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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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의 기적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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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14. 1. 3.

만원의 기적을 기대하며

 

 

 

세상 사람들의 특징

 

글을 쓰다 보면 칭찬도 많이 받지만 비난도 받는다. 이런 때 참으로 억울한 느낌이 든다. 마치 글의 제목만 보고서 비방하는 듯한 느낌도 들 때가 있고 올린 글을 다 보지 않고 일부만 보고서 비난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지만 이렇게 비방과 비난을 받을 때 부처님의 말씀이 다시 한 번 틀림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Aṭṭhime bhikkhave, loka dhammā loka anuparivattanti, loko ca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i. Katame aṭṭha:

Lābho ca alābho ca ayaso ca yaso ca nindā ca pasasā ca sukha ca dukkha ca, ime kho bhikkhave aṭṭhalokadhammā loka anuparivattanti, loko ca ime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개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이 경에 있는 내용은 몇 차례 인용하여 글로 올린 것이다. 언제 보아도 수긍이 가는 가르침이다. 이는 세상사람들이 살아 가는 모습이 여덟 가지로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칭찬(pasasā)과 비난(nindā)’이라는 항목이 있다.

 

사람들은 칭찬하였다가도 어느 순간 비난으로 돌아서기 때문에 칭찬과 비난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이득이 되면 칭찬을 하고, 나에게 불익이 되면 비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칭찬과 비난이 난무하는 것이 세상사람들의 삶이다. 그래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여덟 가지에 흔들린다고 하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팔풍(八風)’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 칭찬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언제 비난으로 돌아 설지 알 수 없다. 마치 인기 절정의 연예인을 따르는 광팬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여 하루 아침에 스토커로 변신 하여 괴롭히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글의 제목만 보고서 판단 하는 경우

 

악의를 띤 비난 중에 참을 수 없는 것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있는 것처럼중상모략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글의 제목만 보고서 판단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 하였는데, 글의 제목만 보고서 보시나 자비의 같은 단계를 무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글을 다 읽어 보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건성건성 읽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이 문구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부처님이 믿음으로 베풀면 갖가지 칭찬받지만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훌륭하네.(S1.33)”라고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삶도 좋지만 더 훌륭한 삶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의 후반부에 예전에도 그 이전에도 그러한 참 사람,지혜로운 자는 모두 열반에 들었다네. (S1.33)”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부처님이 보시나 베푸는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초심자들에게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기 보다 먼저 삼보에 대한 믿음과 오계준수등을 강조하고 보시하는 삶, 도덕적인 삶을 이야기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심자들에게  믿음으로써 지계하고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펼친 것이다.

 

그렇다고 믿음, 지계, 보시가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단지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불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종교이든지 믿음, 지계, 보시를 하면 모두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진화는 제로신관에서 극상에 달한다

 

그러나 불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아의 가르침이다. 대부분 창조주를 믿는 유일신교 종교가 대부분이지만 이처럼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만이 갖는 독톡한 사상이자 불교만의 고유성이다. 이는 종교의 발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유사이래 종교는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유일신론에서 영신론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영신론이라는 것은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도에서 제로()이 발견 되었듯이 종교에 있어서도 영신의 개념이 도입 된 것이다. 그런 영신이 무아라고 도올 김용옥 선생의 인터넷 강연을 통하여 들었다. 이와 같은 영신론에 대하여 김용옥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신의 역사에서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거기에서 제로로 만든 건 싯달타의 혁명이라는 겁니다.

 

(인도를 만나다, 13 싯달타의 깨달음, 김용옥)

 

 

김용옥님의 강연에 따르면 제로신관을 만들어 낸 것은 부처님의 혁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화면에는 다음과 같이 자막으로 설명을 곁들였다.

 

 

다신론(polytheism)à일신론(monotheism)à영신론(sunya-theism)

종교의 진화는 제로신관에서 극상에 달한다.

그것이 곧 삿달타의 혁명이었다.

 

(TV화면 자막)

 

 

TV화면 자막을 보면 종교의 역사, 종교의 진화과정이 세 단계로 표현 되어 있다. 첫 단계는 모든 만물에 정령이 있다고 보는 다신론이지만, 곧이어 신들의 패권이 일어나 결국 유일신론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족국가에서 통일국가로 변천하는 과정처럼  가장 강한 나라의 신이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바이블이라 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창세기에서도 나 이외 다른 신들을 너희에게 두지 말라(1계명)”라 하여 복수로 표현 하였음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처럼 유일신론은 나라의 힘과 비례하여 탄생된 것인데, 유일신론 보다 더욱 더 발전된 것이 영신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용옥 교수는 종교의 진화는 제로신관에서 극상에 달한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곧 삿달타의 혁명이었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의 무아론이야말로 가장 발전된 종교관이라 볼 수 있고 종교의 궁극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무아론이 전개 되면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발전된 종교형태이고 가장 궁극적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서구의 지성들이 불교에 열광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저자인 프리쵸프 카프라박사는  앞으로 미래의 패러다임은 결정론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유일신론에서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으로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벽돌쌓기하듯이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돈오돈수가 아닌 돈오점수라 한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M70)”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탐진치 등을 소멸하는 과정인 열가지 결박에 대하여 말씀 하셨고, 이를 풀어 가는 단계에 대하여 ‘사향사과’로 또한 설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의 경우 과정을 무시한다. 단번에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단번에 깨닫는다는 뜻의 돈오는 돈오점수에도  적용된다. 그렇다면 단번에 깨닫는다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다름 아닌 열반체험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 이는 초기경전에 팔정도, 칠각지 등 삼십칠조도품으로 그 실천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열반체험을 하였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열반체험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번뇌는 있을 것이다. 경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번뇌라 하였다. 이를 손톱끝에 있는 티끌로 표현 하였다. 그런 번뇌가 열가지 결박(족쇄)에 대한 것이다. 이를 차례로 소멸 시켜 나갈 때 깨달음은 완성되는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깨달았는지에 대하여 어떻게 알 것인가? 스승이나 누군가 인가해 주어야 깨달은 것으로 인정해 주어야 할까? 깨달았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이라 한다.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얼마나 되는지 또  지금 내가 얼마나 청정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자신이 청정해짐을 알았을 때 다음과 같이 스스로 선언한다고 한다.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S56.11)

 

 

이것이 깨달음이다.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청정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스스로 아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자신 있게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이 세상의 어느 사상, 철학, 종교에서도 볼 수 없다. 오로지 불교에만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를 불교이게끔 하고, 불교를 불교다웁게 하는 불교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이와 같은 정형구가 수도 없이 등장한다.

 

해탈열반타령한다고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를 활용하게 된다. 대부분 해탈과 열반에 대한 것이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재가자가 해탈열반타령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출가하지 않고 타령하는 것에 대하여 비난한다. 참으로 초등학생 같은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재가불자가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언급한다고 하여 보시와 지계와 같은 중간 단계를 빼 먹고 목적론적으로 만 말한다든가, 지금 당장 출가하라고 말하는 것은 초등학생 보다 못한 유치원생들이나 할말이다. 또한 악의찬 비방의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해탈과 열반은 불자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해탈과 열반을 말하는 타령을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해탈열반타령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지상주의와 다른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부처님이 말씀 하신 깨달음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대하여 불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대로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말하면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지상주의와 같은 것으로 오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불을 찾는 선불교의 깨달음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다른 것이다. 이처럼 목적이 다른 것은 출발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정견을 보면 알 수 았다.

 

깨달음을 향한 출발점이라 볼 수 있는 정견을 보면, 선불교에서는 내가 부처이다라고 본래불을 믿는 것을 말하고 이 본래불을 찾는 과정이 수행이고 본래불을 찾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정견은 팔정도에서 깨달음을 향햔 출발이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출발이 중요한 것은 정견이 바로 서야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불교에서 본래불을 찾는 것과 초기불교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런 명백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자들은 이런 차이를 잘 모른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불을 찾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할 때 해탈과 열반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초기경전에 수도 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이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이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성전협)” 또는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초불연)”이라고 번역 된다. 이렇게 부처님만의 독특한 가르침인 해탈과 열반을 강조하는 것이 초기불교이다. 그럼에도 해탈열반타령한다고 타박한다면 대체 그가 믿는 종교는 어떤 것일까?

 

불교의 방법론은 무엇인가?

 

해탈열반은 불교의 목적이다. 그렇다고 단지 앵무새처럼 해탈과열반만을 이야기한다면 목적론이 되어 버릴 것이다. 중간과정 없이 오로지 목적만 있는 불교를 말한다. 만일 목적론만 이야기 한다면 방법론 또는 실천론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목적론과 방법론 두 가지를 모두 다 설하셨다.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 목적론이라면 이를 실천할 방법론이 있는 것이다. 그 방법론이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팔정도가 있기에 불교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도 마지막 제자 수밧다에게 쑤밧다여, 가르침과 계율에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없다면, 거기에는 수행자가 없고, 거기에는 두 번째의 수행자도 없고… (D16)”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성제가 불교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팔정도는 이를 실천수행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교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하여 중간 과정을 생략한채 해탈열반타령한다고 타박한다고 비방하는 것은 초등학생 같은 말에 지나지 않고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면서 무식을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떯게 방법론을 실천할 것인가?

 

팔정도에 왜 보시가 없을까?

 

대승불교에서는 보시를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절에 가면 스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은 보시에 대한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실천수행이자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론은 다름 아닌 육바라밀이다. 그런데 육바라밀을 보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순으로 되어 있다. 보시가 선두에 있는데 이는 대승불교의 실천수행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실천수행방법에 있어서 보시를 앞 세우지 않는다. 이는 대승의 육바라밀수행과 비교되는 팔정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을 보면, 정견, 정사유,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으로 되어 있어서 그 어디에도 보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보시하는 것에 대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보시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누군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초등학생 같다는 말을 들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왜 팔정도 수행에 있어서 보시와 지계항목이 빠져 있을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제자라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누구나 실천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굳이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강조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마치 공기와 물과 같은 것이어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팔정도에 들어 가지 않은 것으로 본다.

 

다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수도 없이 믿음, 보시, 지계를 강조하였다. 이는 어느 종교에서나 할 수 있는 말로서 초심자, 입문자 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출가자나 재가자가 보시하지 말란 말이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초등학생 같은 말이고 단세포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보시하는 삶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에서 금방 드러난다.

 

부처님 당시 출가자는 탁발에 의존하였다. 출가자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숲속에 살지만 재가자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활을 쏘아 닿는 곳에 출가자가 사는 곳이라 하였다. 이렇게 매일 탁발한다는 것은 재가자에게 보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면 출가자는 재가자에게 담마를 가르쳐 준다. 이렇게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함으로서 서로 공덕을 쌓는다. 이렇게 보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스런 것이었다.

 

육바라밀과 팔정도수행의 차이는?

 

그렇다면 육바라밀과 팔정도수행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의 글을 보았다. 결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처럼 8정도와 6바라밀은 같은 계정혜 삼학을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강조점이 다릅니다. 8정도는 바른 이해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6바라밀은 보시를 강조하여 생활 속에서 수행이 이루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시의 강조는 믿음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믿음도 초기불교에서는 이해를 통해서 생기는 신념이나 확신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대승불교의 믿음은 신앙적인 측면이 강합니니다. 이러한 보시와 자비와 믿음은 일반재가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가르침,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넓은 수레, 대승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입장에서 홀로 수행을 하는 전통 승단을 소승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같은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불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게 되며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나타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제일먼저 표현의 차이 즉, 언어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가 언어를 잘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대승과 소승의 보편점과 차이점을 잘 이해하면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점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후기 대승불교는 이렇게 감성을 더욱 발전시켜 붓다와 보살을 거의 신(god)과 같은 상태로 만들고 그들을 신앙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불교는 대중의 열열한 사랑을 받아 한동안 대중화 되었지만 이렇게 본래 8정도의 모습과 멀어진 후기 신앙불교는 결국 힌두교와 구별할 수 없는 불교가 되었고 끝내는 흰두교에 흡수 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불교역사를 잘 이해하게 되면 역사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제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박나무님, 8정도와 6바라밀의 차이)

 

 

보시를 강조한 것이 대승불교라 한다. 이는 같은 불교라도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앙을 강조하는 감성적인대승불교와 이해와 합리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초기불교와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누군가 보시와 자비를 강조한다면 그는 마하야나주의자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박나무님의 글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팔정도의 모습과 멀어진 불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팔정도가 사라지고 오로지 보시와 자비만을 강조하는 불교가 되었을 때 부처님 가르침 본질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가 팔정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그러나 나의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D16, 초불연)”라고 말씀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팔정도가 사라지고 오로지 보시와 자비에 의하여 불교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하야나주의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자비와 보시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에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목적론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실천할 방법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팔정도이다. 마하야나주위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보시와 자비라는 것도 사실 팔정도 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과정을 생략하고 목적론만 말한다 하여 해탈열반타령한다고 타박한다는 것은 초등학생과도 같은 말이고 단세포적 반응이고 스스로 자신을 한계를 드러내어 무식을 폭로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자비와 보시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아비담마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52가지로 분류 하여 놓았다. 그 중에 선한 마음이 있다. 모두 25가지로 분류 된다. 이 중 사무량심에 속하는 두 가지의 마음이 있다. 그것은 연민(karuna)’기뻐함(mudita)’이다. 그런데 52가지 마음 부수 중에 자애평온이 빠져 있다. 그리고 보시도 빠져 있다. 자애, 평온, 보시는 마음이라기 보다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마음의 분류에서 빠진 것이라 본다. 그래서 25가지 선한 마음을 갖게 되면 자연 스럽게 자애, 평온, 보시가 실천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되면 그 자리에 자애관용지혜가 들어찰 것이다. 따라서 탐진치를 소멸하는 과정 자체가 자애의 마음, 보시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팔정도에서는 선법과 불선법을 가리라고 하였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vāyāmo: idha bhikkhave, bhikkhu anuppannāna pāpakāna akusalāna dhammāna anuppādāya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Uppannāna pāpakāna akusalāna dhammāna pahānāya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Anuppannāna kusalāna dhammāna uppādāya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Uppannāna kusalāna dhammāna 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 aya vuccati bhikkhave, sammāvāyāmo.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정진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1)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하고 불건전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2)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4)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시키고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정진이라고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이것이 선법과 불선법을 분별하는 실천수행방법이다. 요지는 불선법이면 쳐 내고, 선법이면 증장시킨다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선법과 불선법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법이 무엇인지 불선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를 알아야 한다.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선법과 불선법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비담마 논장은 율장, 경장과 함께 빠알리삼장을 구성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과정도 중시하는 초기불교

 

해탈과 열반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만을 이야기하면 목적론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과정이 생략되어 해탈열반타령한다는 소리를 듣기 쉽다. 그러나 마하야나와 달리 초기불교에서는 목적론 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시한다. 그것 실천방법이 팔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정정진이다. 그래서 선법과 불선법을 가려서, 불선한 것이면 쳐내고 선한 것이면 증장시켜야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굳이 보시와 자비를 강조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미 베이스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실천이 중요하다.

 

보시와 자비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이 다는 아니다. 남에게 가르쳐 주는 것도 보시이고 미소한번 지어 주는 것도 보시이기 때문이다. 또 단체나 사회의 모순과 위선과 거짓을 바로 잡아 제도개선을 하는 것도 보시에 속한다.

 

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것, 민주화를 실현 하는 것 등 제도를 개선하는 것은 어쩌면 물질적 보시, 법보시 보다 더 큰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개혁과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서 모두가 능력껏 사는 시대가 된다면 그 것 만틈 큰 보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반드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비로 의식개혁, 제도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실천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월탄 스님은 최근 교계신문에서 우리의 개혁은 종헌과 제도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수행으로 바꾸어야 해. 그렇기 때문에 새로이 태어나기 위한 점검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 돼(불교저널, 2013-12-26).”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행을 강조한 것이다. 아무리 법문이나 글으로서 의식개혁을 주장하고, 또 저항 함으로서 제도 개혁을 이루어 놓아도 당사자의 수행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수행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떻게 실천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마성스님에 대한 글을 읽고

 

최근 인터넷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이 떴다.

 

 

마성스님께서는 팔리문헌연구소의 적자를 이기지 못해 아주 작은 원룸으로 이사하셨지만 연구에 필요한 책 등을 사천 농가 비닐하우스에 넣어놓아 집필과 연구에 많은 불편이 있어 하는 수 없이 개인 주차장 한 면을 빌려 3m 4m 컨테이너 한 동을 놓고 책과 책상을 들여놓았습니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훌륭한 연구와 강의 집필을 하시는 분임과 동시에 바른 의식으로 일찌기 동ㅇ대 겸임교수직에서조차 해임되면서까지 도법스님의 종교평화선언을 막아내신 가장 존경받는 스승이시지만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근본불교 연구까지 지장을 받고 있으니 계행청정한 스승님을 모셔야 마땅한 재가자로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아 훌륭한 우리 도반님들께 부탁 말씀 올립니다.
불교도로서 수행승을 모시는 것은 우리 불자들의 의무입니다.

 

천상에 나는 공덕을 쌓은 불자는 그 행복한 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되세겨 행복한 마음이 되어야 다음생을 잘 받을 수 있다는 부처님 가르침처럼 우리 도반님들이 진정 존경해 마지않아 마땅한 마성스님의 연구와 생활을 위해 매달 만원 혹은 수만원의 자동이체로 보시와 스승을 섬기는 의무와 공덕을 동시에 쌓을 수 있기를 삼가 권합니다_()_


그리고 원불사에서도 매월 몇 만원이라도 보시금을 정해 송금하면 어떨까 제안합니다.

보시금은 연구소통장으로 직접 송금하시거나 자동이체해도 되지만, 원불사 불교발전기금으로 입금해주시면 일괄해서 매달 자동이체할 수도 있습니다.

 

대구은행 03113-167379 한국불교개혁실천연대(원불사)

경남은행 51121-0393896 팔리문헌연구소 이수창

 

 

(팔리문헌연구소에 보시해주십시오)

 

 

 

 

 

마성스님에 대한 글이다. 마성스님은 여러모로 블로그와 인연이 깊다. 블로그를 처음 만들었을 때 마성스님의 사이트에 자주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려 있는 주옥 같은 글을 스크랩하여 많이 올려 놓았다. 지금도 블로그 고층에는 퍼 온 글로 가득하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누군가는 도둑질이라고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퍼 가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크게 양심을 가책을 받지 않았다. 좋은 글이 있으면 열심히 퍼날라서 공유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님의 글을 보고서 스님의 문체를 연구하고 스님의 글을 영향을 받아 글을 쓰게 되었다.

 

미천한 블로거에게

 

비록 넷상이긴 하지만 스님은 스승 같은 존재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데 그 중에서는 불교계의 학자나 스님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남겨 주시고 격려 해 주는 사람은 극히 드믈다. 검색창에 검색하면 대부분 블로그에 연결되어 블로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그냥 지나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글을 남겨 주시는 스님들이 있다. 그런 스님 중에 친철하게 장문의 글을 남겨서 격려도 하고 때로는 잘못을 지적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미천한 블로거에 관심을 가져 주는 자체만으로도 감격하고 고마운 것이다. 이렇게 2005년 이후부터 죽 지켜 보아 왔기에 누구 보다도 스님의 사이트를 잘 알고 있다.

 

만원의 기적을 기대하며

 

그런데 몇 해 전 ‘팔리문헌연구소’라는 사이트가 폐쇄 되었다. 이유는 독립적인 사이트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비용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폐쇄화고 그 대신 미디어 다음에 새로 집을 만들었다. 똑 같은 이름의 ‘팔리문연구소(http://www.ripl.or.kr/ )’이다. 그런데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글을 보니 참담하다.

 

올린 글에서는 보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불자들의 실천수행방법이자 지극히 당연한 보시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큰 보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원의 기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보시에 관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대표적으로 호국연무사 불사 동참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승가원 보시에 대한 것도 올렸다. 그렇다고 하여 많은 금액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만원의 기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시와 자비는 마하야나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팔정도를 실천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런 실천 수행방법으로서 만원의 기적을 기대해 본다.

 

 

 

2014-01-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