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그들은 어떤 권리로

댓글 1

진흙속의연꽃

2021. 7. 11.

그들은 어떤 권리로


"
예수님 믿으세요?" 길을 가다가 기습공격을 받았다. 오늘 정오 무렵 안양천과 학의천이 만나는 쌍개울 무지개다리에서 길거리 전도사와 마주쳤다.

여인은 70세가량 되어 보인다. 잘 차려 입은 교양 있는 모습의 노년의 여인이다. 스마트폰을 보고 걷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고 화들짝 놀랐다.

 

여인은 양산을 쓰고 무지개다리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질문에 급당황 했다. 스마트폰만 보고 걷다가 화들짝 놀란 것이다. 마치 여인이 놀래키려 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 불쾌의 마음이 지배했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빨리 통과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다. 아무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신속히 빠져나왔다. 여인은 뒷통수에다 대고 "예수 믿고 행복하세요."라고 말 했다.

 


다리를 중간쯤 건넜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에 대한 것이다.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으로 보여 말을 건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무나 붙잡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들에게는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아무나 붙들고 말 걸지 않은 것 같다. 보기에 좀 허수룩 하게 생긴 사람이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옷도 허름하게 입은 사람이 타겟이 되는 것 같다. 아마 나도 그런 부류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대상이 된 것 아닐까?

다리를 건너기 전에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아무나 붙잡고 민폐끼치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되돌아 가서 꼭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피해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 마음부터 다스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분노가 일어난 그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나는 위빠사나 수행자 아닌가?

길거리 선교 효과는 얼마나 될까? 널판지로 시냇물 때리기와 같다. 물고기는 다 도망가고 피래미 몇 마리 잡힐 것이다. 더구나 예수 믿으라고 했을 때 더욱 더 멀리 달아나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세련된 전도 방식을 채택하는 것 같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고 "커피 드시고 가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종종 티슈나 사탕을 주기도 한다. 예전 같았으면 물리쳤을 것이지만 요즘은 받아 준다. 이것도 자비의 마음일 것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학의천을 걷다가 수많은 길거리 전도사를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기습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깜짝 놀래키는 것 같다. 최악은 자전거 타고 가면서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서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시간차 공격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고교시절 기독교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소위 미션스쿨에 배정받아 3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미션스쿨에서 기독교는 강제 종교교육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모두 기독교신자로 만들고자 하는 것 같았다. 교훈도 '기독적 인격'이었다. 뺑뺑이이로 들어온 사람 중에는 비기독교인도 많았을 것이다. 불교를 종교로 가진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학교를 들어온 이상 예배와 찬송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불교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불교정서가 강하게 지배했다. 이런 상태에서 강제적 기독교 교육은 가혹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폭력이었다. 예배와 찬송을 거부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강요되는 예배와 찬송에 속수무책이었다.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전학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속으로만 고민했었다. 어서 지옥같은 3년이 빨리 지나 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고교 1학년 때 정신적 방황은 극에 달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없었다. 예배와 찬송시간이 되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부정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성경시간과 일주일의 두 번 방송예배 시간이 있었다. 거의 매일 예배와 찬송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사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속으로는 열렬히 부정했다.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하는 순간 나의 영혼이 지배당할 것 같았다.

예배와 찬송시간은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신자들에게는 더 없는 은혜로운 시간이었는지 모르지만 사춘기 내성적인 청소년에게는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 되었다. 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상담할 사람도 없었다.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하루 빨리 세월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그 결과 성적은 곤두박질 쳤다. 60명 중에 50등대가 된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가 되어서 정신이 들었다. 그때 당시 우반과 열반이 있었는데 똘반이라 불리우는 열반에 떨어진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예배와 찬송이 싫다고 하여 학업까지 멀리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큰 결심을 했다. 방학때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3학년 때 결과로 나타났다. 반에서 4등한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따로 불렀다. 과외하느냐고 물었다. 종로로 학원 다닌 것밖에 없었다.

길거리 전도사가 놀래키듯이 말 했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때 그시절 쓰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체 그들은 무슨 권리로 예수를 강요하는 것일까? 정부에서 그들로 하여금 아무나 붙잡고 전도해도 된다고 면허증이라도 주기라도 한 것일까?

길거리 전도는 대단히 무례한 행위이다. 그들은 무엇을 믿고 아무나 붙잡고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일까?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닐까? 오로지 기독교인만이 이런 행위를 한다. 대단히 불쾌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불쾌를 알고있기나 한 것일까? 알고 있다면 무례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한 여인에게 꼭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길거리에서 사람 놀래키듯이 아무나 붙잡고 전도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입니다."라고. 그러나 이내 그만 두었다. 그 대신 나의 마음에서 일어난 분노를 보았다. 그것은 고교시절 당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고교시절 무방비 상태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 여인으로부터 똑같은 말을 듣자 분노가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수행자이다. 여인에게 화풀이해서는 안된다. 나의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사념처에서 심념처가 있다. 심념처에서 분노와 관련하여 이런 가르침이 있다.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


전도사 여인이 예수 믿으라고 했을 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 수행자라면 이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를 경에서는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라고 표현했다.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분노의 마음이라고 아는 것을 영어로 노팅(noting)이라고 한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분노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만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노의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분노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서 알아차린 마음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부처님은 분노라고 알아차린 그 마음을 한번 더 알아차리라고 했다. 그래서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했다. 이를 영어로 왓칭(watching)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분노가 일어 났을 때 두 번 알아차리라고 했다. 노팅한 것을 왓칭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두 번 알아차리라고 했을까?

만일 분노를 분노라고 아는 마음으로 그친다면 "나에게 분노를 분노라고 아는 마음이 있다."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이는 자만이다. '내가 있다'는 자만을 말한다. 그래서 한번 더 알아차려야 한다.

분노를 분노라고 아는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려서 분노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아야 한다. 마치 확인사살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이중으로 알아차리면 분노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오늘 전도사 여인으로 인하여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 과거 쓰린 기억과 연계되어 폭발직전까지 갔으나 곧바로 알아차렸다. 무례한 여인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이내 나의 마음을 알아 차렸다.

길거리 전도는 역효과만 볼 것이다. 물고기를 잡자고 널판지로 물을 때리는 것과 같다.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 번에 마주치면 ", 수고하세요."라고 말해야 주어야겠다.


2021-07-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