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감동 없는 삶을 살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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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강독

2021. 4. 25.

감동 없는 삶을 살았을 때

 

 

금요니까야강독모임 두번째 경은 미래의 두려움에 대한 부처님의 경책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미래의 두려움에 대한 경4’(A5.80)에 해당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경은 모두 네 개로 되어 있다. 한권으로 가려 뽑은 앙굿따라니까야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는 첫번째와 네번째 경만 실려 있다. 전체를 이해하려면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네 개의 경을 다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미래에 대해 예견했다. 이를 경에서는 미래의 두려움이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입멸후에 후대로 내려갈수록 수행승들의 타락을 예견한 것이다.

 

정법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어서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는 과거에 여러 부처님들이 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미래의 두려움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다.

 

좋은 옷에 탐착했을 때

 

첫번째 미래의 두려움은 좋은 옷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미래에 좋은 옷을 원할 것이다. 그들은 좋은 옷을 원하면서 누더기 옷을 꺼릴 것이다. 그래서 한적한 숲속 외딴 곳의 거처를 꺼리고, 마을이나 도시나 왕궁으로 나아가 거처를 마련할 것이다.”(A5.8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본래 수행승은 분소의(pasukūla)를 입었다. 그럼에도 재가자들이 보시한 좋은 옷만 입었을 때 수행자라고 볼 수 있을까? 이는 수행승의 타락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가르침에서는그들은 옷 때문에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비행을 저지른다.”(A5.80)라고 했다.

 

분소의는 시체를 덮을 때 입던 옷이다. 수행승들은 버려진 시체에서 옷을 벗겨 입었다. 이옷저옷을 붙여서 기워 입은 것이다. 천을 조각내서 조각 낸 것을 붙여서 하나의 커다란 천으로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율장을 예로 들어서 길이가 4미터에 1.5미터가량 되는 천이 되는데 마을의 밭모양과 같다고 했다.

 

율장을 찾아보았다. 분소의와 관련된 것은 율장대품 제8장 의복에 다발에 실려 있다. 밭모양의 분소의와 관련된 인연담이 있다.

 

부처님이 유행을 하다가 밭모양을 보았다. 이는 네모나게 나누어지고, 종횡으로 엮어지고, 계단식으로 배열되고, 사각으로 만나는 마가다국의 밭을 보았다.”(Vin.I.287)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밭모양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아난다에게 말했다.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대는 수행승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옷을 만들 수 있겠는가?” (Vin.I.287)라고 말했다.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분소의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옷조각을 기워서 만든 분소의는

 

율장에 따르면, 분소의는 옷조각을 기워서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걸인처럼 입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조각을 만들고 기워야 할 곳들을 깁되, 수행자에게 적합하고, 도적들이 부러워하지 않게 할 정도로 현명하고 크게 슬기롭다.”(Vin.I.287)라고 했다. 분소의도 품위가 있어야 함을 말한다.

 

분소의를 걸인이 입으면 걸인의 옷이 된다. 그러나 수행자가 입으면 빛이 난다. 어느 정도일까? 청정도론 두타행에서 분소의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악마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해

분소의를 입는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빛난다.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처럼.”(Vism.2.22)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자를 전쟁터의 전사로 묘사한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수행자가 분소의를 입으면 마치 전쟁터에서 장군이 갑옷을 입은 것처럼 빛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세상의 스승께서도 까씨의 옷 등의 값비싼 옷을 버리고 분소의를 입었거늘 누가 그것을 입지 못하랴!”(Vism.2.22)라고 했다.

 

전재성선생은 분소의의 관련하여 페터선생 이야기를 했다. 페터선생은 길거리에서 주은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여러 천을 사용하다 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밭모양의 분소의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분소의를 걸치니 마치 로마황제처럼 보였다고 한다.

 

로마황제보다 더 위풍당당한

 

전재성선생의 젊은 날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 책 거지성자가 있다. 책에서 거지성자는 다름 아닌 페터 노이야르를 말한다. 전재성선생과 페터선생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으로 볼 수 있다. 분소의와 관련하여 책에서 이런 대목이 있다.

 

 

“선생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얇은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 내가 선생의 망토를 보았을 때는 검은 색이었다. 그러나 17년의 세월이 흘러 버린 지금 선생의 망토는 천연색의 지도처럼 되어 버렸다. 해진 곳이 있으면 다시 천을 대고 기웠기 때문이다.(거지성자, 216)

 

 

페터선생이 천조각을 수없이 덧대어 기워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늘 바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소의를 걸쳤을 때 로마황제보다 더 위풍당당하다고 했다. 마치 악마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해 분소의를 입는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빛난다.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처럼.”(Vism.2.22)라는 게송을 연상케 한다.

 

맛에 탐착하면

 

두번째 미래의 두려움은 좋은 탁발음식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은 좋은 탁발음식을 원하면서 탁발을 꺼릴 것이다. 그래서 한적한 숲속 외딴 곳의 거처를 꺼리고, 마을이나 도시나 왕궁으로 나아가 최상의 입맛에 맞는 최상의 맛을 구하며 거처를 마련할 것이다.”(A5.80)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다. 이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식절제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욕망에 지배받는 것이 된다.

 

수행은 왜 하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뿌리를 뽑아 내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음식에 탐착하여 음식절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수행자의 타락으로 보고 있다.

 

맛에 탐착하는 것이 왜 타락일까? 이는 디가니까야 아간냐경’(D27)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겁기가 되었을 때 맛에 대한 갈애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났음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세상은 어떤 존재가 맛있는 땅조각 맛을 보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하여 맛 있는 땅조각을 손으롬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D27.7)라고 했다.

 

바이블 창세기를 연상케 하는

 

아간냐경을 보면 마치 바이블 창세기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경의 제목도 우리말로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이다. 어떤 기원인가? 해와 달이 생겨나고, 생명체가 생겨나는 등 세상의 기원은 어떤 존재가 마치 비스켓처럼 생긴 땅 한조각을 맛보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맛이든지 맛이 있으면 잊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찾게 된다. 어떤 존재도 땅조각 맛을 보았을 때 그 맛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맛이 그를 엄습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혀 끝에 놓인 것만으로 칠천 개의 미각신경이 퍼져나가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어 갈애가 생겨났다.”(Smv.865)라고 했다.

 

맛에 대한 탐착은 갈애를 동반한다. 맛에 대한 갈애로 세상이 생겨나고, 남녀가 생겨나고, 사성계급이 생겨났다. 이 모두가 맛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행자가 탁발을 포기하고 맛있는 것에 탐착한다면 이는 다름 아닌 수행자의 타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그들은 탁발음식 때문에 여러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비행을 저지를 것이다.”(A5.80)라고하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예견했다.

 

좋은 거처를 탐착하면

 

세번째 미래의 두려움은 좋은 거처이다. 이는 그들은 좋은 거처를 원하면서 나무 아래 있는 것을 꺼릴 것이다. 그래서 한적한 숲속 외딴 곳의 거처를 꺼리고, 마을이나 도시나 왕궁으로 나아가 거처를 마련할 것이다.”(A5.80)라고 했다.

 

좋은 거처란 무엇일까? 편안하고 안락한 잠자리를 뜻한다. 거칠고 딱딱한 바닥과 같은 잠자리가 아니라 푹신하고 포근한 침상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처럼 좋은 거처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은 거처 때문에 여러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비행을 저지를 것이다.”(A5.80)라고하여, 미래의 두려움을 예견했다.

 

전재성선생은 거처와 관련하여 서양의 스토아학파와 비교해서 설명했다. 견유학파로 부터 시작된 스토아 학파는 여로모로 불교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에서는 마루바닥에서 잔다고 했다. 일부러 딱딱한 데서 자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금욕주의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스토아학파와 불교와 유사성에 대한 책도 나왔다고 한다.

 

수행자의 잠자리는

 

수행자가 안락하고 푹신한 거처에 탐착했을 때 이는 수행자의 타락이 된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어떤 잠자리여야 하는가?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여덟 고리의 포살에 대한 상세의 경’(A8.42)에서도 알 수 있다. 여덟 가지 포살 항목 중에서 여덟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모든 거룩한 님들은 높고 큰 침대를 버리고, 높고 큰 침대를 삼가고 낮은 침대나 긴 의자나 깔린 풀섶에 눕는다. 나도 또한 지금, 오늘밤, 오늘 낮부터 높고 큰 침대를 버리고, 높고 큰 침대를 삼가고 낮은 침대나 긴 의자나 깔린 풀섶에 누울 것이다. 이렇게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고, 나는 포살을 준수하리라.’라고 성찰하여 여덟 번째 고리를 갖춘다.”(A8.42)

 

 

여덟 가지 포살의 고리를 팔관재계라고 한다. 재가자가 포살일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선원에 들어가서 살아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팔관재계는 하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재가자의 사회활동이나 생업 때문일 것이다.

 

재가자는 평소 오계를 지킨다. 그러나 보름에 한번 있는 포살일에는 팔계를 지켜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출가자처럼 하루를 살아 보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포살계를 하루밤하루낮 계라고 말한다.

 

하늘에는 별들의 보석이 펼쳐지고

 

재가자가 사회생활하면서 팔계의 삶을 살기 힘들다. 그러나 한달에 한두 번이라도 출가수행자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여덟 번째 항목을 보면 높은 침대, 큰 침대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안락하고 푹신푹신한 침대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포살계는 하루만이라도 출가자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거처와 관련해서는 숲속에서 사는 것처럼 거칠고 딱딱한 잠자리를 가지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청정도론 두타행을 보면 거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게송이 있다.

 

 

집없는 자에게 어울리고

얻기 어려운 것 아니다.

하늘에는 별들의 보석이 펼쳐지고

달빛이 빛나니.

 

노천에 지내는 수행승은

사슴 같은 마음으로

해태와 혼침을 몰아내니

수행락을 누리며 앉는다.”(Vism.2.63)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살았을 때

 

네번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 미래에 수행녀와 정행녀와 사미승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A5.80)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비구가 비구니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하여 미래의 두려움이라고 했을까? 이는 청정한 삶을 감동없이 살 것이거나, 다른 오염된 비행을 저지르거나, 배움을 버리고 속퇴할 것이다.”(A5.80)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여자의 출가도 허락했다. 이와 관련하여 전재성선생은 여자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자수행자가 홀로 수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남자수행자가 보호해 주어야 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A8.51)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어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게 사는 집이 있다면 그 집을 도둑이 도둑질하러 침입하기 쉽듯이, 아난다여, 이와 같이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여인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면, 그 청정한 삶은 오래 가지 못한다.”(A8.51)

 

 

고따미의 경을 팔경법이라고 한다. 재가여성운동가들은 이 법을 남녀차별하는 악법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오늘날 관점으로 본다면 팔경법은 문제가 많다. 이런 문제를 예상해서일까? 후속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수행녀의 교계사에 대한 경’(A8.52)고따미에 대한 훈계에 대한 간략한 경’(A8.53)을 말한다. 후속의 경을 보면 어느 정도 팔경법을 시대상황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부처님은 고따미의 경에서 여성출가를 허락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천년동안 지속될 정법이 여성출가를 허락했기 때문에 단지 오백년만 정법이 지속될 것이다.”(A8.51)라고 했다.

 

 

부처님은 미래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사는 세상을 예견했다. 이에 대하여 이는 “1)청정한 삶을 감동없이 살 것이거나, 2)다른 오염된 비행을 저지르거나, 3)배움을 버리고 속퇴할 것이다.”(A5.80)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성적문제로 보았다. 성적문란으로 인하여 비행을 저지르고 속퇴할 것으로 본 것이다.

 

수행승이 재가자와 함께 살 때

 

다섯번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수행승이 재가자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또한 수행승들이 미래에 승원의 일꾼과 사미승과 함께 살 것이다.”(A5.80)라고 했다.

 

오늘날 절에 가 보면 재가자들을 볼 수 있다. 절에서 일하는 남자를 처사라고 하고, 절에서 일하는 여자를 보살이라고 한다. 남자는 절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여자는 공양주보살이라 하여 밥을 짓는 역할을 주로 한다. 어쩌면 이런 것도 부처님의 예견대로 되었는지 모른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탁발에 의존해서 살았다. 그래서 숲속에 재가자들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갈수록 한곳에 모여 살다보니 재가자들의 시중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자의 타락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재물을 쌓아 놓고 살면서, 땅 일이나 농사일과 같은 거친 일을 할 것이다.”(A5.80)라고 했다.

 

진리를 위해 출가한 수행자가

 

출가수행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일 하려고 출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다. 이는 목숨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전재선선생은 목숨을 걸고 출가한 수행자가 자기생존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했다.

 

출가자가 일을 한다는 것은 소유를 말한다. 이는 재가의 삶과 다름없다. 더구나 승원에서 재가자와 함께 산다면 출가인지 재가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금화와 황금 그리고

전지와 택지, 염소와 양,

남자노비와 여자노비를

미래에 어리석은 자들이 받아들이리라.”(Thag.957)

 

 

출가수행자가 소유하는 삶을 살았을 때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탁발에 의존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출가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수행했다. 탁발하지 않고 밥을 지어먹었다. 자급자족하기 위해서 농사도 지었다. 농사를 짓다 보니 일손이 필요했다. 마침 여인이 있어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자식도 여러 명 가졌다.

 

어느 날 수행자는 농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또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러려고 출가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다 보니 농부로 가장으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출가수행자가 소유하고 일을 하면 재가자와 다름없는 삶임을 말한다.

 

오늘날 절에서는 재가자도 함께 산다. 이는 게송에서 남자노비와 여자노비를 미래에 어리석은 자들이 받아들이리라.”(Thag.957)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이런 사실을 우려했다. 이는 다름 아닌 미래의 두려움이다. 부처님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감동 없는 삶을 살았을 때

 

부처님은 다섯 가지 미래의 두려움을 예견했다. 세 가지는 의식주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수행자의 타락에 대한 것이다. 특히 네 번째 청정한 삶을 감동없이 살 것이거나(anabhiratā vā brahmacariya carissanti)”(A5.80) 라고 한 것에 주목한다.

 

전재성선생은 수행자의 타락에 대하여 아나가리까(無家)’로 설명했다. 집없는 삶이 집있는 삶으로 되었을 때 수행자의 타락이 있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아나가리까가 없으면 감동, 동경, 외경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는 삶은 정신적으로 공허 해진다. 그래서 자꾸 즐길거리를 찾는다. 좋은 옷, 좋은 거처, 좋은 음식에 탐착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재가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이 될 것이다. 나중에는 출가자인지 재가자인지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타락이다.

 

감동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청정한 삶을 살면 감동이 있다고 했다. 집없는 삶, 아나가리까의 삶은 감동 있는 삶을 살기에 충분함을 말한다. 어떤 감동을 말할까? 감동이라 번역된 아비라따(abhirata)에 검색해 보니 관련된 경을 찾을 수 있었다.

 

감동이라 번역된 아비라따는 ‘finding delight in’의 뜻이다.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넥깜마(出離)에 대한 것이고 또 하는 닙바나(涅槃)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아비라따는 멀리 여읨을 즐기고”(A8.28)로 설명되고, 또한 열반을 즐기며”(Stn.86)라고 설명된다.

 

멀리여임의 없고 열반이 없는 삶은 감동 없는 삶이다. 감동 있는 삶은 무소유로 실천된다. 그것이 집없는 삶, 아나가리까이다. 출가수행자가 소유하게 되었을 때 감동 있는 삶이 되기 어렵다.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다가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

 

 

2021-04-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