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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가리까(無家)는 청정한 삶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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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강독

2021. 4. 24.

아나가리까(無家)는 청정한 삶의 기본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지금 이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라고. 아마 억울할 것 같다.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고 할 것 같다.

 

줌 오디오문제를 해결하고

 

4월 두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줌으로 열렸다. 늘 그렇듯이 들어오는 사람만 들어온다. 이것도 관성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모임이든지 한번 나가기 시작하면 계속 나가고, 한번 빠지면 계속 빠지게 된다. 줌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줌모임 가질 때 늘 염려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디오 문제이다. 스마트폰에서 오디오 아이콘이 있는데 마이크가 꺼져 있는 상태로 기본 세팅 되어 있다. 마이크를 활성화시키려면 터치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터치해도 마이크가 켜지지 않는 것이다.

 

마이크는 어쩌다 터치하면 켜진다. 이유를 알 수 없다. 스마트폰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줌모임 할 때 마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이번에도 그랬다.

 

인터넷으로 마이크문제와 관련하여 키워드 검색해 보았다. 결정적으로 알아낸 것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그동안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스마트폰 마이크 아이콘을 터치했을 때 말풍선이 나타나는데, 말풍선을 터치하면 마이크가 켜진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어떤 이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스마트폰 오디오 켜는 문제가 그렇다. 헤매고 보니 이런 사실을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캡쳐한 사진과 함께 단체카톡방에 공유해 놓았다.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4월 첫번째 금요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모두 수행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미래의 두려움을 수행의 추진력으로 삼아라에 대한 경이고, 또 하나는 미래의 두려움에 대한 부처님의 경책에 대한 경이다.

 

첫번째 경 미래의 두려움을 수행의 추진력으로 삼아라는 앙굿따라니까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경1 (Pahamaanāgatabhayasutta)’(A5.77)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그 중에 첫번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한적한 숲에 사는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여기 단지 홀로 숲에 산다. 그런데 내가 홀로 숲에 사는 동안, 뱀이 나를 물고, 전갈이 나를 물고, 지네가 나를 물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A5.77)

 

 

한적한 숲에 사는 수행자에게는 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첫번째 위험은 파충류와 곤충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뱀, 전갈, 지네를 들고 있다. 독이 있다면 물려서 죽을 것이다.

 

두번째 위험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신체적 변화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넘어져 떨어질지 모르고, 먹은 음식이 나를 해칠지 모르고, 담즙이 나를 변조시킬지 모르고, 점액이 나를 변조시킬지 모르고, 날카로운 고통이 나를 변조시킬지 모른다.” (A5.77)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불운한 사건에 해당된다.

 

불운한 사건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도 인정했다. 상윳따니까야 몰리야씨바까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불운한 사건에서 생겨납니다.”(S36.21)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불운한 사건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S36.21)라고 말했다.

 

삶의 과정에서 불운한 사건은 부처님도 인정한 것이다. 이후 세번째 위험인 호랑이 등의 포유류의 공격 역시 불운한 사건에 해당될 것이다. 네번째 위험인 도적의 공격 역시 불운한 사건이다. 다섯째 위험인 귀신의 해코지 역시 불운한 사건에 해당된다.

 

수행은 목숨 걸고 하는 것

 

부처님 당시 수행승들은 숲에서 살았다. 그런데 숲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수행은 목숨걸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은 목숨 걸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안락한 환경에서 수행하는 것보다 목숨의 위험이 있는 숲에서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 있음을 말한다. 이는 생사를 가르는 절박감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게으름 피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당부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미래의 두려움을 관찰함으로써 한적한 숲에서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A5.77)

 

 

부처님은 정진을 강조했다.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도 정진이었다. 수행 중에 불행하게도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억울할 것이다. 불운에 직면하기 전에 이루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A5.77)라고 했다.

 

멸성제를 실현하면

 

수행을 하면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사향사과와 열반으로 나타난다. 이는 경에서 도달(pattiyā), 성취(adhigamāya), 실현(sacchikiriyāya)이라는 키워드로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핵심어 중에서 전재성 선생은 실현에 큰 의미를 두었다. 이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 실현을 뜻하는 삿치끼리야(sacchikiriyā)’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렸다. 이를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으로 설명한다. 처음 굴린 것은 사실에 대한 확인 차원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 굴린 것은 실천에 대한 것이고, 세번째 굴린 것은 증명된 것이다.

 

실현을 뜻하는 삿치(sacchi)라는 말은 멸성제에서만 보인다. 시전과 권전에서만 볼 수 있는데, 권전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 (Ta kho panida dukkhanirodho ariyasacca sacchikatanti)”(S56.11)라고 되어 있다.

 

멸성제는 가르침의 완성에 대한 것이다. 이는 열반을 의미한다. 수행자는 열반을 성취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즉 수다원이 되면 많이 잡아도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끝나게 되어 있다.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흐름에 든 자가 되면 열반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십년을 더 사나 하루를 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멸성제를 실현했다면 위험이 가득한 숲에 살아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asacchikatassa sacchikiriyāya)”하기 위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해야(appamattena ātāpinā pahitattena)”라고 했을 것이다.

 

여러 질문이 있었는데

 

여러 질문이 있었다. 어느 수행자가 실제로 호랑이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이에 전재성 선생은 도망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위급한 상황은 피하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이 깊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숲속의 수행자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두려움이 있다면 숲속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수행자가 무섬증이 들면 산중에서 홀로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귀신에 대한 공포가 일어났을 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하산한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숲속의 수행자들은 목숨 걸고 수행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위험은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불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몰리야씨바까의 경’(S36.21)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하여 1)담즙(Pitta), 2)점액(Semha), 3)바람(Vāta), 4)체질(Sannipātikāni), 5)계절의 변화(Sannipātikāni), 6)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 7)우연한 피습(Opakkamikāni), 8)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 이렇게 여덟 가지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숲속의 수행자는 안락한 수행자와 다르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숲속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절박한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수행은 용기있는 자만이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페터선생 이야기

 

전재성선생은 숲속의 수행과 관련하여 페터선생 이야기를 했다. 거지성자의 주인공 페터 노이야르를 말한다. 전재성선생이 독일유학 갔었을 때 만났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은 페터선생을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이 극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는 책 거지성자에 잘 묘사되어 있다.

 

페터선생은 현재 나이가 84세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난지 12년만에 연락이 되어서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페터선생은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동유럽 등을 무전여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굴이 매우 깨끗하다는 것이다. 마치 아이 얼굴처럼 동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 공개한 사진을 보니 정말 그렇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

 

 

페터선생은 평생 집없이 살았다. 책 거지성자에서는 이히 레베 오네 보능, 오네 겔트, 오네 프라우(나는 집 없이, 돈 없이, 여자 없이 삽니다.)” (거지성자, 21)라고 표현되어 있다. 페터선생은 집없이, 돈 없이, 여자 없이 산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빅쿠의 삶이다.

 

집없이 살면 돈없이 살게 되고, 돈이 없으면 여자없이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페터선생은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하여 집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아나가리까라는 말로 설명했다.

 

집없는 삶, 아나가리까(anagārika)

 

집없이 사는 것을 아나가리까라고 했다. 아나가리까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먼저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 찾아보았다. 검색해 보니 ‘anagārika’라는 로마나이즈화된 철자를 발견했다. 설명은 짧다. 다만 한자어서전에서는 非家的, 無家的이라 되어 있고, 일본어사전에서는 非家라고 되어 있다. 이 단어가 들어간 경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아나가리(anagāri)가 들어간 말을 구글검색해 보니 귀의문에서 발견된다. 숫따니빠따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Sn.1.4)을 보면 귀의문이 있는데 이는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agārasmā anagāriya pabbajanti)”라는 정형구로 나타난다.

 

아나가리야(anagāriy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homelessness’의 뜻이다. 마치 노숙인처럼 집이 없음을 말한다. 수행자도 집이 없다. 그렇다면 노숙인과 수행자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는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걸인과 빅쿠는 밥을 얻어먹는다는데 있어서 같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청정한 삶에 있다. 청정한 삶을 산다면 걸사(乞士: Bjikkhu)이지만, 청정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걸식자(bhikkhaka: a beggar)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여기서 청정한 삶(brahmacariya)은 바라문 사주기에서 학습기(淸淨梵行)에 해당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집없이 무소유로 살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승(bhikkhu)의 삶을 말한다.

 

밤하늘을 지붕으로 바람을 이불로

 

전재성선생은 젊은 시절 독일유학 8년 동안 페터선생과 함께 했다고 한다. 집없이 사는 아나가리까 페터선생은 맛지마니까야를 좋아해서 늘 통독했다고 하는데 앞뒤로 외울 정도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교학과 실천이 함께 하는 것이다. 이를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선생은 책 거지성자에서 그래서 나는 감히 그를 성자라고 부른다.”(7)라고 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거지성자가 되었을 것이다.

 

전재성선생은 줌모임에서 페터선생과 함께 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했다. 숲에서 사는 페터선생을 따라 흑림(黑林)이라고 불리우는 숲에 들어갔다고 한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해서 사람들이 들어 가지 않는다고 한다. 들어가면 나무 사이에서 빛이 들어오는데 빛이 레이져 빔처럼 보였다고 한다.

 

집에서 숲에서 살면 어떤 일이 있을까? 전재성선생은 페터선생을 따라 밤중에서 숲에서 잔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없이 숲에서 머물다 보면 완전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은 대자연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지붕으로 하고, 바람을 이불로 하고, 땅을 담요로 하는 삶을 살았을 때 집 있는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다.

 

아나가리까(無家)는 청정한 삶의 기본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산다. 집에서 안락하게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집을 벗어나면 안락한 삶은 보장되지 않는다. 집을 떠나 집없이 숲에서 살았을 때 이는 아나가리까가 된다. 집없는 삶이다. 부처님도 숲에서 집없이 살았고 제자들도 집없이 살았다.

 

집없이 숲에서 살면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죽을 만한 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절박하다. 죽기 전에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실현하는 것인가? 멸성제에서와 같이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S56.11)라고 했듯이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열반을 실현하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숲속에서 살아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라고 했을 것이다.

 

불사의 진리는 열반을 말한다. 멸성제를 실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위험한 숲에서 살며 절박한 심정으로 수행했다. 집없는 삶이다. 집없이 사는 아나가리까(無家)야말로 청정한 삶의 기본이다. 전재성 선생은 페터선생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2021-04-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