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깨달은 자가 된다는 것은, 여래십호에서 붓다(佛)의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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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21. 4. 2.

깨달은 자가 된다는 것은, 여래십호에서 붓다(佛)의 진정한 의미

 

 

, 좋다. , 좋아.” 에스엔에스에서 본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은 좋다, 좋아.”를 연발하는 것 같다. 홀로 사는 기쁨으로 보여진다. 비록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산중에 있는 절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 가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홀로 살아가는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도시에서 처자식을 부양하며 힘겹게 살아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즐거운 삶에 박수를 보내야 할까? 아마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재가자들에게 현실의 삶은 고달프다.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다. 이 생이 다하기 전까지는 매여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자연속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사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시기와 질투가 나기도 할 것이다.

 

안빈낙도의 삶을 살아 가는 자는 홀가분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걸림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머물 수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설령 그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삶이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청정도론 십호에서 말하는 붓다()?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에 붓다(Buddha)가 있다. 이는 청정도론에 있는 구분 방법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열 가지에 대하여 아라한(應供), 삼마삼붓다(正等覺者), 윗자짜라나삼판나(明行足), 수가따(善逝), 로까위두(世間解), 아눗따라(無上士), 뿌리사담마사라티(調御丈夫), 삿타데와마눗사낭(天人師), 붓다(), 바가와(世尊)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십호에서는 여래가 추가되고, 붓다와 세존을 합하여 불세존이라고 한다. 청정도론 십호에서 붓다는 어떤 의미일까?

 

청정도론에서 붓다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매우 짧다. 불과 여섯 줄 밖에 되지 않는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은 님] 또한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을 해탈에 입각한 구경의 앎을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은 님이다. 혹은 네 가지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다른 뭇삶에게도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유로 깨달은 님이다. 그리고 그 의취를 알리기 위해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은 님이다. 뭇삶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깨달은 님이다.”라고 이와 같이 표명된 또는 닛데싸의 표현 혹은 빠띠쌈비다막가의 표현을 상세히 밝혀야 한다.”(Vism.7.52)

 

 

여기서 핵심은 무엇일까? 이는 깨달은 자는 남도 깨닫게 해야 함을 말한다. 자신만 홀로 깨달았다면 깨달았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과연 그런 깨달음이 올바른 깨달음인지 알 수 없다. 남에게도 똑같이 적용해 보았을 때 자신의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면 깨달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를 율장대품에서 본다.

 

무엇이 무명인가?

 

율장대품 제1장을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다. 초야, 중야, 후야에 걸쳐서 세 번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것도 연기의 유전적 연기와 환멸적 연기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명의 타파에 대한 것이다. 유전적 연기에서는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이라 하여 무명이 괴로움과 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안 부처님은 그러므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이라 하여 무명의 사라짐을 깨달음으로 보았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라고 정의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담마빨라는 무명에 대하여 인식론적 무지로 보았다. 이는 무지가 앎의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견되어서는 안 될 신체적 악행 등이 발견되므로 무명이고, 발견되어야 할 신체적 선행 등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다. 사물의 전도되지 않은 본성이 발견되므로 무명이고,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존재 등에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앎의 반대이기 때문에 무명이다.”(UdA.41)라고 했다.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반대로 사성제를 알면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혹은 네 가지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Yasmā vā cattāri saccāni attanāpi bujjhi)”(Vism.7.52)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성제를 알면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계가 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부처님은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고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차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Ud.51,A8.1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단계적 깨달음은 돈오점수라고 볼 수 있다. 사향사과에서 과위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열반체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다원의 열반이 있고, 사다함의 열반이 있고, 아나함의 열반이 있고, 아라한의 열반이 있게 된다. 그렇다고 네 개 과위의 열반이 모두 다른 것은 아니다. 모두 동일한 열반이다. 다만 남아 있는 번뇌가 있어서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돈오점수라고 하는 것이다.

 

돈오점수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율장대품에서 오비구를 교화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오비구를 찾아가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깨달음이 보편적인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열두가지 형태로 세 번 굴려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만의 깨달음일 수 있다. 이것이 보편적인 깨달음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 간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먼저 이전 스승에게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모두 죽었기 때문에 다섯 수행자를 찾아간 것이다. 다섯 수행자는 오래 전부터 수행을 해왔기 때문에 설명하면 알아들을 것이라는 확신도 작용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설명했다. 이는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그러자 알아듣는 사람이 생겼다. 꼰당냐가 무엇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Vin.I.12, S56.11)라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했을 때 이는 우주적 사건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Vin.I.12, S56.11)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라한이 되는 가르침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고 했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가 모두 진리의 눈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이는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라한이 되는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은 다섯 명의 수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Vin.I.13, S22.59)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물질은 물질로 구성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아이론을 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아라고 여겨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도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우리의 의도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괴롭고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애착을 갖는다. 만약 오온이 내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오온에 대한 통제권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온에 대하여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또한 생겨난 형성들은 유지를 얻지 말고, 유지에 도달한 것은 늙지를 말고 늙음에 도달한 것은 붕괴되지 말라.’라고 이와 같이 세 가지 경우에 누구라도 지배를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한 지배를 행사하지 못하므로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한 것이고, 주인이 없는 것이고, 지배력이 없는 것이고, 실체와는 반대가 되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Vism.20.47)라고 했다.

 

 

부처님은 다섯 명의 수행승들에게 문답식으로 무상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함을 말했다.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을 들은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그리고 이러한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Vin.I.14)라고 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계적이다.

 

부처님 깨달음의 보편성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차례로 설명했다. 이는 초전법륜경(S56.11)과 무아상경(S22.59)에서 확인된다. 특히 무아상경을 설하여 이 세상에 부처님을 포함하여 아라한이 여섯 명 되었을 때 깨달음의 보편성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열가지 명호 중에서 붓다에 대한 것은 네 가지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다른 뭇삶에게도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유로 깨달은 님이다. (Yasmā vā cattāri saccāni attanāpi bujjhi, aññepi satte bodhesi, tasmā evamādīhipi kāraehi buddho)”(Vism.7.52)라고 한 것은 타당하다.

 

부처님이 깨달은 자, 부처가 된 것은 다른 사람도 깨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깨달음의 보편성이다. 만약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깨달음의 될 것이다. 이는 보편적 깨달음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다섯 명의 수행승들에게 적용했을 때 똑 같은 결과를 얻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은 님이다. 뭇삶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깨달은 님이다. (bujjhitā saccānīti buddho. Bodhetā pajāyāti buddho)”(Vism.7.52)라고 되어 있는 것과 일치한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자들은

 

여기 자칭타칭 깨달은 자가 있다. 요즘 유투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타인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는 상대방에게 이것을 말한다. 그는 계속 이것입니다. 이것이이라니까요.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래도 못 알아듣자 이번에는 도구를 이용한다. 작은 종을 흔들며 소리를 내며 이것이라고 말한다. 또는 죽비를 손바닥으로 , 치면서 이것이라고 말한다.

 

자칭타칭 깨달은 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알려 주고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말로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책상을 , 치기도 하고, 악을 써 보기도 해고, 심지어 막대기로 머리를 치기도 한다. 모두 알려 주기 위한 방편이다. 말로 설명이 안되니 이것입니다. 이것이이라니까요. 이것뿐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한다.

 

때로 알아듣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럴 때는 견성했다고 인가를 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라고 했을 때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대 툭 쳤을 때 상대방도 툭 받아 친다면 깨닫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문외한이 보기에는 코미디 같아 보인다.

 

깨달은 자가 된다는 것은

 

청정도론에 따르면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붓다는 자신만 깨달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도 깨닫게 해 주어야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한다. 이는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지극히 원만하고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설한 가르침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팔고를 설했을 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하여 갈애를 말했을 때 수긍했다.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방법에 설명했을 때도 동의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원인과 결과로 가르침을 설했다. 이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합리적 설명을 했다. 그 결과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부처님이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문답식으로 설명해서 이해시켰다. 이런 장면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알아서 깨달았고, 사성제를 설하여 깨닫게 만들었다. 이렇게 진리는 자신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다. 남들도 알게 되었을 때 진리가 된다. 모두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포함하여 남도 깨닫게 만들 수 있어야 진정한 깨달은 자가 된다.

 

 

2021-04-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