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불교학자는 불교철학하자는 건가?

댓글 0

담마의 거울

2021. 7. 27.

불교학자는 불교철학하자는 건가?

 

 

불교학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가 업과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불교학자라고 볼 수 없다. 불교철학자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이 불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삼법인이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닌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자아, 아뜨만, 영혼, 불성, 참나, 진아 같은 것을 말한다면 불교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교 비슷한 것일 수는 있다.

 

그가 불교인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가 삼보에 귀의하지 않았다면 그는 불교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승가(Sangha)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늬만 불교인도 있을 것이다.

 

연초에 어느 불교학자와 갈등이 있었다. 업과 윤회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은 업에 대하여 업설이라고 했고, 윤회에 대하여 윤회설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강하게 어필했다. 비판에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지만 곧바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부처님 핵심 가르침에 대하여 ()’로 말한 것에 분개한 것이다.

 

불교학자라고 해서 모두 업과 윤회를 믿는 것은 아니다. 학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법칙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업설이나 윤회설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본다.

 

불교학자의 책이 있다. 책을 보지 않았다. 책을 처음 조금 보다 말았다. 책의 시작에서 본 연기설이라는 말이 결정적이다. 연기론도 아니고 연기법이라고 해야 하나 초장부터 연기설이라고 한 것에 자극 받아 읽어 보지 않았다. 읽어 볼 마음도 나지 않았고 읽어 볼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부처님 가르침이 설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불교학자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설로 밖에 보지 않는다면 일반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볼까?

 

학자는 이론을 세워야 한다. 나름대로 독특한 이론체계를 세워야 인정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 이론체계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차별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연구원이 특허를 출원할 때 기존 방식과 차별된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느 불교학자는 자신이 최초로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해석했다고 말한다. 유튜브 강연에서 그는 지금까지 전승된 기존의 이론은 전부 다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부정한다. 중론에 의거한 자신의 해석방법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학자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설로 친 것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했다. 이런 불쾌가 문제가 되어 갈등이 일어났고 사태는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이른바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무례를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켠에는 의문이 남아 있다. 그리고 한켠에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불교학자가 가르침을 썰로 보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책을 읽어 보면 인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중립적 입장이다. 학자라면 그런 입장을 보여야 하는 것 같다.

 

학자가 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를 그대로 믿는다면 학자인 것을 의심받게 될 것이다. 학자라면 비판적 시각에서 분석적으로 써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로 보았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설로 보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에 법으로 본다. 당연히 연기도 연기설이 아니라 연기법으로 본다. 업도 업설이 아니라 업의 법칙으로 본다. 그렇다면 왜 연기가 설이 아니라 법인가? 이는 부처님이 여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는 원리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기설이라고 한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용어를 써도 되는 것일까?

 

초기경전 도처에서 부처님의 업과 윤회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말씀하셨다.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을 과거불이라고 한다. 법구경에서는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3)라고 했다. 여기서 모든 깨달은 님들은 과거불을 말한다. 과거불이 한결같이 말한 것은 제악막작이고, 중선봉행이고, 자정기의이다. 마찬가지로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과거불은 한결같이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업이 설이 아니라 진리임을 말한다. 업설이 아니라 업의 법칙인 것이다.

 

연기는 연기설이 아니고 연기법이다. 업은 업설이 아니라 업의 법칙이다. 윤회도 윤회설이 아니라 윤회의 법칙이다. 깨달은 자가 말하면 모두 진리의 말씀이 된다. 연기와 업, 윤회는 깨달은 자가 말한 것이다. 그래서 진리가 된다. 하물며 학자가 설이라고 한다면 이를 진실로 인정해야 할까?

 

학자의 영역이 있을 것이다. 학문을 탐구하다 보면 과학적 사실과 근거를 들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학자들 역시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업과 윤회에 대하여 말하기 꺼려 하는 것 같다. 현세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적극성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나 체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코멘트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는 부정하는 듯하기도 하다. 만약 그가 업과 윤회를 인정하여 업과 윤회의 법칙이라고 했을 때 곤경에 빠질지 모른다. 이를 증명하라고 했을 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설이라 하고 또 윤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불교학자들은 이 땅의 오피니언리더들이다. 그들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학위도 있고 저술도 있어서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권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았을 때 몸을 사리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이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기존 이론을 밟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불교학자의 말이라고 하여 다 믿을 것이 아니다. 믿어야 할 것은 전승된 부처님 가르침이다. 방대한 가르침을 읽으면 답이 나온다. 마치 천을 짜는 것처럼 교차되어 있기 때문에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업과 윤회가 설이 아니라 법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업과 윤회이다. 불교에서 이 두 가지를 빼 버리면 철학이 된다. 불교인들은 불교철학하자고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불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니까야를 읽는 것이다.

 

니까야는 어떤 것일까? 주제별로 되어 있는 상윳따니까야가 가장 좋다. 재가자를 위한 윤리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앙굿따라니까야도 좋다. 좀더 심오한 가르침을 원한다면 맛지마니까야를 읽어 보아야 한다. 신심을 기르려면 웅대한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는 디가니까야가 좋다.

 

초심자에게 어떤 경전이 좋을까? 아무래도 초심자에게는 법구경만큼 좋은 것이 없다. 게송도 좋지만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불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서로는 어떤 것이 좋을까? 가장 좋은 것은 청정도론이다. 청정도론은 오부 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 대해서 궁금한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나온 것으로는 파옥 사야도의 업과 윤회의 법칙도 좋다.

 

불교 블로거로서 오랫동안 글을 써 왔다. 주로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한 글쓰기이다. 그러나 권위가 없다. 학자와 같은 권위가 없는 것이다. 학자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쓰라린 아픔을 겪은 바 있다. 이렇게 글로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사실은 학자들은 철학자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종교인이 아님을 말한다. 학자로서 부처님 가르침을 파악하고자 했을 때 설이라 할 수밖에 없고 좀 더 잘 봐 준다면 논(論)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법이나 법칙이라는 말을 쓰는데는 인색한 것 같다.

 

학자라고 해서 항상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교학자라면 비판도 좋지만 신심 있는 글쓰기도 보여주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에 연기설이라고 하는 것보다 연기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업에 대하여 업설이라고 하기 보다 업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고, 윤회에 대하여 윤회설이라고 하는 것보다 윤회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학자들은 이런 용어에 대단히 인색한 것 같다.

 

불교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철학이기도 하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썰로 말한다면 이는 불교를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격하시키는 것과 같다. 마치 불교를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 내리고자 하는 것과 같다. 타종교의 학자와 다를 바 없는 태도이다. 지금 불교학자는 불교철학하자는 건가?

 

 

2021-07-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