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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시인이 되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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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떠나는 여행

2021. 11. 4.

시인이 되기 보다는

나는 매일 전쟁하고 있다. 삶과의 전쟁이다. 나 자신과의 전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번 패한다. 매일 죽는 사람이다.

통제 되지 않는 욕망, 끓어 오르는 적개심은 나의 최대 적이다. 쉽게 싫증 내는 것도 내부의 적이다. 무엇보다 권태와의 싸움이다. 하품 했을 때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Stn.436)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라 불리고,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라 불린다.” (Stn.437)

일곱 악마의 군대가 있다. 악마라고 하여 무시무시한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번뇌가 악마이다. 탐욕이라는 악마, 성냄이라는 악마를 말한다.

탑욕을 부리는 순간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 악마의 영토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나의 모습은 어떨까? 거울을 보면 추악한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혐오는 분노를 뿌리로 하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죽도록 싫어 하는 마음을 내었을 때 제아무리 미녀라고 하더라도 마녀로 보일 것이다.

부처님은 악마의 군대와 싸워서 이겼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고 했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적과 싸워서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승리자라고 한다.

부처님 승리의 게송을 매일 접하고 있다. 마음이 심란할 때 경전을 열어 본다. 게송 몇 개를 보면 마음이 바뀐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기 때문이다. 심란했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탐욕이 일어 났을 때, 혐오가 일어 났을 때, 하품을 할 때 초기경전을 보아야 한다. 게송이 있는 경전을 열어 보는 것이 더 낫다. 담마빠다,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 테리가타, 그리고 상윳따니까야 1권을 읽으면 효과적이다.

더 이상 시인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한때 시인을 동경했었다.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면 근사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시를 써 보았다. 블로그에 방을 하나 만들어 수백개 썼다. 지역 문인협회 가입도 시도했다. 그러나 문턱이 너무 높았다. 아무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인이 되기를 포기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무리 시를 잘 써도 전승된 게송만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 온 수천, 수만 게송을 보면 내가 표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미 들어가 있다. 다만 모르고 살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내가 시라고 써 놓은 것이 게송과 비교하면 유치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더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시랍시고 끄적 거려 보지만 선시를 접했을 때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시적 감수성이 제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깨달음을 노래한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담마빠다 등 니까야에서 보는 게송과 비교하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 그럼에도 시를 쓴다면 보여 주기 위한 것이 되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리고 "내가 시인인데"라며 특별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자만하게 된다.

시인으로 살기 보다는 수행자로 살고자 한다. 시를 쓰기 보다는 전승된 게송을 외우고자 한다. 시인이 되기 보다는 게송을 근거로 글쓰기 하는 블로거가 되고자 한다.

답은 이미 있다. 인생의 해법은 니까야에 있다. 지금 당장 담마빠다 게송 몇 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시인이 되기 보다 게송을 암송하는 수행자로 살고자 한다. 그래서 나 자신과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고 싶다.

"손에 칼을 쥔
악귀들과 말하는 것이 낫다.
물려죽더라도
독사를 만지는 것이 낫다.

결코 혼자서
한 여인과 대화하지 말라.
눈빛과 미소로 여인은
새김을 잃은 자를 묶어버리네.

또한 얇은 옷으로나
매혹적인 목소리를 내더라도
기절하였거나 죽었더라도
접근하는 것은 좋지 않다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여인의 몸에서 보고
향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매혹된다네.

욕망의 거센 흐름에 표류하면서
욕망을 보지 못하고
윤회속에서 시간과 운명과
여러 존재에 이끌리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완전히 알아
두려움 없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피안에 도달한 자들이
번뇌의 멸진에 이르렀네.” (A5.55)

2021-11-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