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그대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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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강독

2021. 11. 5.

그대는 죄가 없다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시간을 내서 앉아 있어 보지만 잡념만 일어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평소 앉아 있는 버릇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단 오분이라도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시간이 점차 늘어나서 오래 앉아 있게 될 것이다.

 

일상에서 좌선하기가 쉽지 않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심산유곡 암자에서 살아 가지 않는 한 오분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앉아 있지 않으면 더욱도 멀어진다. 왜 그런가?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모임에 한번 빠지고 두번 빠지다 보면 아예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왜 명상에 집착하는 것일까? 명상 좋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알게 된다. 아주 조금 맛만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맛을 못 잊어서 다시 찾게 되든 것이다. 마치 맛집을 찾는 것과 같다. 그런 명상은 어떤 것일까?

 

세상 사람들은 감각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를 흔히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한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후각적으로, 미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감각은 강렬해서 한번 맛보면 좀처럼 끊기 힘들다. 그러나 감각은 거친 것이다. 거친 만큼 오래 가지 않는다. 황제식을 즐기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끝난다. 좀더 오래 즐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은 감각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난다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 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S36.19)라고 했다. 어떤 즐거움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아난다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S36.19)

 

 

선정삼매야말로 어떤 즐거움보다 탁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이 제아무리 강렬해도 선정삼매의 즐거움 보다 못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선정삼매에 들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선정삼매에 대한 동경은 있다. 그래서 앉아 있어 보지만 쉽지 않다. 초기경전에서는 무수하게 선정삼매에 대한 정형구가 나오지만 맛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큰 수확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이런 사실이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아주 조그마한 인연으로 인하여 언젠가 이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읨

 

시월 두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세번째로 합송한 경은 여읨에 대한 것이다. 교재에서는 정신활동을 기울이더라도 뛰어들어 환희하지 않는 여읨의 세계라고 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여읨의 경(Nissāraīyasutta)’(A5.200)이다.

 

여읨의 경은 다섯 가지 법수로 되어 있다. 감각적 쾌락의 여읨, 분노의 여읨, 폭력의 여읨, 물질의 여읨, 개체의 소멸이다. 여기서 여읨을 뜻하는 말은 닛사라니야(Nissāraīya)이다. 첫번째 여읨에 대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더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마음이 뛰어들지 않고, 환희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몰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읨에 마음이 뛰어들고, 환희하고, 안주하고, 몰입한다. 그에게 그 마음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잘 떠나간 것이고, 잘 닦여진 것이고, 잘 빠져나온 것이고, 잘 벗어난 것이고, 잘 해탈된 것이다.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조건으로 생겨난 곤혹과 고뇌의 번뇌에서 벗어난다. 그는 그러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읨이라고 한다.”(A5.200)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읨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넷깜마(nekkhamma), 출리(出離)라고 한다. 출리는 첫번째 선정을 통해서 성취된다. 어떤 방법으로 성취하는가? 부정관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다.

 

부정관에는 열 가지가 있다. 시체가 썩는 것을 관찰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밖에도 대념처경에 따르면 신체의 32가지 기관을 관찰함으로써 가능하다. 매혹적인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신체를 관찰하다 보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띠붓따까에도 여읨의 경

 

이띠붓따까에도 여읨의 경이 있다. 이띠붓따까에서는 세 가지 여읨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여읨의 세계가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여읨이 출리이다. 미세한 물질계의 여읨이 무색이다. 어떠한 것이든 존재하고 형성되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의 여읨의 소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여읨의 세계가 있다.”(It.61)라고 했다.

 

이띠붓따까에서는 세 가지 여읨에 대하여 출리(nekkhamma), 무색(āruppa), 소멸(nirodha)로 설명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법수가 다섯이므로 앞서 세 개에다가 분노의 여읨과 폭력의 여읨 두 가지를 추가했다.

 

부처님 가르침의 바다는 넓고도 깊다. 하나를 알면 두개, 세개가 달려 나오는 것 같다. 여읨을 뜻하는 빠알리어 닛사라니야를 빠알리사전에서 검색하자 이띠붓따까가 연결되었다.

 

놀랍게도 이띠붓따까 주석에서는 세 가지 여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니까야는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니까야모임 시간에 종종 부처님 가르침은 시스터메틱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치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 가듯이 정교함을 말한다.

 

오염에서 생긴 욕망과 대상에서 생긴 욕망

 

부처님 가르침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다. 그래서 시스터메틱(Systametic)하다고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에는 없고 이띠붓따까에는 있는 출리, 즉 욕망의 여읨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ItA.II.40-41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오염에서 생긴 욕망과 대상에서 생긴 욕망이 있다. 이러한 욕망이 없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를 여의었거나, 정신적 욕망을 여의었기 때문에 물질적 욕망도 여의게 된다.” (이띠붓따까, 987번 각주)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오염에서 생긴 것이고, 또 하나는 대상에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놀랍고 탁월한 말이다. 왜 그런가? 사람들은 욕망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매혹적인 대상이 있을 때 욕망이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이와 같은 고정관념을 깬다. 욕망은 대상이 있어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상을 보았을 때 욕망이 생겨난 것은 이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사과를 보았을 때 사과 맛을 보았다면 먹고 싶은 생각이 날 것이다. 매혹적인 이성을 보고 욕정을 느꼈다면 이전에 체험이 있기도 하지만 본능적인 것일수도 있다. 이를 이숙(異熟)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지금 당장 받지 못해도 시간 차이를 두고 받는다. 이를 깜마위빠까라고 하여 업이숙이라고 한다. 업이 시간을 두고 달리 익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행위한 것이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 나타난다. 대상을 보았을 때 이숙에 의한 것이 많다. 과거 경험했던 것이나 체험했던 것이 연상되어서 떠 오르는 것이다. 이럴 때는 대상을 접한 것이 조건이 된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대상을 접하지 않았다면 욕망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을 접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눈이 있는 한 볼 수밖에 없고, 귀가 있는 한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상 그 자체가 욕망이 될 수 없다. 욕망은 내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않음의 경(Nasantisutta)’(S1.34)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세상에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 있지만,

여기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S1.34)

 

 

게송은 욕망을 이겨내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핵심은 감각대상이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기 매혹적인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 욕망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욕망이 일어남을 말한다.

 

게송에서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다. (Na 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1.34)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은 탁월하다. 그 어디 에서도 보지 못했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 이 한 가지 사실만 알아도 크게 깨닫는 것 같다. 빠알리사전을 보다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연결에 연결이 되어서 마침내 욕망을 종식시킬 수 있는 해법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Sakapparāgo purisassa kāmo)”(S1.34)라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한 각주를 보니 또 다른 경으로 안내한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라면 내가 욕망을 내도 나는 책임이 없을 것이다. 저기에 금이 있는데 금이 욕망 그 자체라면 금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나에게 욕망이 일어난 것은 대상이 문제가 아니다. 대상을 보고 있는 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빠일리성전협회본 각주를 보면감각적 쾌락의 종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의 문제가 되므로 욕망을 없애는 것이 현자의 할 일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앙굿따라니까야 AN.III.411을 참고하라고 했다.

 

접촉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

 

앙굿따라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관련 경은 꿰뚫음의 경’(A6.63)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고, 또한 감각적 욕망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인가? 수행승들이여, 접촉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이다.”(A6.63)라고 했다. 한마디로 접촉이 원인인 것이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접촉이 없다면 시작도 없을 것이다. 시각접촉, 청각접촉 등 육처에서 접촉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삼사화합촉에 의해서 의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세상이 생겨난다고 했다.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접촉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감각적 욕망도 접촉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감각대상에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은 나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감각적 욕망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결과인가?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열망하면서 그때 그때 일치하는 공덕을 수반하거나 악덕을 수반하는 자신을 만들어낸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결과이다.”(A6.63)

 

 

감각적 욕망은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있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 욕망을 일으켰을 때 결과가 따른다. 이를 공덕과 악덕 두 가지로 설명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

 

공덕을 지으면 선처에 태어나고 악덕을 지으면 악처에 태어난다. 그러나 부처님은 공덕과 악덕을 초월한다. 감각대상을 보았을 때 어떠한 과보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으로 가능하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말한다.

 

아라한의 마음을 작용심이라고 한다. 대상을 보아도 볼 뿐 어떠한 업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형상을 보았을 때 볼 뿐이고, 소리를 들었을 때 들을 뿐이다. 그래서 그렇네, 그렇구나, 그렇군라며 어떠한 업도 만들어 내지 않는 마음을 작용심이라고 한다.

 

대상을 보았을 때 마음이 단지 볼 뿐또는 들을 뿐이라며 작용만 한다면 어떠한 감각적 욕망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사람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사유의 탐욕이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네.

사람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사유의 탐욕이라,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데,

현명한 사람은 그것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네.”(A6.63)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르침의 바다는 넓고도 깊어서 그 끝을 알 수 없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세번째 경 후기를 작성하면서 책상에 경전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상윳따니까야 빤짜깡가의 경’(S36.19), 이띠붓따까 여읨의 경’(It.61), 다시 상윳따니까야 않음의 경’(S1.34), 다시 앙굿따라니까야 꿰뚫음의 경’(A6.63), 그리고 우다나 바히야의 경’(Ud.6)을 열어 보게 되었다.

 

 

후기를 작성하기 위하여 참고한 경전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각주를 보면 참고 경을 알려 주는데 모두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담마는 잘 짜여진 천과 같다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어긋나는 것은 없다. 이 경에서 원론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저 경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식이다. 욕망에 대한 가르침도 그렇다.

 

시월 두번째 금요니까야모임 후기를 모두 작성했다. 세번째로 합송한 경에 대한 후기를 작성하다 보니 오전이 다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시각 1시가 넘었다. 점심도 거르면서 마무리 작업하고 있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고, 빠알리 사전에서 단어가 들어간 경을 참고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 결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그동안 늘 풀리지 않았던 것이 이번 글쓰기를 통해서 풀린 것 같다. 그것은 욕망의 문제이다. 나에게 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경전에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환희했다.

 

오염된 마음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글쓰는 보람을 느낀다. 그것은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S1.34)라는 게송으로 요약된다. 나에게 욕망이 일어난 것은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매혹적이라고 하여 대상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대상은 욕망덩어리가 아니다. 나의 마음이 욕망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오염된 마음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S1.34)라고 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접촉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이다.”(A6.63)라고 했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 졌다. 나에게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상대의 잘못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탐욕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오염된 마음으로 대상을 접했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이에 대한 해법도 제시했다.

 

그대는 죄가 없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여인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보지 않는 것이다. 보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면 사띠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차이가 많으면 어머니로 보고, 비슷하면 누이로 보고, 차이가 많이 나면 딸로 보라고 했다. 모두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욕망은 근본적으로는 수행으로 극복해야 한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보면 볼 뿐하는 것이다. 이를 작용심(作用心)이라고 한다.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아라한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다나바히야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 속에 없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상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6)

 

 

2021-11-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