 

  

 

Mongol Empire 1259 AD (위키백과)

The extent of the Mongol Empire after the death of Möngke Khan (r. 1251–59).

 

 

 

 

 

 

 

Mongol Empire 1300AD(위키백과)

The Mongol Empire circa 1300 AD,

showing its subdivisions of the Golden Horde (yellow),

the Chagatai Khanate (gray),

Great Yuan (green) and the Ilkhanate (purple).

 

 

 

고려와 몽골은 특수한 관계

 

그런데 김운회교수의 글에 따르면 유독 몽골제국이 지배하지 않은 나라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고려국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고려와 몽골은 특수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몽골학자 하칸추루(한촐라) 교수는몽골과 코리아(高麗)는 함께 몽골세계 제국을 창업했습니다 !”라고 하여 한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고려와 몽골이 특수관계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매우 놀라운 말이다. 아직까지 들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서에서 이를 입증할 사료는 많다고 한다. 원사에 따르면 쿠빌라이칸이 서거한 뒤 그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오직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출입했다는 기록이 실려있고, 이런 기록은 고려사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요수(姚燧) 목암문집(牧庵文集)에 따르면 몽골과 고려의 관계와 같은 특수한 밀착관계는 만고에 유례가 없다.”고 적었을 정도라 한다.

 

이와 같은 특수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13세기 아시아 대부분이 몽골에 정복당했지만 고려만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팍스 몽골리카 시절 고려와 원나라와 관계에 대한 묘사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나 고구려 이후 한국인들의 대외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고려와 현재의 한국일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오늘날과 매우 흡사하다. 마치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토익(TOEIC)과 토플(TOEFL)에 목숨을 걸듯이 공부하여 미국으로 가는 것처럼, 당시 고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2011∼12년 기준으로 10 7054명의 한국인이 미국에서 수학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유학에 따른 비용이나 미국과의 물리적 거리를 생각하면 이 규모는 엄청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몽골학의 국내 대표적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몽골학회 이사장)는 당시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에는 그 인구의 절반이 고려 사람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고려인들이 많았다고 한다.(14) 그래서 현대의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영어에 목숨을 걸듯이 당시에는 몽골어에 목숨을 걸은듯하다.

 

(  [기황후 논란 ②] <기황후>, 한· 관계를 왜곡하다, 김운회 교수, 프레시안 2013-12-26)

 

 

지금의 시대는 미국이 세계의 질서를 주도하는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미국중심으로 돌아 간다. 그래서 출세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그래서 미국 유학열풍을 불러 왔고 기러기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겨 날 정도가 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 초반의 팍스 몽골리카 시대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고려와 몽고의 특수한 관계에 있어서 고려인들이 중국인들에 비하여 많은 혜택을 받았는데 그 결과 원나라 수도인 대도 인구의 절반이 고려인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너도 나도 몽골어 배우기 열풍이 불었다는 것이다. 이는 증명하는 것이 그 때 당시 출간 되었던 첩해몽어(捷解蒙語),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몽어유해(蒙語類解)라는 이른바 몽학삼서(蒙學三書)가 대표적이라 한다.

 

지금 우리나라 청년들이 죽자 살자 영어에 올인하고 있듯이 그때 당시 몽고어에 올인 한 것이다. 몽고어를 잘 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고려와 몽고의 특수관계는 혼인으로도 나타났는데 몽고와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몽골의 귀족이나 장군들은 고려 여인들을 아내로 맞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국간에 활발히 전개된 문화교류는 어느 면에서 양국인들의 결혼으로 시작되고 또 촉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로 보았을 때 기황후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고려와 몽고 관계는 적대적이라기 보다 우호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몽고풍의 유행을 불러 왔다.

 

몽고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고교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몽고풍이라는 말을 보았다. 그리고 교과서에서는 고려시대에 몽고풍이 크게 유행하였다고 써 있는 것이 기억이 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고려와 몽고의 특수관계에 있어서 문화교류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수용 되었음을 말한다. 마치 현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미국의 문화와 문물을 동경하고 수입하고 활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본다. 그렇다면 그 때 당시 몽고풍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중학교 국사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고려 후기에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몽고의 여러 가지 풍속이 고려에 들어와 유행하였는데, 이를 몽고풍이라 하였다. 몽고의 풍속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 관리 등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하였고, 그 일부는 민간에까지 파급되어 우리 풍속에 영향을 주었다.

변발과 호복은 당시 왕실이나 관리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대표적인 몽고 풍속이었다. 원종때 원에 가 있던 세자 심(후에 충선왕)이 처음 받아들인 이후에 왕실이나 관리들 사이에 일상화되었다. 또한 왕비들은 '고고'라는 몽고식 모자를 썼고, 몽고식 연회인 보르차연을 베풀어 수천 필의 옷감으로 만든 꽃과 여러 가지 물건으로 장식하고 춤과 노래를 즐기곤 하였다.

공민왕 때에는 반원 자주 정책의 일환으로 변발, 호복 착용 등이 금지되었고, 이와 함께 다른 몽고 풍속들도 금지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부는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그 뒤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이러한 몽고풍의 예를 들면 여자의 족두리, 신부의 뺨에 찍는 연지,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 등이 있으며 이러한 몽고 풍속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나라에 남아 있다.

이밖에 우리말 가운데 장사치와 같이 '--아치' 또는 '--'가 붙는 말이나 임금의 진지상을 뜻하는 '수라'라는 말 등도 몽고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고려의 풍속도 몽고에 흘러 들어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고려양이라고 하였다. 원 왕실과 귀족들은 후궁, 궁녀, 시첩 등에 충당하기 위하여 자주 고려의 처녀들을 데리고 갔으며 또 전쟁 포로로 많은 고려인들이 원에 붙잡혀 갔다. 바로 이들에 의하여 고려의 풍속이 원의 왕실과 일반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풍속 가운데 의복, 신발, 모자와 만두, 떡 등의 음식이 몽고 사회에 급속히 전파되었는데, 고려 만두, 고려 떡 등의 용어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몽고풍, 중학교 국사)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고려시대 몽고풍이 매우 광범위하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왕실이나 관리등에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민간으로 까지 확대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변발에 대한 것이다. 현재 변발하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 때 당시에는 몽고풍을 따라 변발도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몽고문화만 유입된 것은 아니라 한다. 고려의 문화가 역으로 몽고에 유입되어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고려양이라 한다. 이런 고려양의 흔적은 지금도 초원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라마교와 옴마니반메훔

 

김운회 교수의 글에 따르면 고려와 몽고관계는 마치 형제와 같은 관계이었다고 한다. 이는 동족 같은 관계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은 지금 짐(쿠빌라이칸)은 고려를 일가로 본다. 고려에 어려움이 있다면 어찌 짐이 고려를 구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원나라 황제들이 고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고려에서는 몽고풍이 유행하고, 반대로 원나라 수도에서는 고려양이 받아들여져서 상호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 했을까?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들은 말이다. 미디어붓다에서 제공하는 정각원 법회에서 현재 다람살라에서 살고 있는 청전스님이 법문하였다. 스님은 법문 중에 라마교에 대하여 말하였다. 몽골이 중국을 점령하고 난 다음 국교로서 라마교를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티벳불교 계통의 라마교를 채택한 것은 같은 불교일지라도 선불교로 대표되는 중국불교를 기피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팍스 몽골리카 시절 티벳불교, 즉 라마교가 크게 융성하였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몽고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영향 중의 하나가 육자진언이다.

 

육자진언은 옴마니반메훔이라 일반적으로 부른다. 우리나라 불자들의 생활경전이라 볼 수 있는 천수경에도 있고 법회의식에서도 이 진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성본스님은 불교tv 영상강좌에서 티벳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였다. 원나라와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절 라마교의 영향으로 밀교가 받아 들여졌는데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것이 옴마니반메훔 진언이라 한다.

 

티벳불교의 영향으로 어떤 것이 남아 있을까?

 

그렇다면 팍스 몽골리카 티벳불교의 영향으로 어떤 것이 남아 있을까? 이에 대한 진각종 허일범 교수의 논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티베트·몽골의 불교문화는 13세기 이후부터 우리 나라의 불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몽골이 고려를 지배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나 몽골 침략 이후 우리의 불교문화는 중국 일변도의 불교문화 수용에서 탈피하여 다양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건축물의 장엄과 법구류의 제작에서는 단연 티베트·몽골적인 요소가 우세해졌다. 뿐만이 아니라 육자진언의 염송법은 티베트·몽골·우리 나라를 하나의 신앙벨트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찰들에 남아 있는 육자진언 관련 유적들이 말해 주고 있다.

 

( 한국불교속의 티베트 불교 / 허일범, 불교평론 2000년 12월 10일)

 

 

허일범 교수에 따르면 티벳불교의 영향으로 육자진언을 들고 있다. 그 밖에도 티벳불교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 건축물의 장엄, 불상의 조성, 탑의 건립, 법구의 제작, 불화의 도화(圖畵), 수행법 등이라 한다.

 

이중 몽골의 불교문화가 끼친 것이 있는데 단청에 진언을 써 넣는 것이라 한다. 이는 지금도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다. 산스크리트로된 옴마니반메훔 진언이 법당 단청에 써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탱화라 한다. 탱화에 대하여 티벳에서는 ‘탕카(Thangka)’라 하는데 이느 탕카가 법당의 벽면에 그려진 불화와 같은 의미이다.

 

 

  

 

티벳 탕카(Thangka)

Shakyamuni-Thangka(19세기, 위키백과)

 

 

 

또 탕카는 괘불형태로도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탱화와 괘불 모두 원나라시절 티벳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요즘은 윤장대도 볼 수 있어서 이 또한 티벳불교의 영향이다.

 

불교의 타락과 고려의 멸망

 

그러나 요즘 한국불교에서 티벳불교, 라마불교의 흔적중에 한가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합체불’이다. 이를 티벳어로 ‘얍윰 (yab-yum)’이라 하여 남녀가 합일하고 있는 모습인데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 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런 남녀교합상에 대하여  ‘부모존(父母尊)’이라 하는데 이는 얍윰이 부모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남교교합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티벳불교를 수용한 라마교의 원나라시절에는 크게 유행하였음에 틀림 없다. 이는 지난 6월 실크로드 여행지인 돈황 박물관에서 원나라 시절 남녀교합상을 다수 보았기 때문이다.

 

 

  

 

합체존(yab-yum)

원나라시대(돈황박물관)

 

 

 

 

이와 같이 팍스 몽골리카 시절 고려에서는 몽고의 문화를 많이 받아 들였다. 지금 사람들이 미국문화에 열광하듯이 그 때 당시에도 몽고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몽고풍이 크게 유행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지금 미국의 종교가 기독교가 맹위를  떨치고 있듯이 그 때는 원나라의 종교인 라마교의 영향이 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 역시 라마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적지 않은 폐단도 있었던 것 같다. 월간해인에 따르면 고려가 망한 요인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 풍속적인 면에서도 몽고풍의 수렵과 목욕이 왕실에 유행했다. 불교 내부에도 육식하는 라마(羅聊)교의 풍속과 함 께 말폐적인 밀교의 여러 풍속이 들어와 계율정신이 무너졌는 데, 특히 원나라 세력과 결탁한 승려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풍 속은 지식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몽고 에 왕래하는 고려의 승려가 늘어났으며, 또한 몽고의 승려가  고려 사원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몽고사회는 유목사회였기 때 문에 몽고의 승려들에게는 일찍부터 육식이 허락되어 있었고  이러한 몽고 풍습은 고려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승려들에게  육식하는 습관이 생겼다. 게다가 전란으로 언한 승정의 문란은 승려가 취처(娶妻)하는 것과 같은 성도덕의 문란으로 이어지 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덕의 문란은 몽고 유목민의  다처제 관습과 약탈혼적인 경향이 고려사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전몰 미망인이 생긴 것과 재혼이 자유로 왔던 고려사회의 사회윤리적인 성도덕 들과도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월간해인, 1989년 3월호 , 85호)

 

 

월간해인은 해인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월간지이다. 월간해인에 따르면 고려말 불교의 타락원인으로 라마교를 들고 있다. 불교 정통교리에서 벗어난 티벳의 라마교의 영향으로 불교가 타락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라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불교의식에 대한 것인데 앞서 언급한 남녀교합상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타락은 결국 밀교의 영향때문이라 보여진다. 인도에서 불교가 망하고 티벳으로 넘어 갔는데 그때 불교가 밀교인 것이다. 그런 밀교는 힌두교화 된 불교로서 겉으로만 불교로 보일 뿐 사실상 힌두교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에 등장하는 신이 불교의 보살로 바뀌고 각종 진언이 등장하여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더 이상 불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힌두화되고 변질된 불교의 정점이 좌도밀교이다. 얍윰 또는 부모존으로 표현 되는 남녀교합상은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의 합일을 뜻하며, 이는 “부처님법은 남녀가 교합하는 즐거움 보다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중생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방편으로 설명한 것이다”라고 어느 불교학자는 설명하지만, 이는 “힌두이즘의 탄트리즘에서 시바와 샥티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와 방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라고 인도불교사에 설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금강승에서는 지혜와 방편에 의해서 얻어진 궁극의 경지를 열반이라 하였다. 이는 지혜와 방편이 결합된 ‘반야방편(Prajunopaya)’를 말한다. 이렇게 지혜와 방편이 결합된 상태를 ‘대락(大樂, mahasukha)’이라 한다. 이 는 다름아닌 열반을 지칭하는 말로서 ‘커다란 행복(mahasukha)’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성적행위로 엑스터시에 이르는 것에 대하여 열반으로 보는 것이 ‘좌도밀교(左道密敎)’이다. 이는 타락한 불교를 말한다. 불교가 타락하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

 

역사드라마 기황후를 재미 있게 보고 있다. 가장 재미 있게 보고 있는 장면은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인들의 활약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팍스 몽골리카 시절 고려인들이 황실을 주름잡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 되었다. 알고 보니 그 때 당시 원나라와 고려는 매우 특수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몽고문화와 고려문화가 서로 교차하고 교류 되어 몽고풍이나 고려양과 같은 문화가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아울러 종교도 몽고풍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원나라 국교인 라마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티벳불교의 일종인 라마교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옴마니반메훔이라 불리는 육자진언이다. 이는 불자들의 생활경전인 천수경에도 그대로 실려 있어서 모든 법회에서 독송되고 있다. 또 신심 있는 불자들은 조석으로 천수경을 독송하는데 觀世音菩薩本心微妙六字大明王眞言(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이라 하여 옴 마니 반 메 훔, 옴 마니 반 메 훔, 옴 마니 반 메 훔이렇게 세 번 독송한다. 이외에도 천수경에는 수 많은 진언이 있는데 아마도 팍스 몽골리카 시절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라 보여진다.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옴마니 파드 메 훔(O Mai-Padme Hū)이라 한다. 티벳어로는 옴마니페메훙(Om Ma Ni Pe Me Hung)’이라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문자적인 뜻은 , 연꽃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으로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라 한다. 특히 티벳인들이 많이 외우는데 이는 그냥 많이 외우기만 하면 그 자체로 영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옴마니반메훔에 대한 노래가 매우 많다. 전세계의 불교음악을 조사해 보면 다양한 옴마니반메훔 대한 노래가 발견된다. 이를 블로그에 모두 올려 놓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옴마니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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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옴마니반메훔나무관세음보살

 

 

음성 LZDMZ21.mp3 (옴마니반메훔 나무관세음보살 23분)

 

 

 

 

3. 옴마니반메훔, 수정범음

 

 

 

 

 

 

4. 옴마니반메훔, 黃慧音

 

 

 

 

 

 

2013-12-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