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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절박함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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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

2021. 5. 21.

수행은 절박함이 있어야

 

 

오늘도 여러 번 시도했다. 어제와는 달리 컨디션은 좋다. 어제는 졸립고 혼침이 와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좌선도 최상의 컨디션에서 해야 효과가 있다.

 

오늘 하루 이대로 보낼 순 없다. 반드시 1시간 앉아 있고자 했다. 오후 시간이 지나갈수록 초조 했다. 먼저 행선을 했다. 집중은 잘 되는 편이었다. 행선에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가면 효과적이라고 했다. 반대로 좌선에서 집중을 행선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일어서는 순간 깨져 버리기 때문이다.

 

요가매트를 사용해서

 

평소와 같이 두꺼운 방석에 앉아 있고자 했다. 평균 두께가 10센티는 되는 것 같다. 한번 접어서 앉으면 마치 안락의자에 앉는 것처럼 푹신하다. 반가부좌로 하여 앉으면 자꾸 앞으로 숙여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자세를 교정해야 한다. 여러 모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가매트에서 해 보면 어떨까?”라고 생각이 든 것이다.

 

 

어제 집에서 요가매트를 가져다 놓았다. 집에 있길래 가져온 것이다. 두 개가 있어서 문제가 없다. 처음에는 요가기본동작을 하기 위한 용도로 생각했다. 허리굴리기와 두발차기를 말한다. 요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두 가지만 하는 것이다. 두발차기를 하다가 갑자기 요가매트에서 좌선이 해보고 싶었다.

 

요가매트는 그다지 푹신하지 않다. 그 대신 탄력이 있다. 두께는 얇아도 탄력이 있어서 앉아 있어도 그다지 배기기 않는다. 엉덩이에 아무것도 받치지 않고 앉았다. 다리는 평좌로 했다. 평좌로 하면 오른쪽다리가 바닥에 붙기 때문에 안정적 자세가 된다.

 

엉덩이에 아무것도 받치지 않아서일까 앉은 자세가 안정되었다. 더구나 평좌로 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삼각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허리는 펴졌다. 두께 십센티에 달하는 안락의자와 같은 방석과는 느낌이 달랐다. 제대로 앉은 것 같다.

 

휴지기에 엉덩이 닿음 관찰하기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버텨 보기로 했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한시간으로 세팅해 놓았다. 두 손은 모아서 서로 겹치게 하고 엄지를 서로 닿을락말락하게 했다. 마음은 복부로 향했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함이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해야 한다. 잘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다. 내버려 두었을 때 보인다. 부품과 꺼짐을 따라가 본다. 꺼질 때 인터벌이 긴 것 같다. 이때 망상이 치고 들어올 수 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들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했을 때 휴지기에 엉덩이로 가라는 것이다. 누가 말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놓치면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생각이 망상이 되면 피곤하다. 망상에도 무게가 있는 것 같다. 힘이 쭉 빠진다. 배의 부품에 마음이 따라 가고 꺼짐에 마음이 따라 간다. 꺼짐에서 다시 부품을 관찰할 때 잠시 휴지기가 있다. 휴지기 때 인터벌이 있다. 일종의 관찰사각지대가 발생하난 것이다. 이때 잡념이 치고 들어 온다.

 

휴지기 때 엉덩이로 가야 한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것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부품과 꺼짐, 휴지기에 마음이 부품, 꺼짐, 엉덩이 닿음으로 따라 가다 보면 빈틈이 없어진다. 잡념이 치고 들어올 수 없다. 이렇게 계속 관찰해야 한다.

 

마음을 부품, 꺼짐, 엉덩이 닿음에 두자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망상으로 가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앞으로 이 방법을 이용하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 말한 것이 갑자기 생각나서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엉덩이 닿음에 대한 것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경험한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수행은 절박함이 있어야

 

나는 왜 자꾸 앉아 있으려고 할까? 앉아 있어 보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떻게 해야 한시간 버틸 수 있을까? 그렇다고 고행하자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을 관찰하여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궁극적으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뿌리를 뽑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앉아 있기가 이렇게 힘들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요가매트에 앉아 있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행은 절박함이 있어야 된다고. 절박감 없는 수행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절박감을 필요로 할까? 그것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목숨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절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수행에 임하기 전에 예비수행으로서 죽음의 명상(maranasati)’를 하는 것이다.

 

예비수행은 불수념,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이중에서 사수념이 가장 효과적인 것 같다. 본수행에 들어 가기 전에 먼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다. 수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절박감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수념 할 때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는 게송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발간된 예경지송이 있다. 마라나사띠 게송 중에서 !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지리라.”(Dhp.41)가 있다. 언젠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밤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절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밤 죽을 수도

 

좌선하는 것에 대하여 즐기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즐길거리로 넘쳐난다. 주로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좌선을 하면 감각은 모두 차단된다는 것이다.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있다. 그러나 잡생각이 치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절박감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 공부도 공부를 해야 할 당위성을 느낄 때, 즉 절박감을 느낄 때 제대로 할 것이다. 일을 할 때도 일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행하자고 한시간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있을 때 마음의 고삐를 죌 수 있다.

 

청정도론에 죽음에 대한 명상(maranasati)’하는 방법이 있다. 20여페이지에 걸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뭇삶의 목숨은 극히 짧아서 한 마음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Vism.8.3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음은 한호흡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숨을 들이 마셨다고 내 쉬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죽음명상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이 있다. 어떻게 죽음을 사띠하는 것일까? 먼저 오늘밤에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나, 전갈이 나를 물거나,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A6.20)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숲에서 사는 수행승에게는 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절박감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재수없게 뱀에게 물려서 오늘밤 죽는다면 억울할 것이다. 아직도 할 것이 많은 수행자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세시대라 하여 백세까지 수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늘밤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내가 먹은 음식이 탈이 나거나,…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A6.20)라고 했다.

 

경에서 걸려서 넘어진다는 것은 사고를 말한다. 오늘날로 따진다면 교통사고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죽음이 닥치는 것에 대하여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옷이나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오늘밤 사고로 죽을 수 있다. 그런데 하루도 수행자에게는 굉장히 길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을 살아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A6.19)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라고 했을 것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하루만 목숨이 주어져도 많은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 생멸을 보거나 불사의 진리를 보거나 최상의 진리를 보았다면 백년을 사는 것 보다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경에서는 더 단축하여 한호흡기를 말한다. 그래서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A6.19)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절박감이 있다면 한호흡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옷이 불붙고 머리가 불붙었는데, 그 옷이나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하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A6.20)

 

 

옷에 불이 붙었다면 당장 꺼야 할 것이다. 머리털에 불이 붙었어도 당장 꺼야 한다. 수행은 이런 절박감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밤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한호흡기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많은 것을 이루라는 것이다.

 

수행은 왜 하는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기 위해서 사는 것일까? 아니면 폼으로 하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수행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수행을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하다 죽으면

 

수행을 하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안심해도 될 것 같다. 다음 생에 다시 수행자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무탐, 무진, 무치를 원인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자는 생이지자임을 말한다.

 

전생에서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했다면, 이와 같은 세 가지를 원인으로 해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그래서 지혜를 갖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게송에서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는 생이지자, 즉 지혜를 타고난 자를 말한다. 그래서 수행하다 죽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행한 결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생에 지혜를 타고나는 조건이 된다. 이와 같은 선천적 지혜를 갖추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지혜를 갖춘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자이다.”(Vism.1.7)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한시간 앉아 있었다. 도중에 다리가 저려왔다. 평좌를 하면 거의 백프로 오른쪽 다리가 저린다. 30분 정도 지나자 오른쪽 다리가 슬슬 저리기 시작했다. 많이 앉아 보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러나 통증도 관찰대상이 된다. 사념처에서 수념처에 해당된다. 통증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다리저림이 점점 심해졌다. 이럴 때 두려운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 무슨 일 일어나는 거 아냐?”라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생각일 뿐이다. 두려움을 자아로 여기면 견딜 수 없다. 당장 다리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남의 다리 보듯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지 정신과 물질의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견딜만 하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다리를 풀었다. 타이머를 보니 50분 되었다. 10분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다리에 피를 돌게 한 다음 나머지 10분을 채웠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 좌선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첫번째는 요가매트에서 한 것이다. 요가매트에서 엉덩이를 받치지 않고 평좌로 했을 때 가장 이상적이었다. 앞으로도 이 방법을 사용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절박감이다. 수행은 절박감이 있어야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안락한 환경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바란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임해야 오래 버틸 수 있다. 또 수행한다고 하여 삐띠(喜悅)나 수카(幸福)을 기대한다면 역시 오래 하지 못할 것이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여 불선법을 뿌리 뽑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잘 할 수 없다. 다리에 통증이 왔으면 이를 남의 다리 보듯 하여 통증의 생멸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통증은 일어날만 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또 조건이 다하면 통증은 소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일어나서 풀어 버린다면 아직도 통증을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통증으로 인한 두려움 역시 자아와 동일시하면 나의 두려움이 되어 버린다.

 

두려움을 이겨 내야 한다. 인내를 가져야 한다. 오늘밤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으로 임해야 한다.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2021-05-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