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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날 때 외는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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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21. 7. 29.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날 때 외는 주문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일까? 이제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오늘 아침 불현듯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그마에 사로잡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사람에 대해 안다면 얼마나 알까? 함께 살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연애와 결혼이 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럼에도 그 사람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생각했을 때 실망하기 쉽다. 그 사람의 결점이나 단점을 보고서 전체로 보는 착각이 일어날 수 있다.

누구나 결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누가 판단하는가?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결점이나 단점은 사람에 따라 아닐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매력이 될 수도 있고 장점도 될 수 있다.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한 상대적이다.

십인십색이라고 한다. 얼굴모양 다르듯 성향 또한 모두 다름을 말한다. 그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는 나와 다른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하여 틀리다고 보면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난다. "그 사람 틀려 먹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하지 않게 된다. 한번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절대와 상대가 있다. 절대는 자아에 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상대는 무아에 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아라는 절대적 개념에서 본다면 아닌 것은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무아라는 상대적 개념으로 본다면 아닌 것은 아닌 것이 아닐 수 있다.

절대적 개념에 빠지면 극단이 된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도 알 수 있다.

"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

경에서는 절대유와 절대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절대유는 절대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다'는 영원주의를 말한다. 절대무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육체가 무너져 죽으면 육체에서 파생된 정신도 무너져 죽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 양극단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양극단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망상이고 개념이고 허구임을 말한다. 있다면 연기법이 있을 것이다. 연기법은 다름아닌 중도인 것이다.

연기법이 왜 중도일까? 연기법을 이해하면 너무나 자명하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따르면 양극단은 발 붙일 수 없다. 이것이 없으면 당연히 저것도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했다.

"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짤막한 이 말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무너졌다. 부처님이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고 했을 때 영원주의는 부서졌다. 또 부처님이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고 했을 때 허무주의가 부서졌다. 단 두 마디에 견고한 삿된 견해가 거짓이 된 것이다.

세상을 보는 두 개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와같은 존재와 비존재에다 절대라는 말을 붙이면 절대유와 절대무가 된다는 것이다.

영원주의자는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하여 절대로 있다고 말한다. 불변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마음이나 정신이라거나 의식이라고 하는 그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항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D1.42)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에 대한 절대를 말한 것이다. 모든 것은 절대로 존재함을 말한다. 다른 말로절대유(
絶對有)’라 할 것이다.

허무주의자는자아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본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함께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정신이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유물론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이 자아는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만들어지고,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으로 몸이 파괴되어 단멸하면 사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D1.87)라고 말한다.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절대무(
絶對無)’를 주장한다.

부처님은 중도를 설했다. 절대유와 절대무의 양극단을 떠난 것이다. 부처님은 절대유의 영원주의와 절대무의 허무주의를 연기법으로 극복했다. 골자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이다. 이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에 대한 것이다.

절대무라는 허무주의적 견해는 연기의 생성의 원리에 대입하면 무너진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의 순관을 적용하는 것이다. 조건발생하여 다시 형성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보는 절대무로서 극단은 역시 거짓이 된다. 그래서 허무주의가 논파된다.

절대유라는 영원주의적 견해는 연기의 소멸원리를 적용하면 무너진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도 소멸한다."라는 연기의 역관을 적용하는 것이다. 무상하게 조건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절대유로서의 극단은 거짓이 된다. 그래서 영원주의가 논파 된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공통적으로 자아에 기반한다. '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이 된다. 지금 그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도 '내가 있다'는 자아에 기반한다. 좋아도 내가 좋은 것이고 싫어도 내가 싫은 것이다.

자아에 기반하다 보면 같은 사람이라도 다르게 보인다. 어떤 이에게는 혐오적으로 보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모두 이미지로 보는 것이다. 과거 경험했던 것이 바탕이 되어 표출된 것이다. 이를 아상이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상이 있다. 오온에서 말하는 산냐를 말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나는 것은 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잘 해 준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가 있고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 대해서는 불쾌한 이미지가 있다.

상을 타파하라고 말한다.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것도 무아상이다. 아상을 깨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처럼 중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을 알면 치우치지 않게 된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살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자주 만나서 토론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한면만 보고서 판단하려 한다. 과연 그 판단은 옳은 것일까?

그가 자신의 주관에 따라 판단한다면 실수하기 쉽다. 자신의 견해가 들어 갔을 때 호불호와 쾌불쾌가 발생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었을 때 좋으면 '죽어라' 좋아하고, 싫으면 '죽어도' 싫은 것이다. 이는 양극단이다.

연기법을 모르면 극단이 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다름아닌 상호의존이다. 또한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는 다름아닌 조건발생이다.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을 안다면 집착할 것이 없다.

오온은 조건발생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어느 것 하나 가만 있지 않다. 모두 다발을 이루어 순간순간 변해 간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아나 영혼 등과 같이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있다'라며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한번 아니면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것 같다.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있다'라는 견해를 내려 놓았을 때 아닌 것은 아닌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났을 때 다음과 같은 주문을 외워본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2021-07-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