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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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멸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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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

2021. 4. 30.

생멸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요즘 전기장판 없으면 잘 수 없다. 봄과 가을에는 난방이 중지되는 것 같다. 일종의 난방의 사각계절이라 볼 수 있다. 전기장판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거리의 노숙자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깊은 밤에 홀로 깨어 사유한다.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는 빗방울이 떨어진다. 창 밖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바깥날씨를 대충 알 수 있다. 이 새벽에 이런저런 생각이 샘솟는다. 어느 생각을 잡아야 할까? 죽음에 대해 사유해 보았다.

어떤 이는 죽음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죽음이라는 명칭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죽음도 없다면 삶도 없을 것이다. 모든 언어적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언어적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소처럼 개처럼 살자는 것과 같다. 소나 개는 언어가 없다. 따라서 언어적 사유를 할 수 없다. 그저 본능으로 살 뿐이다. 사람이 감각으로만 산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좋으면 거머 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는 삶이다. 탐욕과 분노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게 사는 자들은 짐승처럼 사는 자들이다.

소처럼 개처럼 살 수 없다. 사유하는 삶을 살아야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을 뜻하는 맨(man)은 생각을 뜻하는 'man'에 뿌리를 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유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사유를 부정한다면 소처럼 개처럼 살자는 말과 같다.

죽음에 대해 사유해 본다. 죽음이 추상명사이긴 하지만 죽음을 사유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래 죽음은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죽음은 바로 앞에 있다고 사유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죽어 보지 않아서 죽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죽음이 정말 있는 것인지 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제 멀쩡한 사람이 오늘 시신으로 변했을 때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죽음은 추상명사에 지나지 않고 죽음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일까?

죽음은 생생한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죽고 있다. 매순간 나는 죽고 있다. 찰나생찰나멸 하는 것이 죽음이다. 생각도 찰나생찰나멸한다. 마치 물이 찰찰찰 흐르는 것 같다. 매순간 조건발생하여 소멸하는 것이다.

발생하는데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멸하는데는 조건이 필요없다. 그냥 소멸하는 것이다. 두 손바닥을 부딪치면 소리가 난다. 소리의 생성이다. 그러나 손뼉친 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만다. 소리의 소멸이다. 소리가 발생하는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소리가 소멸하는데는 조건이 필요치 않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죽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찰나생찰나멸의 존재라면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될 것이다. 마치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이 어느 세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마치 잠에서 깨어 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개구리가 천신으로 화생한 것에 대하여 "잠에서 깨어난 듯, 거기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보고”(Vism.7.51)"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본다면 인생은 마치 꿈과 같은 것이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꿈과 같은 것이다. 나이 드신 어른이 지난날을 회상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인생은 꿈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종게를 남긴 선사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을 꿈속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그다지 할 것이 없다. 어차피 꿈 깨면 본래 나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꿈속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꿈속의 나는 악행도 서슴치 않고 자행한다는 것이다. 꿈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강간도 한다. 오계를 어기는 삶이다. 인생을 꿈속의 삶으로 비유하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비유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에서 인생을 꿈으로 비유한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찰나찰나 알아차릴 것을 요청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물거품의 실체일 수 있는가?”(S22.95)


여름철 장마철에 폭우가 내리면 빗줄기가 땅바닥을 때린다. 이때 빗방울은 포말을 내며 사라진다. 계속 관찰하면 비가 내리는 것보다는 포말을 내며 사라지는 것만 있는 것 같다. 오온에서 느낌의 다발에 대한 것이다.

느낌은 물거품 같은 것이다. 물거품은 무상한 것이다. 물거품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물거품은 조건발생하지만 사라질 때는 조건이 필요치 않다. 그냥 사라진다.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생성과 소멸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머무는 기간은 극히 짧음을 말한다. , , , 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멸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찰나생찰나멸이라고 한다.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오온은 찰나생찰나멸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찰나생찰나멸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이 없다.

순간포착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무상을 보아야 통찰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치 달구어진 그릇에 던져진 참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형성들이 부수어진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Vism.20.65)라고 했다. 이처럼 찰나생찰나멸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무상, , 무아의 통찰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현상을 머무는 것이 보아야 한다. 그래서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했을 것이다. 모든 공덕중에서 위빠사나 수행공덕이 가장 수승함을 말한다.

오온은 지금 이순간에도 찰나생찰나멸한다. 계속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는 매순간 태어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와 같이 이러한 사실들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까닭에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형성들이 나타난다.”(Vism.20.104)라고 했다. 매순간 생일날인 것이다. 동시에 매순간 죽는 날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순간윤회한다고 볼 수 있다.

윤회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일생윤회이고 또 하나는 순간윤회를 말한다. 오온은 매순간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순간윤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생윤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 생도 조건발생이기 때문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발생하고”(S12.2)라는 정형구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이번 생과 다음 생을 연결하는 결생식이다.

오늘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 헛되이 보낸다면 하루 수명이 단축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수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집 바깥으로 나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사고도 순간에 일어난다. 오늘이 최후의 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멸의 원리를 아는 자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2021-04-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