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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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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21. 5. 11.

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행위를 하면 과보가 따른다. 이런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대개 괴로움이기 쉽다. 설령 즐거운 것이라도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족이다. 이래저래 괴롭다. 이를 행위의 두려움이라 해야 할까?

행위의 두려움은 결국 존재의 두려움이 된다. 왜 존재가 두려움일까? 그것은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오온은 괴로움 덩어리임을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생, , , 사가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어서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를 말했다. 최종적으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오취온(pañcup
ādānakkhandha)이 괴로움인 것이다.

우리는 괴로운 존재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사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먼저 툭 던졌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를 먼저 앞세운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먼저 내세운 것이다.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다. 사고가 터진 것이다. 품질사고가 났을 때 괴롭다. 손실이 발생 되어서 괴로운 것이다. 그럴 때 조금만 살펴보았더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다. 수습해야 한다. 원인은 나중에 따져 보아야 한다.

괴로움을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우리는 괴로움의 다발임을 말한다. 즉 오취온고의 존재인 것이다.

오취온은 괴로움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상태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설령 즐거운 일이 발생해도 일시적이다. 평온하다고 해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만다.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취온고가 된다.

오취온에서 ()’만 떼어내면 오온이 된다. 그렇다고 오온고가 되지 않는다. 오온에 집착해야만 고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오취온고의 존재라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인생이 괴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어떤 이는 방바닥을 하고 칠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보기 때문이다. 분별한다고 보는 것이다. 본래 내가 없는데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바닥을 손으로 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조사라면 주장자로 머리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오취온적 존재이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 부처님은 이런 사실을 알려 주고자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먼저 툭 던져 놓았다. 원인과 결과에서 결과를 먼저 말한 것이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먼저 설한 이유가 된다.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했을 때 부정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했을 때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재 자신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장 원증회고(怨憎會苦)를 들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이 그것이다.

팔고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괴로운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싫어 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고가 발생한 것도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일 매순간 발생되는 괴로움에 대하여 거룩한 진리라고 했다. 괴로움도 진리일 수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괴로운 존재라고 아는 것은 엄청난 지혜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가 본래 괴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마음의 빗장이 풀린 것이다. 철옹성 같던 성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을 담마라자(dhammar
ājā)라고 한다. 가르침의 왕이라는 뜻이다. 왜 왕(rājā)이라고 했을까? 전륜왕과 관계가 있다. 32상을 타고난 존재는 재가에 있으면 전륜왕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출가했기 때문에 법의 바퀴를 굴리는 가르침의 왕이 되었다.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Stn.554)


부처님은 왕이다. 진리의 왕임을 말한다. 진리의 왕으로서 부처님은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다. 그런데 이 바퀴는 후진불가라는 사실이다. 소가 끄는 수레바퀴를 연상하면 된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간다. 그래서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cakka appativattiya)”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했을 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며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사고와 팔고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 비로서 부처님의 고성제를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의 빗장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확신이 일어난다. 이것이 삿다(saddha)이다. 확신에 찬 믿음을 말한다.

고성제를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집성제도 멸성제도 도성제도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마치 부처님이 사군(四軍)을 이끌고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을 진리의 바퀴를 굴리는 가르침의 왕이라고 한다.

진리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 왔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법안이 생겨난 이래 진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굴러 온 것이다. 그런데 한번도 후진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만 가능하고 후진불가인 진리의 바퀴(Dhammacakka)’를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S56.11)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왕이라면 사령관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바라문 셀라가그렇다면 누가 당신의 장군입니까?”(stn556)라고 물어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부처님은위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싸리뿟따가 따라서 굴립니다.”(stn557) 라고 한 것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가르침의 사령관 또는 가르침의 장군인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가르침의 왕이고 사리뿟따는 가르침의 사령관이다. 그런데 부처님에게는 막강한 사군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 사군이 있었다.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전차부대, 보병부대를 말한다. 전륜왕은 사군을 이끌고 진격한다. 막강한 사군 앞에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부처님에게도 사군이 있다. 사성제라는 사군을 말한다. 부처님이 사성제의 진리를 설 할 때 마음의 성문을 열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사성제는 괴로움에 기반한 것이다. 그래서 팔정도경(S45.8)을 보면, “둑케 냐낭라 하여 괴로움을 알고, “둑카사무다예 냐낭라 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둑카니로데 냐낭라 하여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둑카니로다가미니아 빠띠빠다야 냐낭이라 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사성제를 알면 괴로움과 윤회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 보다 더한 복된 말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본래 괴로운 존재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본래 부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초기경전 어디를 보아도 본래불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본래 괴로운 존재라는 뜻의 오취온에 대한 가르침은 많다. 내가 본래 괴로운 존재라고 아는 것이 내가 본래 부처라고 아는 것보다 더 시급하다.

나는 오취온의 존재이다. 여기서 취(up
ādāna)를 떼어 내야 한다. 그러면 오온의 존재가 될 것이다. 아라한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범부들은 오취온적 존재이다. 그러다보니 오온이나 오취온이나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린다. 태어날 때 부터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범부의 오온은 자동적으로 오취온이 된다. 아라한이 되어서야 집착이 떨어져 나간다.

오취온적 존재에서 오온의 존재로 되려면 새로운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행위를 해도 과보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그렇네”, “그렇군”, “그랬구나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아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존재의 두려움을 말한다.

행위를 하면 존재로서 태어남을 유발할 수 있다. 그래서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운다.”(A4.22)라고 했다. 사소한 행위에서도 두려움을 보라는 것이다. 그 행위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되고 윤회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렇게 새벽에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치는 것도 가르침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본래 괴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2021-05-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