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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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전설이 될 수 있을까? 조정래문학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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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21. 11. 16.

나도 전설이 될 수 있을까? 조정래문학관에서


마치 칠팔십년대를 풍경을 보는 듯하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니다. 비좁아 보이는 곳에 집이 밀집되어 있고 난개발 된 듯하다. 전반적으로 궁핍해 보인다. 벌교읍에 들어섰을 때 첫인상이 그랬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파트에서 안락한 삶을 사는 자는 다른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물 밖에는 또다른 세상이 있다. 더 멋지고 근사한 세상도 있지만 비참하고 죽지 못해 사는 세상도 있다.

세상은 반드시 물질적 세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세계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 가지 세상을 말했다. 오까사로까(
空間界), 상카라로까(形成界), 삿따로까(衆生界)를 말한다. 나는 이 세 가지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낙안민속휴양림에서 아침밥을 지어먹었다. 12일 일정 남도순례에서 어디로 갈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어제 선암사에서 휴양림까지 오는데 이정표 팻말을 본 것이 결정적이다. 이정표에는 '조정래길'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정래작가는 생존해 있다. 살아 있는 작가에게 길이름을 붙여 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다. 수원 어딘가에 축구인 '박지성로'가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은 있다. 그럼에도 현역작가에게 길이름을 부여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소위 살아있는 전설이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전설이 될 수 있을까?

여기 어떤 사건이 있다. 사람들 입에서 사건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한세대 이상 세월이 흘렀을 때 전설이 된다. 사건의 당사자가 살아 있어도 전설이 되고 죽었어도 전설이 된다.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존하고 있는 한 전설적 사건이 된다.

요즘 유튜브에서 해태타이거즈 영상을 종종 접한다. 진행자는 프로야구 원년멤버들에게 '전설'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그래서 이름 뒤에 반드시 '아무개 전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전설이 된 것이다.

살아 있는 전설의 행적은 모두 전설적 사건이 되는 것 같다. 프로야구 원년 멤버들의 에피소드를 들어 보면 전설적 사건이다. 그때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설 속의 이야기기 된 것이다.

전설은 신화가 될 수 있다. 전설적 인물도 사라지고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이야기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야기가 생명력을 가져서 후대로 전승될 때 신화가 된다. 전설속의 인물은 신화적 인물로 승격되는 것이다.

벌교에 조정래길이 있으면 조정래문학관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들어 본 것 같다. 낙안에서 벌교까지는 먼거리가 아니다. 17키로 20분가량 밖에 걸리지 않는다.

 


조정래문학관은 벌교공영버스터미널 바로 옆에 있다. 도시가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빛나는 건축물이 우뚝 솟아 있는 형국이다. 이른 오전이어서일까 너른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보이지 않는다. 꽤 큰 건물에 들어가니 입장료를 받았다. 어른은 2천원이다.

조정래문학관의 정식명칭은 '태백산맥문학관'이다. 작가의 대표작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나 보통 조정래문학관으로 부르는 것 같다.

 


문학관 입구에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있다. 11 21일 토요일 일정을 보면, 소설 속의 장소를 탐방하는 문학기행도 있고, 조정래 작가와 함께 하는 북콘서트도 있고, 소설 태백산맥 필사본 증정식도 계획되어 있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과 만나는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조정래문학관은 하루 머물다가 간 휴양림 근처에 있어서 불쑥 찾아 간 곳이다. 가서 보니 작가의 모든 것이 다 진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 태백산맥 육필원고가 사람 키보다 높다. 소설 원고지 첫장과 끝장도 전시되어 있다. 끝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듯 바람소리가 멀리 스쳐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것이 원고지 여섯 줄 분량이다. 열줄에서 여섯줄이므로 한번도 원고지를 써 본적이 없는 블로거에게 원고지 매수를 짐작하게 해준다.

마지막 장면은 어떤 것일까? 소설을 다 읽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영화로 보기는 했으나 전부 기억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인공 역할을 맡은 안성기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데올로기에 치어 죽은 자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은 수난작이기도 하다. 작가는 빨갱이로 몰려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도 문학관에 증거로 남아 있다. 그런 태백산맥은 파격적이었다. 빨치산의 노래도 실려 있다. 문학관에 있는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태백산맥에 눈나린다.
총을 메어라 출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오나
마음속엔 피 끓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을까? 마치 학창시절 데모가를 부르듯이 불렀을 것이다. 그들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이데올로기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이어 사라지지 않았을까?

태백산맥을 언제 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태백산맥 열풍이 불었을 때 단권으로 몇 권 사 보았던 것 같다. 내용은 적나라했다. 특히 성적묘사에 대한 것이 강렬했다. 그래서인지 '청소년태백산맥'을 별도로 출간했는지 모른다.

 


태백산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태의 '남부군' 영향이 크다. 빨치산 기록물이라 볼 수 있는 남부군을 읽고서 자연스럽게 태백산맥도 읽게 되었다. 나중에 남부군과 태백산맥은 영화로 만들어 졌다. 두 영화 주인공은 모두 안성기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남부군이 태백산맥 같고, 태백산맥이 남부군 같은 착각이 든다.

문학관에는 작가의 모든 것이 다 진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년필, 찻잔, 밥그릇, 옷 등 작가의 일상과 관련된 소품이 모두 전시되어 있다. 이는 작가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잊혀진다. 평범한 삶을 살다 죽으면 쉽게 잊혀진다. 그가 남긴 유품은 버려지거나 불태워진다. 몇 년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가족들만이 그의 삶을 기억할 것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사람들 기억 속에 남는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는다.

죽으면 끝나는 것일까?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을 때 허무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삶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해서 살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S4 9)라고 말한다.

허무주의자들은 감각에 의존하는 삶을 산다. 죽으면 썩을 몸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 같다. 삶에서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알콜증독자가 되고 마약중독자가 될 것이다. 마치 우유에 도취된 아기처럼 살 것이다.

허무주의자에게 시간은 길 것이다.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기 쉽다. 그래서 악마는 "사람의 목숨은 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S4.9)라며 속삭이는 것이다.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도 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이 시작된다.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는 연기법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허무주의자들은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 세상의 행복뿐만 아니라 저 세상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산 자는 저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세상의 행복과 저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공덕지으라고 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공덕이 되는 삶은 행복하다. 왜 그런가?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글 감옥에 갇혀서 창작활동을 할 때 자타가 이익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크게 울림을 주었다면 살아 있는 전설이 된다.

조정래작가는 태백산맥 하나로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전설을 만나고자 한다. 그래서 북콘서트도 열고 문학기행도 한다. 나도 작가처럼 살아 있는 전설이 될 수 없을까?

문학관에서 본 작가의 집필량은 엄청나다. 또한 작가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원고지 필사본이 이를 말해 준다. 문학관 2층에 가면 독자들의 필사본에 전시된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아들과 며느리의 필사본도 있다.

 


작가의 작품에는 태백산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랑' 등 여러 장편이 있다. 또한 '화려한 글 감옥'과 여러 단행본도 있다. 전시된 것을 보니 수십권이다. 글을 쓰는대로 책이 되는 것 같다. 일생동안 쓴다면 백권이 넘을 것이다. 살아있는 전설은 계속 전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작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글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일까? 진짜 글 쓰는 사람에 대한 모독은 아닐까?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요즘에는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올린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도 '글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작가'라는 호칭을 불러준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작가가 아닙니다. 저는 블로거입니다."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이런 것도 한두번이다. 매번 알려 줄 수 없다. 요즘은 내버려 둔다.

블로그에 글쓰기하는 것은 일회성이다. 그날 쓰는 것으로 그친다. 소설처럼 연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이 대상이 된다. 그러다 보니 주제가 다양하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불교블로거'라고 말한다.

불교블로거도 전설이 될 수 있을까? 스님이 글을 쓰면 법문이 되고, 학자가 글을 쓰면 논문이 된다. 작가가 글을 쓰면 소설이 되고, 또한 시인이 글을 쓰면 시가 된다. 그럼 자영업자가 인터넷에 글을 쓰면? 인터넷잡문이 될 것이다.

인터넷에 잡문을 쓰고 있다. 2000년대 인터넷이 크게 활성화되었을 때 블로그라는 신상품이 나왔다. 그때 블로그라는 것을 해 보았다. 글이라고는 한번도 써 본적이 없는 자가 2006년 이후 인터넷에 쓴 잡문이 이제 6천개가 넘었다.

예전에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37권 만들었다. 이런 추세로 가면 100권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전설이 될 수 있을까?


2021-11-16
담마다사 이병욱