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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작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무한반복하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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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교활동

2021. 10. 16.

같은 동작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무한반복하다 보면

 

 

50회 정평법회가 1016일 오전 10시 줌으로 열렸다. 정평법회가 50회되었다니 놀랍다. 처음 정평법회가 열렸던 때가 언제였던가? 블로그 기록을 찾아보니 20171118일 처음 열렸다. 이후 매달 법회가 열렸다. 코로나 펜데믹 기간에는 줌으로 열리고 있다. 정평법회가 4년 동안 지속된 것이다. 정평법회 50회는 이렇게 4년의 역사가 있다. 이번 10월 정평법회는 이희선 공동대표가 법문했다.

 

이희선 선생에 따르면 수년전부터 일년에 1-2차례 집중수행했다고 한다. 이런 집중수행이 있어서 삼매수행에 대한 법문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법문내용은 어떤 것일까? 사전배포된 자료를 열어 보니내가 이해하는 삼매로 되어 있다. 모두 22쪽으로 되어 있는 파워포인트 자료이다. 사마타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에서부터 삼매를 장애하는 오장애, 그리고 다섯 가지 삼매요소가 잘 설명되어 있다.

 

 

법문자료에서 관심 있게 본 것은 사마타의 종류에 대한 것이다. 이희선 선생은 세 가지 종류의 삼매를 설명했다. 근접삼매와 본삼매와 멸진정을 말한다. 여기서 본삼매는 네 가지 색계선정과 네 가지 무색계 선정에 대한 것이다.

 

본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근접 삼매에 들어야 할 것이다. 이를 예비삼매라고 볼 수 있다. 근접삼매와 유사한 것으로 순간삼매도 있다. 순간삼매는 위빠사나 수행할 때 필요로 된다. 여기서 순간삼매는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하여 순간포착하는 것이다.

 

 

왜 삼매수행을 해야 할까? 이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을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열반을 체험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 사향사과와 열반을 아홉가지 출세간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열반을 체험할 수 있을까?

 

열반을 체험하려면 단계가 있다. 물론 경전적 근거를 들어 말하는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S41.6)을 보면 알 수 있다.

 

 

까마부의 경에 따르면 세 가지 형성이 소멸되면 열반과 같은 멸진정에 든다고 했다. 이는 “장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언어적 형성이 먼저 소멸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정신적 형성이 소멸합니다.”(S41.6)라는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선정수행을 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멸진정, 즉 상수멸정 상태가 궁극의 목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사라져야 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차례로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 사라지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왜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 사라지는 순으로 되어 있을까? 이는 선정의 단계와 관련이 있다.

 

초선정에서는 사유와 숙고를 하여 들어가게 된다. 모든 선정의 기본이 되는 선정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이선에 들어가면 사유와 숙고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사라짐을 말한다.

 

사선에서는 호흡이 사라지는데 이는 신체적 형성이 사라짐을 말한다. 호흡은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최후로는 정신적 형성이 사라진다. 이에 대하여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를 상수멸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멸진정이다.

 

멸진정에 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선정에서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사라지고, 사선정에서 호흡이라는 신체적 형성이 사라지고, 구선정에서 지각과 사유라는 정신적 형성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장자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 형성입니다. 장자여, 먼저 사유하고 숙고한 뒤에 언어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형성입니다.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마음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 형성입니다.(S41.6)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이희선 선생은 무념과 무심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했다. 무념과 무심이야말로 불교수행의 최고 경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념과 무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무념과 무심은 초기불교와 달리 불이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대승경전 유마경에서 볼 수 있는 불이를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아 부동심이 되었을 때, 둘이 아닌 것이 되었을 때 흔들림 없는 마음상태 즉 무념과 무심의 상태가 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이희선 선생은 진여부동심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진여부동심상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정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선정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근기가 없으면 평생 선정에 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흔히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대념처경에서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D22.2)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길은 에까야나(ekāyana)를 말하는데 일부 번역서에서는 유일한 길(the only way)이라고도 번역한다.

 

한번 열반에 들면 늦어도 못잡아도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삼매를 체험하지 않아도 순간삼매로 관찰수행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함을 말한다.

 

이희선 선생에 따르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는 무념과 무상이라고 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어떻게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오해의 소지가 있다. 현실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스님은 무념이나 무상 대신에 무작으로 번역했다.

 

이희선 선생에 따르면 무작은 마나시까라(manasikāra)를 말한다. 빠알리어 마나시까라는 주의기울임이라고 번역된다. 영어로는 ‘attention’의 뜻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는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라는 말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말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또는 현명한 주의기울임이라고 번역된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무념과 무심은 요니소마나시까라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언어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현상에 대하여 한자어 표현은 한자의 한계로 인하여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무념과 무심에 대하여 마나시까라 또는 요니소마나시까라라고 표현화면 이해하기 쉽다. 이를 우리말로 주의기울임 또는 현명한 주의기울임이라고 하면 더 뜻이 다가온다.

 

이희선 선생은 법문에서 무념과 무심을 강조했다. 이 말은 대승불교 유마경에서 강조된 불이사상과도 관련이 있는데 작의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분별하고 망상하는 마음을 멈춘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사띠가 늘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무념과 무상에 대하여 마나시까라와 같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희선 선생은 법문 도중에 반복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했다. 예를 들어 행선할 때 반복하다 보면 삼매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똑 같은 동작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반복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 요즘 TV에서 생활의 달인을 보는 것처럼 눈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속된말로 도가 터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에 집중하여 몰입했을 때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고 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좌선할 때 호흡에 집중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선정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몰입이 쉽지 않다.

 

매번 똑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때 싫증이 난다. 십분이상 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한시간 동안 동일한 동작을 반복한다면 어떻게 될까? 도가 터질지 모른다. 행선도 그럴 것이다.

 

이전에 이희선 선생과 선정에 대해 얘기 나눈 적이 있다.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반복이다.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를 무한반복하다 보면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행선이 그렇다.

 

무한반복하는 행위는 남이 보기에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일지 모른다. 도를 이루려면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무한반복해야 한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무한반복하다 보면 고귀하고 성스러운 일이 되지 않을까?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마땅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특히 수행이 그렇다. 수행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몸으로 체험하여 지혜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복해야 한다. 같은 동작을 무한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몰입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손해 되는 일은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은 이익만을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는 무한반복으로 구현될 수 있다.

 

행선을 할 때 같은 동작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반복하면 내것이 될 것이다. 마치 빠알리게송 외울 때 백번이고 천번이고 반복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같은 동작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무한반복하다 보면 무념과 무심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2021-10-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