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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삼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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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

2021. 5. 23.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삼매로

 

 

오늘도 한시간 앉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3분이 부족한 한시간이다. 다리를 풀다 보니 3분 남았던 것이다. 오늘 좌선은 대체적으로 성공으로 본다.

 

예비동작을 취했는데

 

좌선을 하기 전에 예비동작을 취해야 한다. 막바로 들어가기 보다는 마치 몸 풀듯이 예비수행을 하는 것이다. 자애관을 한다든가 죽음명상 하는 것이 좋다.

 

오늘은 이미우이음악 듣는 것으로 자애관을 대신했다. 이미우이음악을 듣다보면 희열이 일어나는데 그 기분을 그대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팔정도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빠알리어로 된 팔정도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면 상쾌하다. 하나도 틀리지 않고 암송했을 때 암송하는 맛을 느낀다. 10분가량 걸린다. 중요한 것은 행선이다.

 

육단계 행선하는 것이 좋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나아가고, 내리고, 닿고, 누루는 여섯 가지 동작을 말한다. 이러한 여섯 단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몇 분 한다면 집중이 생겨난다. 이 집중의 힘으로 좌선에 임하면 좌선에서의 집중도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

 

요가매트에 운전석 방석을 대고

 

요가매트에 앉았다. 가지고 있는 노기스로 재어 보니 두께가 8m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앉으면 배기지 않아서 좋다. 탄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매트에 대한 충고가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수행자가 엉덩이를 받칠 수 있는 것을 대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지고 있는 의자매트를 놓았다. 이것도 탄력이 있는 것이다. 면으로 된 것이 아니라 탄성이 있는 재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재작년 불교박람회장에서 산 것이다. 본래 운전석 매트용이다. 노기스로 두께를 재어 보니 15mm가 된다.

 

 

이미우이음악을 듣고,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육단계 행선을 짧게 한 후에 좌선에 임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장하다. 놀이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로로 하는 것도 아니다. 좌선을 통해서 생멸을 알고자 한다. 오온의 생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수행자의 충고를 받았는데

 

좌선에서 집중은 대체로 잘 되었다. 마음을 복부에 집중했다. 복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관찰하고자 한 것이다. 부풀고 꺼지는 것에 대한 움직임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휴지기에 엉덩이 닿음으로 가는 것이다.

 

복부의 부품, 복부의 꺼짐, 엉덩이 닿음 이렇게 세 가지에 마음을 따라 가고자 했다. 엉덩이 닿음 방식을 적용하면 잡념이 치고 들어오는 것이 줄어 든다. 특히 꺼짐 다음에 다음 부품을 관찰할 때까지 일종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일종의 마음의 사각지대와 같다.

 

휴지기에 잡념이 치고 들어온다. 그러나 휴지기에 마음을 엉덩이의 닿음에 두면 잡념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글을 썼더니 어느 수행자가 글을 남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하시 수행법에서 '엉덩이 닿음' 외에도 여러가지 '닿음'을 많이 씁니다.

닿음은 복부 꺼짐의 휴지기에 '앉음' 또는 앉음ㅡ 닿음을 연속으로 넣을 수 있습니다.

또한 복부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거나 더욱 촘촘히 알아차릴 때는 부품ㅡ꺼짐ㅡ앉음ㅡ왼쪽엉덩이 닿음, 부품ㅡ꺼짐ㅡ앉음ㅡ오른쪽 엉덩이 닿음.

또는 부품ㅡ꺼짐 ㅡ앉음ㅡ왼쪽 허벅지 닿음. 부품ㅡ꺼짐ㅡ앉음ㅡ오른쪽 허벅지 닿음, 등 순차적으로 확대해 가가기도 합니다.

이는 양곤의 마하시센터에서 그렇게 지도하였고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2 p75'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좌선의 자세는 평좌로 하시고 요가메트에 담요등을 직사각형으로 접어 엉덩이에만 살짝 걸치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 다양하게 시도해보시고 가장 편한 것을 찾으면 그것으로 계속하셔야 할 듯 합니다.

공연히 훈수두는 것 깉아 망설이다 경험을 공유하는 게 좋을듯하여 말씀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N법우님)

 

 

수행자는 마하시에서 오래 여러 해 수행한 재가수행자이다. 초심자를 가엽게 보아서 코멘트 준 것 같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관찰할 때 휴지기에 엉덩이로 마음을 가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마하시 수행지침서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고도로 집중해야

 

수행충고에 따르면 엉덩이로 마음을 가되 왼쪽, 오른쪽 엉덩이로 구분하여 마음을 둘 수도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도로 집중해야 할 것이다. 움직임 하나 하나 세밀하고 촘촘히 보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집중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카니까사마디(khaika samādhi)’라 하여 순간삼매를 강조한다.

 

카니까 사마디를 순간삼매, 찰나삼내 등으로 부른다. 그렇다면 카니까사마디는 경전적 근거가 있을까? 카니까사마디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정도론에서는 “행복을 잉태하여 성숙시키면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의 세 가지 삼매를 완성시킨다.(Vism.4.99)라고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찰나삼내는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와 함께 주요한 삼매로 간주 되고 있다. 찰나삼매는 움직이는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접삼매나 근본삼매 보다 더욱더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삼매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발간된 청정도론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DhpA.I.114; Sdk.9에 따르면, 삼매는 잘못이 없는 것에서 확립된 착하고 건전한 마음의 집중을 뜻한다. 거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순간적으로 마음에 현전하는 집중은 찰나삼매라고 한다. 2)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감각영역에 나타나는 집중상태는 근접삼매로 불린다. 3) 근본삼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세간적 근본삼매와 출세간적 근본삼매이다. 미세한 물질적인 세계의 선정과 비물질적인 세계의 선정에 도달한 마음의 강력한 집중상태는 세간적 근본삼매이고, 열반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길삼매와 경지삼매와 관계된 집중상태는 출세간적 근본삼매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 청정도론, 878번 각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번역된 청정도론에서는 세 가지 삼매에 대하여 주석을 근거로 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와 같은 친절함은 타 번역서와 차별화되는 것 같다.

 

찰나삼매는 순간적으로 마음에 현전하는 집중이라고 했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과 같은 움직임을 순간포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움직임에 고도로 집중해야 할 것이다. 육단계 행선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근접삼매(upacārasamādhi)와 근본삼매(appanāsamādhi)

 

위빠사나에서는 찰나삼매가 필요로 된다. 그런데 움직이는 대상이 아닌 고정된 대상에서는 근접삼매와 근본삼매가 필요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접삼매는 우빠짜라사마디(upacārasamādhi)라고 하고, 근본삼매는 압빤나사마디(appanāsamādhi)라고 한다.

 

근접삼매보다 근본삼매가 더 강력한 것이다. 근접삼매는 탐욕, 성냄 등 다섯 가지 장애(五障碍)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예비수행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수행에 앞서 자애관, 호흡관, 부정관, 죽음명상을 하는데 이와 같은 사마타 수행은 본수행에 앞서 행해지는 예비수행에 해당된다. 그래서 예비수행은 깊은 선정상태로 들어 가지 않고 단지 탐욕, 성냄,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과 같은 다섯 가지 장애가 일시적으로 억압된다.

 

욕망이 있는 상태에서 수행을 할 수 없다. 분노가 있는 상태에서 앉아 있을 수 없다. 본수행에 임하기전에 먼저 욕망을 내려 놓고 분노를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욕망을 내려 놓기 위하여 부정관 수행이 예비수행으로서 권장된다. 분노가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집중이 안될 것이다. 그럴 경우 자애명상을 하여 분노의 마음을 자애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자애관은 예비명상으로 활용된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 사람, 심지어 원한 맺힌 자에게 까지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내면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본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의 통일(cittekaggatamatta: 心一境性)에 대하여

 

자애관과 예비수행은 근본삼매가 아니다. 근접삼매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애관에 대하여 단지 마음의 통일이 생겨난 것에 다름아닌 기초적 삼매를 설한 것이다.”(Vism.9.114)라고 했다.

 

청정도론에서는 자애관 수행에 대하여 기초적 삼매라고 했다. 기초적 삼매는 물라사마디(mūlasamādhi)를 번역한 말이다. 뿌리가 되는 삼매를 말한다. 찰나삼매나 본삼매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수행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애관을 하면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집중된다. 이를 마음의 통일(cittekaggatamatta)’이라고 했다. 이를 한자어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본삼매에서 심일경성은 아니다.

 

심일경성은 본래 네 가지 선정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두 번째 선정에서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Vitakka-vicārāna vūpasamā ajjhatta sampasādana cetaso ekodibhāvaṃ)”(S45.8)이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심일경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심일경성은 예비수행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최초의 기초적 삼매라는 것이다. 본삼매가 아님을 말한다.

 

찰나삼매에 대한 경전적 근거

 

누구든지 마음을 집중하면 삼매에 들 수 있다. 일에 집중하면 일삼매가 되고, 독서에 집중하면 독서삼매가 되고, 뜨개질에 집중하면 뜨개질 삼매가 된다. 그러나 이런 삼매는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가장 기초적 삼매(mūlasamādhi)’에 지나지 않는다. 예비수행으로 활용되는 자애관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찰나삼매는 다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찰나삼매와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 두 갈래 사유의 경’(M19)에 관련 내용이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나는 안으로 마음을 확립하고 제어하고 통일하여 삼매에 든다.”(M19.12)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통일은 심일경성을 말한다. 예비삼매에서의 심일경성을 말한다.

 

예비삼매 또는 기초삼매에서 심일경성은 어떤 것일까? 이는 과도하게 사유하고 숙고하면 나의 몸이 피로해진다.”(M19.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과도한 사유와 숙고는 혼란으로 이끈다고 했다. 자애관을 하는데 있어서 과도하게 했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워 오히려 집중을 방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예비삼매서서 본삼매로 가야 한다. 이는 선정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리고 선정에서 나와 통찰(vipassana)를 개발한다.”(Pps.II.83)고 주석에서는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비수행으로서 자애명상을 하지만 과도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의 집중을 이루었다면 본삼매로 들어 가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본삼매에서 나와서는 통찰수행, 즉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찰나삼매에 대한 것이다.

 

찰나삼매와 관련하여 주석서 빠라맛따만주싸에서는 경전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이는 나는 안으로 마음을 확립하고 제어하고 통일하여 삼매에 든다.”(M19.12)라는 구절에 대하여, “정진과 새김의 두 가지 과정을 통해서 찰나적 삼매로서 인식되기 때문이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본 맛지마니까야, 1762번 각주)라고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삼매로 가능

 

자애관과 같은 기초적 삼매로 끝나서는 안된다. 예비수행에서 본삼매로 넘어가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그대는 이와 같은 기초적 삼매를 이와 같은 자애를 통해서 닦았으면, 그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이 기초적 삼매를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네 가지 선정이나 다섯 가지 선정을 성취시키면서 사유를 수반하고 숙고를 수반하는 선정 등의 방식으로 닦아야 한다.”(Vism.9.116)라고 했다.

 

자애수행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자애수행은 본수행을 위한 예비수행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애관관 같은 기초적 수행에 만족하지 말라고 했다. 더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종선 또는 오종선에 대한 것이다.

 

근본삼매(appanāsamādhi)를 닦기 위해서는 예비수행을 필요로 한다. 예비수행을 근접삼매(upacārasamādhi)라고 볼 수 있다. 자애관, 부정관, 호흡관, 사수념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근접삼매에서 그치지 말고 본삼매로 가라고 했다. 그런데 본삼매에서 첫번째 선정에 대한 것은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 savicāra”(S45.8)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이렇게 본삼매가 시작되는 것이다.

 

본삼매가 최종이 될 수 없다. 본삼매에서 나와서 통찰수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위빠사나수행이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삼매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세한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했을 때 오온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자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찰나삼매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찰나삼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물질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생겨난 마음을, 다음 찰나의 마음으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사유하면, 극미취로 사유한다.”(Vism.20.78)

 

 

청정도론에서는 찰나삼매에 대하여 극미취(極微聚)를 사유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아주 작고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찰나적 관찰을 요청한다. 그래서 찰나를 인식해야 한다.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본에서는 통각이라고 번역했다. 자와나(javana)를 말한다. 시중 번역서에서는 속행(速行)으로 번역되었다.

 

찰나삼매는 찰나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물질이나 정신이 매우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포착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온의 생성과 소멸은 이른바 발생, 유지, 파괴라는 세 가지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발생과 소멸만 있을 뿐이다. 매우 빨리 변화하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있어서 유지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있다면 순간적으로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순간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도 무상하고 그 물질을 관찰하는 마음도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찰나적으로 이루어진다. 고와 무아도 마찬가지이다.

 

명상 중에 부처님 가르침이 떠 올랐다면

 

오늘 한시간 앉아 있었다. 대체로 집중이 잘 된 편이었다. 배의 움직임을 따라 갔고 휴지기에 엉덩이 닿음에 마음을 두었다. 그럼에도 잡념은 치고 들어왔다. 찰나삼매가 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복부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집중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잡념이 일어나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즉각적으로 격퇴된다고 본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송아지를 기둥에 묶어 놓은 것과 같다.

 

송아지를 목줄로 기둥에 묶어 놓으면 줄의 길이만큼 움직일 것이다. 이를 명상용어로 고짜라(gocara)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행경(行徑)이라고 한다. 사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찰나삼매가 되어 집중이 잘 된 상태라면 사띠의 길이가 짧은 것과 같다. 그러나 사띠를 놓치면 줄을 놓치는 것과 같다. 그럴 경우 잡념이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망상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다. 마치 고삐풀린 망아지와도 같다.

 

마음을 복부에 두면 사띠의 줄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 상태에서 생각이 일어나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생각은 도움이 되는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Dhamma)을 말한다. 명상 중에 부처님 가르침이 떠 올랐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를 사띠(sati)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띠는 대상을 지켜 보는 것을 말한다. 또 대상을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치 송아지를 기둥에 묶어 둔 줄과 같은 것이다. 줄의 길이만큼 행경이 있다. 그래서 생각도 허용될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이 담마에 대한 것이라면 이것도 사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띠는 수행적 의미에서 사띠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런 수행기를 쓰지 말라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알릴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경전과 주석에 근거하여 쓰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누군가에 도움이 될지도.

 

 

2021-05-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