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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념(死隨念) 다섯 게송을 외우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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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암송

2021. 9. 30.

사수념(死隨念) 다섯 게송을 외우고자

 

 

이른 아침 일터에 왔다. 눈만 뜨면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다. 작은 일인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도심속의 암자라고 해야 할까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나의 왕국이다. 다만 임대료와 관리비가 꾸준히 나가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은 있다.

 

아지트 가운데는 명상공간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앉아 있다. 오래 앉지는 앉는다. 고작 십분 앉아 있는다. 때로 오래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조건이 잘 맞아 떨어졌을 때이다. 명상이 잘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오분 앉아 있기가 힘들 때가 있다.

 

네 가지 예비수행

 

어떻게 해야 집중을 잘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예비동작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우 자나카 사야도의 수행지침서 위빳사나 수행 28을 보면 본수행에 앞서서 네 가지 예비수행 중의 하나를 하라고 했다. 그 예비수행은 다름아닌 네 가지 사마타명상이다. 이는 1)부처님 덕성에 대한 숙고(佛隨念), 2)자애의 대한 숙고(慈愛觀), 3)몸의 혐오에 대한 숙고(不淨觀), 4)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를 말한다. 어떻게 하는가?

 

네 가지 예비수행을 어떻게 하는가? 우 자나카 사야도의 지침서에 따르면, 불수념에 대해서는 부처님,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정신적 오염원과 장애를 타파하시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셨고, 그럼으로써 일체중생의 존경과 흠모를 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이라고 숙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애관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라고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라고 했다. 부정관에 대해서는 “몸은 창자, , 가래… 등과 같은 불결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숙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사수념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숙고 해야 한다고 했다.

 

좌선할 때 막바로 앉기 보다는 예비 동작을 취해야 한다. 행선이 가장 좋다.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보면 집중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깊은 집중은 아니다. 이를 근접삼매라 해야 할 것이다. 본삼매에 들기 전에 예비삼매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근접삼매를 가지고 좌선에 임하면 집중이 쉽게 된다고 말한다.

 

예비단계 수행에서 행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수념,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과 같은 네 가지 사마타수행도 있다. 네 가지 사마타 중에서 하나에 집중하면 근접삼매에 이를 것이다. 이 근접삼매의 힘으로 좌선에 임했을 때 본삼매에 들어갈 것이다.

 

암송하는 것도 근접삼매에 해당될까? 최근 외운 법구경 찟따왁가(마음의 품) 열한 게송을 암송했을 때 마음이 집중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기쁨으로 충만된다. 이 힘으로 좌선에 임하면 비교적 집중이 잘 되는 것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수행은 일천하다. 오래 전부터 수행하고자 했으나 드문드문 했을 뿐이다. 몇차례 집중수행에 참여해 보기도 했으나 기법만 배웠을 뿐이다. 수행은 홀로 있을 때 잘 해야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좌선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으면 호흡을 보아야 한다. 호흡을 본다는 것은 호흡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몸관찰에 해당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복부관찰은 다름 아닌 호흡관찰에 해당된다. 왜 복부를 관찰하라는 것일까? 이는 사마타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호흡을 대상으로 하여 집중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호흡을 대상으로 하면 호흡이라는 대상에 몰입되어 버린다. 그래서 호흡을 보라고 하지 않고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관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느낌관찰도 있고, 마음관찰도 있고, 법관찰도 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몸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풍대를 관찰하는 것이 된다. 몸을 이루는 지, , , 풍 사대 중에서 부품과 꺼짐은 바람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풍대관찰로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와 달리 대상에 몰입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몰입되면 움직임을 관찰할 수 없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순간집중해야 한다. 이는 본삼매에 들기 전 단계인 근접삼매와 같은 것이다.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본삼매)는 어떻게 다를까?

 

근접삼매(upacāra-samādhi)와 근본삼매(본삼매: appanā-samādhi)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는 청정도론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근접삼매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매의 두 종류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근접삼매에서는 선정의 고리들이 견고하지 않다. 선정의 고리들이 견고한 성질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일으켜서 세워놓으면, 거듭해서 땅에 넘어지는 것과 같다.”(Vism.4.32)

 

 

근접삼매는 견고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자꾸 넘어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에 반하여 본삼매에 대해서는 선정의 고리가 견고하다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건강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 종일이라도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Vism.4.33)라고 했다.

 

삼매에 든 수행자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몇시간 앉아 있을 것이다. 이는 선정의 고리가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어른이 하루 종일 서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반면 근접삼매는 선정의 고리가 약해서 어린아이가 서면 넘어지곤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수행자는 본삼매는커녕 근접삼매에 들기도 힘들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청정도론에서 근접삼매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최초의 입정에서 각각의 선정에의 근접삼매가 일어날 때까지 전개되는 삼매수행을 행도라고 하고, 근접삼매에서 비롯하여 근본삼매가 일어날 때까지 전개되는 지혜를 곧바른 앎이라고 한다.”(Vism.3.15)

 

 

삼매에는 세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도, 근접삼매, 본삼매를 말한다. 여기서 행도는 근접삼매 전단계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근접삼매에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접삼매 단계에 들어가려면 먼저 예비수행을 해야 함을 말한다. 이를 행도라고 했다. 이와 같은 행도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런데 어떤 자에게는 어렵다. 장애 등의 반대가 되는 상태의 현행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에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Vism.3.15)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근본삼매(본삼매)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근접삼매와 유사한 순간삼매에서 하는 것이다. 이를 카니까사마디(khaṇikasamādhi)라고 한다. 움직이는 대상을 순간 포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찰나찰나 예리한 집중을 요구한다. 그런데 우 자나카 사야도의 수행지침서를 보면 위빠사나 본수행에 앞서 불수념, 부정관, 자애관, 사수념과 같은 예비단계의 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는 근접삼매에 들어 가는 것도 쉽지 않음을 말한다.

 

전생에 닦은 수행공덕 힘으로

 

청정도론을 보면 수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에서부터 수행공덕을 쌓은 자가 그 힘으로 현생에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인용된 언제나 계행을 갖추고 지혜를 지니고 삼매에 잘 들어 노력하며 정진하는 님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흐름을 건너네.”(S2.15)라는 니까야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삼매에 잘 들려면 먼저 계행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계행과 지혜는 어느 날 갑자기 갖추어 지는 것이 아니다. 현생에서 학습으로 형성되기 힘들다. 학이지자가 아니다. 타고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언급되어 있는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수행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선정에도 잘 드는 사람이 있다. 또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 있다. 어떻게 이런 조건을 갖추게 되었을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전생에서부터 수행자로 산 자가 갖춘다고 했다. 이는 지혜를 갖춘 자에 대하여 “ ‘지혜를 갖춘 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를 갖춘자이다.”(Vism.1.7)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전생부터 수행했던 자가 이번 생에서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현생에서 처음 수행하는 자들도 수행을 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본다면 전생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어떤 이는 아예 수행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이런 수행이 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부터 수행자는 이 생에도 수행자로 살기 쉽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업생적 지혜를 가진 자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세 가지 원인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무탐, 무진, 무치의 세 가지 원인이 있는 선업의 과보로서 생겨난 이숙식”(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37번 각주)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인과를 중요시한다. 연기법도 인과에 대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 , 과에 대한 것이다. 전생에 탐, , 치를 소멸하는 수행을 했다면 그 수행을 한 인연으로 이번 생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를 니까야에서는 지혜를 갖춘 자(nāro sapañño)’라고 했다. 여기서 지혜를 갖추어 태어난 자를 생이지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빠알리어 사빤냐(sapaññ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에서 有智慧者, 具有智慧的로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죽음명상을 하고자

 

매일 아침 앉아 보지만 여의치 않다. 아무래도 전생의 수행공덕이 약해서 그런 것 같다. 이것도 핑계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목숨을 걸고 하면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인생을 너무 만만하고 쉽게 사는 것인지 모른다. 먼저 게송을 외워야 겠다. 이에 사수념을 외워 볼까 한다.

 

사수념은 어떤 것일까? 우 자나카 사야도의 지침서에 예비단계 수행으로서 언급된 바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숙고해야 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수념, 즉 죽음명상과 관련된 게송이 예경지송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 발간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다섯 게송이다.

 

 

Addhuva jīvita

Dhuva maraa

Avassa mayā maritabba (eva)

Maraa-pariyosāna me jīvita

Jīvita me aniyata

Maraa me niyata

 

Kammassakā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isaraā,

ya kamma karonti

kalyāa vā pāpaka vā

tassa dāyādā bhavanti

 

Idha nandati pecca nandati,

katapuñño ubhayattha nandati;

Puñña me katanti nandati,

bhiyyo nandati suggati gato.

 

Acira vataya kāyo,

pathavi adhisessati;

Chuddho apetaviññāo,

niratthava kaligara.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esa vūpasamo sukho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

 

! 머지않아 이 몸은

!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다.(Dhp.41)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11)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예경지송, 723-725)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예경지송 추모경송 품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라고 했다. 이는 마라나사띠(maraasati)를 번역한 말이다. 이를 죽음명상(meditation on death) 또는 사수념(死隨念)이라고 한다.

 

죽음명상은 모두 다섯 게송으로 되어 있다.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다만 첫번째 게송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으로 시작되는 게송의 출처는 불분명하다. 아마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온 주석의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명상은 근접삼매까지만

 

죽음명상은 근접삼매에 해당된다. 근본삼매(본삼매)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 대상은 고유한 본성의 상태로 인하여 그리고 외경되어야 할 것인 까닭에, 근본삼매에 들지 못하고 근접삼매에 이른다.”(Vism.8.40)라고 했다.

 

고유한 본성의 상태(sabhava dhamma: 自性法)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청정도론 주석을 보면 니까야를 인용하여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연생의 사실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 늙음과 죽음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며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S12.20)라고 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이 몸과 마음은 가만 있지 않다. 끊임없이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늙음과 죽음으로 끝난다. 특히 죽음과 관련해서 무상한 것, 유위적인 것, 조건발생적인 것, 부서지고 마는 것, 사라지고 마는 것, 소멸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고유한 본성 상태이다, 죽음명상은 이런 사실을 명상하는 것이다.

 

사수념은 죽음에 대하여 명상하는 것이다. 이는 명상대상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경대상이 된다. 이런 이유로 사수념하면 본삼매에 이르지 못하고 근접삼매까지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갑자기 죽음이 닥쳤을 때

 

죽음명상을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초기경전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불사에 뛰어들고 불사를 궁극적으로 하는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을 얻는다.”(A6.19)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하여 죽음명상을 하면 불사, 즉 죽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청정도론에서는 죽음명상을 닦았을 때 다음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는 수행승은 항상 방일을 여의고,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남의 지각을 얻어, 목숨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악을 꾸짖고, 쌓아 모으지 않고, 필수자구에 대한 간탐을 여의고, 무상의 지각을 익힌다. 그것을 새김으로써, 그에게 괴로움의 지각과 실체없음의 지각을 익힌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지 않는 뭇삶이 갑자기 맹수, 야차, , 도적, 살육자에게 공격당하면, 죽을 때 두려움-공포-혼미에 빠지듯, 그와 같이 빠지지 않고, 두려움 없이 혼미 없이 죽는다. 그가 만약 현세에 불사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Vism.8.41)

 

 

누구나 죽는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다.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강도에게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의 이러한 다섯 가지는 이 삶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의 조짐이 없다.”(Vism.8.29)라고 했다.

 

언젠가 맞게 될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 청정도론에서는 죽음명상을 닦으면 안심이라고 했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 닥쳐도 두려움이나 공포, 혼미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수념(死隨念) 다섯 게송을 외우고자

 

이 생에서 수행한 자라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가 가르침을 완성했다면 불사가 될 것이다. 비록 몸은 버려져서 짐승의 먹이가 될지언정 다시 태어나지 않는 불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죽음명상을 닦아 놓으면 못되어도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사수념 다섯 게송을 외우고자 한다.

 

2021-09-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