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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열사 서사를 통하여 광주민중항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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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

2021. 6. 16.

윤상원열사 서사를 통하여 광주민중항쟁을 본다

 

 

윤상원평전을 다 읽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읽다가 서서히 속도를 내었다. 마침내 오늘 삼분의 일을 다 읽어 냄으로써 모두 읽었다.

 

19805월 광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설령 안다고 해도 매스컴을 통해서 접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런 때 광주와 관련된 책이 쏟아져 나오는 듯하다. 윤상원평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사태가 일어난지 41년이 되었다. 그때 당시에는 광주사태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민주화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민중항쟁이라는 말이 더 와 닿는다. 왜 그런가? 민중들이 주체가 되어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총을 들고 저항했다.

 

무장투쟁의 합법성에 대하여

 

총을 든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한반도 서남단의 이름다운 도시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도정스님이 올린 글이다. 글에서 셋째, 5·18민주화운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인 저항권의 정당성과 나아가 그 저항권 수호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라는 대목을 접했다. 여기서 무장투쟁의 합법성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광주항쟁과 시민군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시민들이 무장을 해서 싸웠음을 의미한다.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을까? 윤상원평전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290)라는 성명서로 알 수 있다.

 

김상집선생이 쓴 윤상원평전은 시민군들의 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는 책 곳곳에서 보여지는 결사항전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했을 때 도청에 최후까지 남은 시민군들은 목숨을 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흘린 피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윤상원열사는 마지막날 외신기자회견을 열었다. 도청 지도부가 온건파에서 강경파로 모두 교체되고 난 다음 연 것이다. 어느 외신기자가 계엄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보잘것없이 무장한 학생 투사들은 저항하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항복할 것인가?”(336)라며 물었다. 이에 윤상원열사는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윤상원열사는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대하여 김상집선생은 책의 뒷표지에다 광주와 한국 민주주의를 구하고 장렬하게 산화하다!”라고 크게 써 놓았다.

 

김상집선생은 왜 산화하다라는 표현을 했을까? ‘장렬히 죽다또는 장렬히 전사하다라는 표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산화(散花)라고 한 것은 마치 꽃이 져서 흩어지는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805월 죽은 사람들은 모두 산화했다고 볼 수 있다. 꽃잎이 흩어지는 것처럼 피를 뿌리며 죽었기 때문이다.

 

 

광주민중항쟁을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무장투쟁을 한 경우는 광주민중항쟁이 아직까지는 유일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장투쟁을 한 것에 대하여 합법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앞으로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 나타나면 무장투쟁을 할 수도 있음을 말한다.

 

혹시라도 19805월 그때처럼 불법적인 쿠데타세력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주에서 무장투쟁에 대한 합법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광주민중항쟁은 그 이전의 민주화운동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항쟁 이전과 이후로 갈렸다고 볼 수 있다.

 

하층민중들이 주체가 되어

 

광주 망월동 묘역에 가면 그때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묘가 있다. 대부분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묘이다. 이에 대하여 윤상원열사의 멘토였던 김상윤선생은 책 녹두서점의 오월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민중의 힘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광주의 하층민들이 계엄군의 총부리를 뚫고 떨쳐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의 민중은 농민이나 노동자였다. 말하자면 실생활과 동떨어진 민중관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옆에 있는 그들에게 한없이 미안했고, 책 줄이나 읽고 운동가라고 여겼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녹두서점의 오월, 225-226)

 

 

김상윤선생은 5.18이 일어나기전에 예비검속으로 잡혀갔다. 광주항쟁기간 중에 상무대 영창에 있었다. 나중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구형받기도 했다.

 

김상윤선생은 민중에 대하여 노동자와 농민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광주에서 사태가 일어나자 노동자와 농민이 아니라 하층사람들이 민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태가 끝나고 상무대 영창으로 잡혀 온 상당수 사람들이 기층민중이었음을 말한다.

 

그때 당시 운동권과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대부분 피신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민들에게 신뢰를 주었던 학생지도부가 종적을 감춘 것이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은 하층민중들이었다. 이는 조폭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수들이 만행을 부릴 때 어느 조폭은 야 동생들아. 이 성이 저 쥐방울만 한 공수 새끼한테 마빡을 맞아부럿서야.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무담시 쌔려부러야. 저 새끼들 오늘 내가 가만 안 놔도불란다. 내 밑에 동생들은 다 내 뒤로 붙어라이! 오늘 저놈들하고 사생결단 해불란다.”(237)라고 말했다.

 

 

광주민중항쟁 도화선은 전남대 교문앞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전체 시민으로 확대되었다. 학생지도부는 잠적하고 지식인과 재야운동권은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기층민중들은 무장을 했다.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하층민중들의 무장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윤상원열사는 이런 모습에 답답해했다고 한다. 책에서는 운동권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있는 동안, 시민들은 어느새 탄약고와 무기고를 털어 단단히 무장한 것이다. 바로 그 무장한 시민들이 군중에게 집단 발포한 공수들을 응징하기 위해 광주시내로 진입한 것이다.”255)라고 했다.

 

학생과 지식인과 재야운동권이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광주항쟁의 주체는 시민들이 되었다. 그것도 하층민중들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무장을 했고 자발적으로 쿠데타군과 싸웠다. 당연히 희생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 이에 대하여 송기숙선생은 회고담에서 학생과 지식인, 운동권의 나약함에 대하여 과연 그들처럼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279)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있었다.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일어나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들이 일어나서 나라를 구한 것이다. 문자를 아는 지식인들은 몸을 사렸다. 후대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일수도 있다. 살아서 두 눈으로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면 몸을 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층민중들은 달랐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송기숙선생은 회고담에서 겨울이 되어야 솔이 푸른 줄을 알 듯 평소에는 모르지만 이런 때가 되어야 제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다운 사람들이었다.”(278)라고 했다.

 

윤상원 서사를 통하여 광주민중항쟁을 본다

 

윤상원열사는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야말로 결사항전을 한 것이다. 먼저 죽은 자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으러 도청으로 들어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비겁하게 숨어 버린 지식인들을 대신해서 죽으로 들어갔다고도 볼 수 있다.

 

윤상원열사는 죽어서 영웅이 되었다. 만약 살았다면 평범한 일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이 서른이라는 짧은 생을 마쳤는데 윤상원열사를 기억하는 한 영원히 산 자가 될 것이다.

 

윤상원열사에 대하여 이곳저곳에서 기념회를 열고 추모회를 연다. 또한 이렇게 윤상원평전이라는 책도 나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윤상원열사의 추모분위기와 관련하여 어느 페이스북 친구는 윤상원 열사 생가를 사적지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에 대하여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윤상원 열사 생가를 사적지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에 대하여)

 

윤상원 열사는 지금 상태로도 이미 오월의 꽃이다.
"
윤상원"의 서사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그의 생가를 사적지로 지정하자는 말이 들릴 때마다 윤상원 열사를 중심에 세우는 서사를 멈출 때에야 두 개, 세 개, 네 개, ... 더 많은 서사들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뚝한 마음이 일어난다.

5•18
민중항쟁이 한두 명의 영웅적 지도자에 의해 이끌어진 항쟁이 아닌 불의에 맞선 시민 집단의 항거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5•18
항쟁의 기록 속에서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진 날은 항쟁 5일째인 5 22일이다. 항쟁지도부는 5 25일 이후 등장한다. 열흘 간의 항쟁이라고 할 때, 항쟁 초기 5일 동안은 시민들이 지도부도 없이 이 나라 최정예부대의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들이 극악한 국가폭력에 맞서 맨 몸으로 싸우고 있었을까? 성당에서 미사드리던 신부님들이, 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이, 방직공장 종사자들이, 황금동 업소 여성들이, 대학 강단에 서던 이들이,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이, 구두 닦던 사람들이, 학생들이, ...,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리하였다.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들의 구호 선창과 시위 행렬에 맨 앞에 서서 나아갔던 시민들은 항쟁지도부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도시 곳곳에서 제 몫을 하고 있었을 것이나 항쟁의 중심 거리에 출렁이던 큰 물줄기는 줄곧 물러서지 않은 민중들이었다. 지금까지 이름이 호명되지 못한 수많은 너와 나, 우리들의 이웃이었다.

5•18
관련 스토리를 영웅 설화적 구조로 가는 것을 경계한다. 비범한 영웅 또는 대표적 상징을 설정하려다 "불의한 상황"에 노도와 같이 치솟았던 "범인의 분노"를 흐리게 하는 우를 범할까 걱정이다.

항쟁 당시, 그리고 이후 오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만인의 죽음의 무게는 서로 다를 수 없다. 5 18일 계엄군의 진압봉에 난타당한 김경철 열사의 죽음이, 5 21일 총탄이 쏟아지는 금남로로 태극기를 흔들며 뛰어든 이들의 죽음이, 27일 새벽 최후 항전에서 마지막 숨을 토할 새 없이 총탄에 쓰러진 이들의 죽음이 서로 경중을 달리할 수 없다.

"5•18
민중항쟁사적지"는 지역 안배로 지정되어서도 정치적 힘의 논리로 지정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5•18민중항쟁사적지 지정 요건이 있을거라는 상식적 사고도 놓치는 이들 입에서 "윤상원 열사 생가 사적지 지정" 필요성이 나올 때마다 나는 외려 고인을 부끄럽게 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윤상원 열사 생가"라는 장소성만으로도 열사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과유불급, 민중과 영웅 서사 사이 괴리가 커지지 않도록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물론 다양한 서사의 발굴은, 민중항쟁과 오월정신 기억과 계승을 위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덧말) 광산구에 사적지 지정이 필요하다면, 옛 광산경찰서 자리를 고려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20210601
빛고을 광주, 광주 사람 씀)

 

 

글쓴이는 더 이상 윤상원을 더이상 영웅으로 만들지 말아달라는 취지로 글을 썼다. 이는 윤상원생가를 사적지로 지적한다는 것을 반대하며 쓴 글이다. 윤상원열사도 죽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하층민중도 죽었다는 것이다.

 

글쓴이에 따르면 시위 행렬에 맨 앞에 서서 나아갔던 시민들은 항쟁지도부들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성당에서 미사드리던 신부님들이, 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이, 방직공장 종사자들이, 황금동 업소 여성들이, 대학 강단에 서던 이들이,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이, 구두 닦던 사람들이, 학생들이, ...,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이앞장섰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광주항쟁으로 수백명이 죽었다. 대부분 하층민중들이다. 윤상원열사와 같이 지식인이자 운동권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이를 영웅시하는 것에 대하여 약간은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에 윤상원열사의 멘토역할을 했던 김상윤선생은 다음과 같이 해당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았다.

 

 

윤상원의 이야기를 '영웅 서사'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사를 읽지 않고도 전봉준을 통해 동학농민봉기를 알 수 있게 되지요. 삼일운동사를 읽지 않고도 유관순 누나를 통해 삼일운동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듯이. 쿠바혁명사를 읽어보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은 체 게바라를 통해 중남미의 혁명운동을 가까이 느낍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보다는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을 통해 그 역사적 사건을 훨씬 가깝게 느끼게 되지요. 광주민중항쟁의 경우에도 윤상원의 활동을 통해 5•18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5•18을 자기 일처럼 느끼게 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윤상원의 서사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윤상원의 이야기를 영웅 서사로만 바라보면 잘못된 시각일 수 있겠습니다. 정영창이 그린 윤상원의 초상이 있습니다. 정영창은 윤상원의 눈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빛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지요. 윤상원에 대한 모든 서사는 정영창이 윤상원의 눈을 그린 자세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적지 지정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나온 이야기인가요?”(김상윤선생)

 

 

본문에서 글을 이어 붙이고 문단을 나누었다. 김상윤선생은 댓글에서 윤상원의 서사를 통해서 광주민중항쟁을 바라보자고 했다. 마치 체 게바라 평전이 쿠바혁명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시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한 인물의 서사를 통하여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윤상원열사의 생가를 복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본다. 이는 광주항쟁을 한사람에게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어느 자료에서든지 광주항쟁의 주체는 기층민중이었다. 구두닦이, 조폭, 고등학생, 재수생, 심지어 넝마주이와 술집 아가씨 들까지 하층민중이 주체가 된 항쟁이었다는 사실이다.

 

광주민중항쟁 특징 또한가지는 대동세상에 대한 것이다. 항쟁기간 중에 모두 한마음이 되었음을 말한다. 이는 책에서 동네 골목마다 누구나 밥을 해서 함께 나눠먹는 대동세상이 된 것이다.”(29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광주민중항쟁은 민주항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동세상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죽은 놈만 불쌍하다는데

 

업무로 만나는 사회친구가 있다. 그는 광주항쟁당시 현장에 있었다. 구호대로 활약했다고 한다. 마지막날 도청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아 들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 그 때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함께 길을 걷다가 가볍게 물어본 것이다. 그는 가볍게 죽은 놈만 불쌍하지.”라고 대답했다.

 

산 자의 입장에서는 죽은 자가 불쌍해 보일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았으면 할 수 있는 것 다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고 싶은 오욕락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 젊은 나이에 일찍 죽든지, 나이와 함께 늙어 병들어 죽든지 죽는 것에는 똑같다. 그러나 똑같은 죽음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된다며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 망월동에 누워 있는 희생자들은 짧게 살았다. 윤상원열사처럼 이름 있는 것도 아니다. 산 자들은 이들을 추모한다. 산 자들이 추모하는 한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 일찍 죽은 것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똑같이 불쌍한 존재들인 것이다.

 

 

2021-06-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