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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돌아 가고 싶지 않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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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21. 9. 29.

과거로 돌아 가고 싶지 않은 것은

 

 

옛날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 갈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십년전이나 이십년전, 삼심년전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흔쾌히 승낙할 수 있을까?

 

유명작가들이 있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금이 좋다고 했다. 옛날로 돌아 간다면 이제까지 해 왔던 과정을 똑같이 반복할 것이기 때문에 싫다고 했다. 한번으로 족함을 말한다.

 

왜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실현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는 이유가 큰 것이기는 하지만 젊은 시절은 무명과 고뇌로 가득한 시절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회귀거부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하고

 

디가니까야를 보다가 과거회귀거부에 대한 근거가 되는 비유를 발견했다. 꼬살라국의 빠야씨 왕자가 부처님의 제자 깟싸빠 존자와 나눈 대화에서 확인한 것이다. 어떤 내용일까?

 

빠야씨 왕자는 허무주의자였다. 달리 허무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자는 선행을 하면 선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업을 쌓아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죽어서 아무도 돌아온 사람들이 없었다. 죽기전에 말한 것이 거짓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약속했다. 하늘나라에 태어나면 반드시 돌아와서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려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왕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존자 깟싸빠여, 이러한 이유로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D23.6)라고 말하고 다녔다.

 

불교에서는 지계와 보시를 강조한다. 특히 보시를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보시를 많이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하늘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면 믿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저 세상은 없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다. 이를 단멸론이라고 한다.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면 허무주의자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 된다. 저 세상도 없고 하늘나라도 없는데 보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허무주의자에게 보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사기친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선행을 하면 선과보가 따르고, 악행을 하면 악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허무주의자가 되면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D23.1)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선행을 해서 하늘나라에 태어났다면 하늘나라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해준다면 선과보를 믿을 것이다. 악행을 해서 지옥에 태어났다면 돌아와서 지옥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해준다면 악과보를 믿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천상이나 지옥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에서는 지옥이나 천상에 태어난 자가 왜 돌아와서 이야기해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지옥에 대해서는 흉악한 도둑의 비유를 들었고, 천상에 대해서는 똥구덩이의 비유를 들었다. 그리고 서른 셋 하늘나라의 비유눈먼 봉사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지옥에 화생한 자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

 

첫째, 흉악한 도둑의 비유이다. 이는 지옥에 화생한 자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어떤 것일까?

 

여기 흉악한 도둑이 있다. 그는 붙잡혀서 처형될 운명에 처해 있다. 대로 사거리에서 칼로 목을 베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다.

 

죄인은 칼을 들고 있는 사형집행관에게 부탁한다. 죽기전에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나 도시에 저의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있는데, 제가 그들을 만나고 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D23.8)라고 말한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 죽어가는 자에게도 마지막 소원은 있을 것이다. 죽기전에 부모나 형제, 친구, 친척을 만나고 싶다고 할 때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형을 앞두고 있는 흉악한 범죄자라면 이를 허락할 수 있을까? 지옥에 태어난 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옥에 태어난 자는 돌아와서 지옥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이는 흉악범이 처형을 앞두고 부모, 형제, 친척을 만나 보고 싶다고 집에 한번 보내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왕자는 지옥에 떨어진 자가 되돌아와서 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라고 알려 주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송차에 갇혀 있는 범죄자는 틈만 나면 달아나려 할 것이다. 감옥에 갇힌 자들은 탈옥을 꿈꾼다. 과연 범죄자의 말을 믿고 부모, 형제, 친척 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들어줄 수 있을까? 지옥에 떨어진 자가 지옥을 실상을 알려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세상에 잠시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했을 때 들어줄 수 있을까?

 

지옥은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옥에 있다가 다시 사람 사는 세상에 돌아왔을 때 다시는 비참한 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한번 인간세상으로 오면 다시는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옥지기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옥에 떨어진 자는 인간세계에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둘째, 똥구덩이의 비유이다. 깟싸빠 존자는 왜 똥구덩이 비유를 들었을까? 이는 인간세상이 똥구덩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간세상은 더러운 곳, 악취가 나는 곳, 혐오스러운 곳, 역겨운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인간세상에서 사람들이 탐, , 치로 살아 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천상세계와 비교된다.

 

천상에 태어난 자는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지계하고 보시하는 등 선업공덕을 쌓은 자가 천상에 태어났다면 인간세상으로 돌아와서 천상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깟싸빠 존자는 똥구덩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인간들은 신에게 더러울 뿐만 아니라 더러운 것으로 알려진 것이고, 악취가 날 뿐 아니라 악취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고, 혐오스러울 뿐 아니라 혐오스러운 것으로 알려진 것이고, 역겨울 뿐 아니라 역겨운 것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왕자여, 인간의 냄새는 백 요자나 떨어져도 신들을 괴롭힙니다. 그대의 친구들과 동료들과 친척들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행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하는 것을 삼가고, 욕지거리 하는 것을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탐욕을 부리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품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가져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천상의 세계에 태어났다면, 그들이 그대에게 와서 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라고 알려 주겠습니까?”(D23.10)

 

 

똥구덩이에 빠져 본 적이 있다. 유년시절 시골에 살았는데 어느 날 변소에 다리가 빠졌다. 어른이 논가로 데려가서 똥을 닦아준 기억이 난다. 똥구덩이에 빠져 보면 다시는 똥구덩이에 빠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천상세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세상은 똥구덩이와 같다는 것이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난다. 하물며 똥구덩이 빠진 자의 악취는 어떠할까?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는 악취가 나는 자와 같다. 십악행을 하는 자 역시 악취가 난다. 경에서는 십악행을 하는 자에게 대하여 더러운 것, 악취나는 것, 혐오스러운 것, 역겨운 것으로 묘사했다.

 

천상의 존재가 인간을 본다면 악취가 날 것이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나는데 십악행을 하는 자들을 보면 마치 똥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럴 때 천상의 존재가 천상의 삶을 알려 주고자 다시 인간세상에 올 마음이 생겨날까? 그래서 깟싸빠 존자는 왕자에게 궁전 위로 올라가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대상들을 갖추고 구족하고 누리고 있다면, 다시 그가 똥구덩이에 빠지고 싶겠습니까?”(D23.10)라며 되묻다. 천상에 태어난 자가 인간세계에 되돌아 오지 못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인간의 백년은 신들에게는 하루 밤낮

 

셋째, 서른셋 하늘나라 신들의 비유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삼십삼천은 신심과 함께 지계하고 보시하는 자들이 태어나는 수승한 천상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한 하늘사람이 환희의 동산에서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소유하고 구족한다.”(S1.11)라고 묘사되어 있다.

 

천상의 수명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인간의 백년은 서른셋 하늘나라의 신들에게는 하루 밤낮에 해당됩니다.”(D23.12)라고 되어 있다. 세상도표를 보면 삼십삼천의 수명은 1,000천상년이다. 이를 인간세상으로 따져 보면 무려 36백만년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년 안팍이다. 그런데 삼십삼천에서 하루는 인간세상의 백년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는 법구경 48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를 보면 실감난다.

 

삼십삼천에 천상에 살던 천녀가 갑자기 죽었다. 그녀는 인간으로 태어나 아들딸 낳고 수명대로 살다가 다시 천상에 태어났다. 자신이 살던 천상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과 같다. 그러자 천신 말라바린은 천녀에게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었다.

 

천녀는 자신이 죽어서 인간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했다. 그리고 인간세상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마치 천년만년 살 것 처럼 방일하며 산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들은 천신 말라바린은 당신이 말한 대로 인간들이 태어나 겨우 백년을 사는데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DhpA.I.363-366)라며 천녀에게 되물었다.

 

인간의 수명과 천상의 수명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천상에서 하루는 인간에게 백년에 해당된다. 이런 이유로 천상에 화생한 존재가 인간세상으로 내려와서 천상의 실상에 대하여 알려주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영화 그래비티(Gravity)에서 보는 것처럼 엄청난 시간이 흘러 버렸을 것이다.

 

깟싸빠 존자는 허무주의자가 된 왕자에게 허무주의라는 사견을 깨주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었다. 앞서 흉악한 도둑의 비유를 들어 지옥의 존재가 인간세상에 되돌아올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고, 또한 똥구덩이의 비유를 들어 천상의 존재가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렇게 설명했음에도 왕자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깟싸빠 존자는 이번에는 천상의 수명과 관련된 서른셋 하늘나라 신들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천상의 하루는 인간의 백년 보다 더 길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왕자는 이해했다. 그래서 존자 깟싸빠여, 그럴 수 있습니다.”라며 시인했다. 그러면서 존자 깟싸빠여, 우리는 이미 죽은지 오래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D23.12)라며 인정했다.

 

천상에 태어난 자가 인간세상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자 마자 돌아와야 할 것이다. 천상에서 하루는 인간에서 백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천상에 태어난 자가 천상의 실상을 알고 천상 체험을 하고 난 다음 인간에게 이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되돌아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모두 죽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천상에서 며칠 보낸 후에 돌아왔다면 그때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이 그대에게 와서 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라고 알려 주겠습니까?”(D23.10)라며 되묻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

 

넷째, 눈먼 봉사의 비유이다. 깟싸빠 존자는 갓가지 비유를 들어서 사견에 빠진 왕자에게 왜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왕자는 저는 서른셋 하늘나라의 신들이 존재한다.’라든가 이처럼 긴 수명을 가졌다.’라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유물론자의 특징이 있다. 오로지 물질에 대한 것만 탐구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당연히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죽어서 되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적 유물론자들도 내세와 윤회를 믿지 않는다.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물질만을 믿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은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신은 믿을까?

 

유물론자들에게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은 뇌의 화학작용에 따라 발생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빠야씨 왕자도 이와 같은 유물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깟싸빠 존자는 눈먼 봉사의 비유를 들어 허무주의를 깨고자 했다. 먼저 왕자여, 예를 들어, 태어날 때부터 눈 먼 봉사는 어둡거나 밝은 색을 보지 못하고, 푸른 색을 보지 못하고, 노란색을 보지 못하고, 붉은색을 보지 못하고, 고동색을 보지 못하고, 평탄하거나 울퉁불퉁한 것을 보지 못하고, 별들을 보지 못하고, 달과 태양을 보지 못합니다.”(D23.13)라고 말했다. 선천적으로 장님인 자들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이 있는 자들은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깟싸빠 존자는 왕자여, ‘나는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올바로 말한 것입니까?”(D23.13)라며 되묻는다. 마치 오늘날 과학적 유물론자들에게 묻는 것 같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말이다. 저 세상을 말하지만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죽어서 되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빠야씨 왕자도 그랬다. 정말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지구 반대편 아마존 밀림에 어떤 종족이 사는지 알 수 없다. 내 눈으로 보지 직접 보지 않았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더 확장하여 천상이나 지옥을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깟싸빠 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왕자여, 저 세상은 그대가 생각하듯, 이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왕자여, 한가한 숲이나 우거진 숲속의 조용하고 한적한 외딴 처소에서 사는 저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거기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하늘눈을 개발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이 세상도 보고 저 세상도 보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봅니다. 왕자여, 이와 같이 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D23.23)

 

 

깟싸빠 존자는 천안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한다. 천안통은 선정수행을 하면 계발된다. 색계 사선정을 닦으면 천안통이 열린다고 초기경전 도처에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그럼 신통을 보여줘봐. 그러면 믿을 게.”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사선정을 닦아서 확인해 보십시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관대로 산다. 그리고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고 했다.

 

일반사람들이 보는 눈과 깨들은 자들이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마치 한공간에 개와 함께 살고 있지만 개는 개의 세계에 살고 인간은 인간의 세계에 사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여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못보았을 뿐이다.

 

경전에 따르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눈이 있다. 이를 지혜의 눈이라고 한다. 혜안을 가진 자들은 일반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은 지혜가 있다. 이는 혜안이 있음을 말한다. 하물며 선정수행을 한 자에게 천안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하는 말은 아마도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가 될 것이다.

 

허무주의를 논파하기 위해서

 

그동안 허무주의를 논파하기 위한 수많은 글을 썼다. 주로 유물론자에 볼 수 있는 단멸론을 논파하기 위한 글이다. 그런데 이번에 디가니까야를 보면서 경전적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빠야씨의 경에 비유를 들어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허무주의를 논파하기 위하여 수많은 비유를 들었다. 이를 차례로 나열해 보면 1)달의 신과 태양의 신의 비유, 2)흉악한 도둑의 비유, 3)똥구덩이의 비유, 4)서른셋 하늘나라의 비유, 5)눈먼 봉사의 비유, 6)임산부의 비유, 7)꿈의 비유, 8)작열하는 쇳덩이의 비유, 9)나팔수의 나팔의 비유, 10)불을 섬기는 결발행자의 비유, 11)두 명의 카라반 스승의 비유, 12)마른 똥의 운반자의 비유, 13)놀음문의 비유, 14)삼꾸러미 운반의 비유를 들었다.

 

 

경에서는 14가지 비유로 허무주의를 논파했다. 이렇게 비유를 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세상에서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도 말한 의미를 이해합니다.”(D23.10)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본래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진리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스승과 제자사이에 전승된다면 비밀의 가르침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민중언어를 이용하여 진리를 설명했다. 비유를 들어 설명했을 때 현명한 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D23)에서 본 허무주의 논파 14가지 비유 중에서 네 가지를 설명했다. 이 네 가지만 알아도 유물론에 근거한 허무주의자들과의 대화에서 단멸론을 논파하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이 있기 마련임에도 굳이 저 세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장님인 자와 다름없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겠다고 했을 때, 그에게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과거로 되돌아 가기 원하지 않는다

 

현재 삶에 만족하는 자는 과거로 되돌아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청춘시절이 제아무리 빛나는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탐, , 치로 살았다면 똥구덩이 속으로 들어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유명작가들은 한결같이 과거로 돌아 가지 않는다고 했을까?

 

 

2021-09-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